정식으로 눈이 맞은 건 신규직원 합숙 교육 때였다. 두 달 합숙 교육에 짝꿍들이 여기저기 탄생했다. 여자를 유래 없이 많이 뽑았지만 남자가 훨씬 많았고 내가 연인을 만난 건 내 능력(?)과는 큰 상관없이 남녀 성비의 차이로 인한 높아진 확률에서 얻은 승리...라고 하기엔 너무 로맨틱하지 않네. 아무튼.
같은 소방서 소속이었지만 다른 센터에서 근무했기에 근무 날은 화재현장이 아니면 만날 수 없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랬기에 불이 나길 바랐다나. 나는 예쁘지 않은 모습으로 버벅거리고 있는 나를 보여주기 싫었고 그도 나처럼 초보였기에 피할 수 없었던, 선배들에게 지적받는 모습이나 서툴러서 허둥대는 모습을 나는 자주 목격했고 그게 좋지 않았다. 선배들은 여자인 나에게는 차마 못하는 말들로 남자 신입들에게는 불호령을 내리기 일쑤였기에 쉬는 날 좋은 모습으로만 함께 있길 원했었다.
그렇게 시간이 가고 어느 정도 현장의 분주함이 익숙해질 무렵 당시 남자 친구였던 그를 화재현장에서 만났다. 선배들 눈을 피해 남자 친구에게 어떻게 보호본능이라도 일으켜볼 요량으로 옆에 다가갔을 때 그가 말했다.
"내가 오른쪽을 맡을게! 넌 왼쪽으로 들어가!!"
어찌나 단호하던지 왼쪽을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될 분위기.
'힘들지? 어디 가서 좀 앉아있어. 내가 네 몫까지 할게.'라고 말해주지 않은 그를 그때 차 버렸어야 했나.
뼛속까지 소방관인 내 남편을 나는 사랑한다.
화창한 일요일 오전
소방서에 적응했다고 해도 같이 일하는 모든 소방관이 나를 예뻐할 리 없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의자에 비스듬히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그분은 "현장에서 사람 하나 업고 나올 수 있어요?"라고 물으며 나를 공개 처형했다. 대답 없이 우물쭈물거리자 "그 정도는 해야 소방관이라 할 수 있는 거야."라고 쐐기를 박았다.
틀린 말 하나 없어서 더 서글펐다. 국민의 혈세를 탐하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역할도 다하지 못하고 심지어 동료에게 피해까지 주는 여자 소방관. 그게 그 시절 나였다.
하루는 웃고 하루는 좌절하며,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면서 소방관으로서의 시간이 흘러 1년이 넘었다.
소방공무원 시험은 불을 끄는, 화재 관련 일이 주된 업무인 쪽과 소방차를 다루는 일이 주된 업무인 쪽, 대학에서 응급구조를 전공한 이들을 위한 응급구조업무로 나뉜다. 나같이 화재 관련 소방관이 된 여성소방대원은 1년 정도 후엔 자연스레 응급구조사 양성을 위한 교육을 받고 2급 응급구조사 자격을 취득하고 그 뒤로는 구급차를 타는 일을 할 수 있다. 아무래도 몸을 쓰기보다는 각종 상황에 따른 응급처치를 배우고 익히면 제 몫을 할 수 있는 일이기에 나 역시 그 교육을 받게 되었다.
당연히 몇 달의 교육을 받는다고 해서 가장 응급한 상황에서 환자를 처치해야 하는 중대한 일을 잘해 낼 수는 없다. 교육을 받기 전 구급대원을 따라 몇 번 출동하면서 아, 이런 일이구나 정도의 감을 잡을 수 있었지만
나에겐 여전히 너무 무섭고 겁나는 일이었다.
그 일에 맞닥뜨린 건 내가 교육을 받고 돌아와서 세 번째 출동 만이었다.
화창한 일요일 오전이었고 한여름이었다.
구급출동 벨이 울렸고 차에 타자 바로 무전이 온다.
"망자. 망자 확인바람."
그날 그곳의 모든 것은 아직도 나를 조여 온다. 차에서 내려 그 가건물로 들어가는 길, 차에서 내리자마자 들려오는 한 여성의 숨넘어갈 듯 한 울음소리. 그 망자가 마신 농약병과 그의 눈.
"선생님! 제발 이 사람 좀 살려주세요!!"
죽은 사람 옆에 있는 것보다 더 싫었던 건 그 와중에 내가 전문가가 되어 그 사람이 망자임을 확인해야 하고 보호자에게 이 현실을 말해야 하는 것이었다. 난 선생님도 아니고 그 사람을 살릴 수도 없는 이제 막 응급구조사 교육을 받고 세 번째로 출동한 소방관일 뿐이었다. 난 겨우 25살이었고 그 누구의 죽음도 경험해보지 못했으며 죽은 배우자를 달래줄 적당한 말도 알지 못하는, 그냥,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애였다.
난 그 현장을 빠져나왔고 소방서로 돌아왔고 이후에 보낸 그날 하루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다음 날부터 나는 소방서로 출근하지 않았다.
평생 나에게 맞지 않을 소방복
불을 끄는 일은 내 힘에 벅찼다. 나 혼자 해내기엔 역부족이었기에 늘 누군가와 팀이 되어 움직였다. 오롯이 내가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은 없었다. 적당히 선배들을 쫓아다니면서 눈치도 많이 받고 미움도 받았지만 열심히 하는 나를 인정해주는 분들이 있었기에 점점 할 수 있는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더 잘하고 싶었다. 그냥 '예쁘게 봐주자'가 아니라 '없으면 안 되는 사람', '제대로 내 몫을 다 하는 사람'이고 싶었고 그건 응급구조사 교육을 받고 구급차를 타는 것이라 판단했다.
기꺼이 받은 그 교육은 사고 현장에서 안전하고 신속하게 환자를 병원으로 옮기는 일을 가르쳐주었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을 위로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응급구조사는 사건의 가장 험한 장면을 목격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같이 일하는 여자 구급대원들이 겪은 무용담은 내가 본 것보다 몇 배나 더 끔찍한 것들도 수두룩하다. 그 정도 각오도 없이 그 일을 시작했냐고,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선배들은 나에게 말했다. 하지만 괜찮고 괜찮지 않고는 나의 문제였다. 지금 이 순간도 온몸이 저리게 하는 것은 죽은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나는 나를 붙잡고 울던 18년 전 그 여자의 선명한 얼굴과 걸어 나오던 길 뒤로 더 커진, 비명에 가까운 울음의 박자를 기억한다.
나는 이것이 결코 '괜찮을'수 없었다.
나는 결국, 준비 안 된 채 소방관이 되어서 준비 안 된 채 불을 껐고 또 준비 안 된 채 죽은 사람을 봤다. 단순히 그 사건만이 유일한 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난 그저, 평생 나에게 맞지 않을 소방복을 입고 있는 나에 대해서 드디어 알게 된 것뿐이었다. 동료에게 미안했어도 좋은 사이를 유지할 만큼 애썼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 노력했으며 어떤 일은 몸에 익어 편해지기도 했었지만 내가 진작에 인정했어야 하는 건 따로 있었다.
내가 이 일의 본질에 전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사무적인 일로 인정을 받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곳 소방서의 목적에 부합하는 사람이 아니란 것. 이곳에 더 이상 내가 머물 수 없다는 걸 말이다.
소방관이었던 시절을 떠올리면 사실 끝이 그렇게 나서 그런지 늘 가슴 한쪽이 무겁다. 시험 보자는 친구의 권유에 조금 더 신중했더라면. 또 그 교육을 받겠다고 하지 않았더라면. 그 출동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나갔더라면 하며 여러 가정을 해본다. 현실과 아무 상관없는 여러 시나리오들이 떠오른다.
두 달을 온 집안에 불을 켜고 살았다. 쉽지 않은 그 장면은 나에게 큰 파도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젠 알 것 같다. 준비성 없던 나는 생각지도 못한 짜디짠 바닷물로 뒤덮였지만 그 짠 바닷물도 결국 마르더라는 것. 다시 툭툭 소금을 털어내면 그만이라는 것. 물론 털어도 털어도 몸에 달라붙어 있는 어떤 것들은 그대로 안고 가야 하지만 그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색도 바래고 그 짠맛도 덜해진다는 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