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오늘, 미켈란젤로의 도시 피렌체의 10월
예술가의 도시에 살면 예술가가 될 수 있을까..?!!
3년 전 오늘, 우리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브런치를 열면 붉은 기운이 감도는 도시를 볼 수 있다. 미켈란젤로의 도시 피렌체의 아침 풍경이다. 피렌체는 아르노 강변에 위치해 있으며 역사상 중세, 르네상스 시대에는 건축과 예술로 유명한 곳이었다. 중세 유럽의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였으며 종종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본고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우리는 3년 전 오늘(2018년 10월 15일) 이곳에 살고 있었다.
꿈에 그리던 도시였고 죽을 때까지 단 한 번 만이라도 살아보고 싶은 도시였다. 그 소원을 이루고 10월 어느 날 아침 하니와 함께 피렌체를 둘러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던 집은 위 자료사진 가운데쯤에 위치한 빨간 돔이 위치한 곳으로 메디치가의 무덤이 있는 까뻴레 메디체 (Cappelle Medicee) 바로 앞이었다.
그 곁에 유명한 까떼드랄레 디 산타 마리아 델 퓌오레 (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 두오모가 있다. 또 두오모 앞에는 지옷또 의 종탑이라 불리는 깜빠닐레 디 지옷또(Campanile di Giotto)가 우뚝 솟아있다. 그리고 사진의 중앙 좌측으로 삐앗싸 델라 시뇨리아(Piazza della Signoria)가 우뚝 솟아있다.
이런 풍경은 피렌체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어서 사진 한 장만으로 "앗, 피렌체구나"라며 단박에 알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여행 중에 찍은 사진의 장소는 한결같이 삐앗쌀레 미켈란젤로(Piazzale Michelangelo) 광장 곁의 언덕 위 계단에서 찍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피렌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이자, 아르노 강 위로 떨어지는 일몰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피렌체의 명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끼적거리는 자료사진의 풍경은 관광객들이 쉽게 찾지 못하는 장소이자 찾기를 꺼려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하니와 나는 동이 트기도 전에 집에서부터 피렌체를 가로질러 시뇨리아 광장 옆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일 뽄떼 베끼오(il Ponte Vecchio)를 지나 아르노 강을 따라 천천히 삐앗쌀레 미켈란젤로 광장 아래의 일방통행로를 따라 올라간다.
*포스트에 삽입 된 자료사진은 위 압바찌아 디 산 미니아또 알 몬떼(Abbazia di San Miniato al Monte) 수도원에서 피렌체를 향해 바라본 풍경들이다.
그곳에 압바찌아 디 산 미니아또 알 몬떼(Abbazia di San Miniato al Monte) 수도원이라는 명소가 있다. 우리는 그곳을 둘러보고 있고 그 곁으로 뽀르떼 산떼 공동묘지(Cimitero delle Porte Sante)가 형성된 아름답고 전망이 좋은 곳이다. 이곳은 천년의 세월을 견뎌온 명소로 그 시작은 서기 1018년부터였다.
위 링크된 수도원 홈피의 소개글에 따르면 이 곳은 천년동안 하늘과 땅 사이를 연결해 온 아름다운 출입구(Da mille anni un varco di bellezza fra cielo e terra)라고 한다. 그리고 그 출입구는 천국의 문«questa è la Porta del Cielo»이라 불렀다. 어느날 제이콥(야곱)이라는 자가 땅 위에 놓인 계단을 꿈꿨는데 천사들이 하늘로 올라가자 그 꼭대기가 하늘(하나님의 집 앞)에 닿았다고 전한다. 믿거나 말거나..
아무튼 하니와 이른 아침에 처음 가 본 이 장소는 피렌체가 잘 조망될 뿐만 아니라 삐앗살레 미켈란젤로 광장 계단에서 바라보는 도시의 풍경과 조금은 색다른 풍경이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위대한 천재 예술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는 이곳에서 세상의 가치를 확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어린 미켈란젤로는 유년기 때부터 지옷또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와 마사쵸(Masaccio)의 작품들을 습작하며, 그림에 많은 관심을 쏟아 집안에서 자주 꾸중을 들었다고 전한다. 그의 아버지는 돈도 안 되는 예술가의 길 보다 편안하게 잘 먹고 잘 사는 은행가의 길을 걸었으면 싶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눈여겨본 메디치가(Medici)에서 그의 아버지를 설득하여 미술공부를 하게 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덕분에 13세 때부터 화가 도메니코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그리고 14세 때부터 메디치 가문의 보호를 받으며 베르트르드 디 조반니를 통해 도나텔로(Donatello) 작품을 배웠다는 것. 미켈란젤로의 생애는 워낙 유명하여 옥상옥이 되어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나는 한 천재 예술가의 유년기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만약에 말이다. 미켈란젤로의 아버지 로도뷔꼬 디 레오나르도 디 부오나로티 시모니(Lodovico di Buonarroti Simoni)가 우격다짐으로 예술가의 길을 말렸다면 오늘날의 피렌체는 얼마나 썰렁하고 싹막 했을까.. 실제로 그의 삼촌들은 '미켈란젤로를 흠씬 두둘겨 패고 혼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의 예술혼은 그 누구도 말리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그의 아버지와 삼촌들 모두 두 손 두 발 들게 만든 미켈란젤로.. 그는 아버지의 허락으로 13 때 당대 최고의 예술가 도메니꼬 길란다이오(Domenico Ghirlandaio) 제자로 들어갔지만 다시 문제가 생겼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인지 건방을 떨었던 지는 잘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보아 미켈란젤로의 능력이 출중해 1년 만에 스승 곁을 떠나게 됐다고 전한다. 시쳇말로 '쪽 팔린' 스승의 모양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회화보다 조각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하니의 예술혼은 늘그막에 폭발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이구동성으로 "피렌체에서 살고 싶다"라고 말한 건 여러분들의 희망사항과 닮았지만 속사정은 조금은 달랐다. 하니는 이곳에서 당신의 예술혼을 불태워줄 스승을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따라서 짬만 나면 피렌체 시내에서 관광객들을 상대로 케리커쳐를 그리는 화가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고, 갤러리를 찾아가 마음에 드는 작품을 앞에 두고 누가 그린 작품인지 알아보기도 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어느 날 피렌체의 재래시장 산타 암부로지오(Mercato di Sant’Ambrogio)를 다녀오는 길에 롯지아 델 뻬쇄(Loggia del Pesce)에서 운명의 예술가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가 요즘 나의 브런치에서 가끔씩 언급되고 있는 하니의 그림 선생님 루이지 라노떼(Luigi Lanotte)였다.
그는 부정기적으로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에서 피렌체까지 이동하여, 당신이 그린 그림을 팔거나 관광객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려주고 있었다. 그가 다닌 피렌체 예술학교에 대한 그리움들이 함께했다. 그는 유럽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이자 빛의 마술사로 불리는 램브란트(하르먼손 반 레인 렘브란트_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를 좋아했다.
하니는 첫눈에 그의 화풍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그림 수업이 가능한지 등에 대해 묻게 된 것이다. 그 날이 어느덧 3년의 세월이 훌쩍 흘렀다. 우리는 이때부터 바를레타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바를레타에 살고 있다. 이날 하니는 '천국의 문' 앞에 서서 피렌체 시내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나직이 내게 말했다.
"왠지 으스스해.. 무섭단말야. 돌아가..!!ㅜ"
La Memoria della Citta' di Michelangelo FIRENZE
il 15 Ottobre 2020, La Disfida di Barletta PUGLIA
Foto e Scritto di yookeun Chang_Geograf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