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내가 꿈꾸는 그곳 Oct 15. 2020

돌로미티의 속살

#27 기록, 돌로미티(Dolomiti) 19박 20일

돌로미티 산군의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건 신의 한 수가 있었다. 화룡점정..!!



셀 수 없이 수많은 생물들에게 이름을 부여할 때만 해도 생기지 않았던 일이, 어느 날 여자 사람으로부터 발현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원죄는 당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여전히 까마득히 잘 깨닫지 못한다. 당신의 갈빗뼈만 취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지, 마음까지 나눈 것은 생각지도 못하는 듣보잡 꼴통이었던 것이다. 
마무리 하자. 여자 사람을 향한 측은지심도 결국은 당신의 모습을 거울을 통해 보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것. 남자 사람과 여자 사람이 연합하는 즉시 두 사람 사이는 측은지심으로 꽁꽁 묶여 있는 것이다. 물론 나의 생각일 뿐이다. 돌로미티 노랑꽃양귀비가 우리를 따라나선 것도 측은지심으로부터 발현된 게 아닐까.. 그래서 빕비아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주문한다. 하니가 저만치 앞서 가고 있다. 본격적인 트래킹이 시작된 것이며, 우리 앞길에 난관에 부닥친 건 잠시 후부터였다.



지난 여정 여자 사람 왜 만들었을까 편에 이렇게 썼다. 산행은 물론 동반자로 동고동락을 한 사람의 모습을 잠시 뒤돌아 본 것이다. 만약 우리네 삶에 측은지심이 없었다면 우리는 날이면 날마다 별리를 거듭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한 침대를 공유하는 사람을 일러 무촌이라며 가깝게 여기는 한편, 무촌이기 때문에 아무런 관계로 관련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신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 당신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까지 모두 아울러 측은지심이라 했던가.. 



지난여름에 다녀온 돌로미티 여행기는 어느덧 스물일곱 번째를 맞이하고 있다. 최근 열어본 돌로미티의 날씨는 영하 8도씨까지 뚝 떨어진 한편 어떤 곳은 새하얀 눈이 1미터도 더 쌓여있는 풍경이 유튜브에 소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하니와 나의 여정은 19박 20일 중에 이제 겨우 사흘째 맞이하고 있으므로 이 여행기가 끝나려면 내년 이맘때까지 기다려야 할까.. 


이번 여정에는 우리가 발품을 팔고 있는 리푸지오  삐쉬아두(Rifugio Pisciadu) 트래킹 코스에서 만난 돌로미티 노랑꽃양귀비와 만년설처럼 남아있는 8월의 잔설에 대한 단상으로 엮어 가보고 싶다. 그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돌로미티의 속살




우리를 뒤따라 온 어느 청춘들은 트래킹 코스 저만치 앞서 걷는 가운데 하니의 발걸음은 점점 더 느려지고 있었다. 트래킹 코스는 어느새 등반코스로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지그재그 길이 점점 더 가팔라지고 좁아진 것이다. 따라서 나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걷던 하니는 점점 더 거리가 좁혀지고 있었다. 거리가 좁혀진 이유는 몇 안 된다. 가팔라진 오솔길과 그 곁으로 무리 지어 핀 노랑꽃양귀비가 "쉬었다 가라"며 자꾸만 손짓하고 있는 것. 


그리고 또 하나의 진풍경.. 지난겨울에 내린 새하얀 눈이 점점 더 색이 바래 누런 얼음덩어리로 남아있는 것이다. 돌로미티를 빛내는 아름다운 풍경은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아니라 지난겨울의 흔적과 풀꽃이 생명력을 더해주고 있었던 것. 돌로미티의 진정한 속살이랄까..



새하얀 눈이 미네랄을 품고 대략 6개월 정도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면, 노랑꽃양귀비의 생애는 더욱 짧았다. 관련 스트에 언급한 자료처럼 노랑꽃양귀비(Papavero alpino giallo (Papaver aurantiacum)_알삐노 노란 양귀비)의 생애는 해발 1800미터에서부터 대략 2천700미터에서 서식하며 꽃은 7~8에 피우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가 고도를 높인 곳은 해발 2천4~5백 미터는 될까. 



노랑꽃양귀비의 생태 한계선이 코 앞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트래킹은 8월 10일 전후였으므로 노랑꽃양귀비의 생애가 절정을 너머 다시 돌로미티 속으로 사라질 운명에 처한 시점이었다. 꽃송이는 한 뼘 정도 겨우 자랐는데 그동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가을 속으로 떠날 차비를 하고 있었던 것. 그리고 새하얀 눈을 덮고 새로운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신의 한 수란 이런 것. 세상 모든 생물 무생물을 포함하여 각자가 처한 사정에 따라 생명을 부여하고 있었다. 돌로미티 노랑꽃양귀비의 생애가 3개월에 머물고 있다면 우리는 최소한 80년 동안 이 세상에 머물다 본향으로 떠나게 되는 것이다. 또 지난해 내린 새하얀 눈은 주름진 피부처럼 미네랄을 머리에 이고 여름 한철을 빛내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 


너무도 뻔한 것 같지만 그들에 비해 세월을 보다 더 누리는 우리는 탈도 많고 이유도 많을 뿐만 아니라.. 무수히 헐뜯고 싸우고 지지고 볶고 지랄 엠병까지 더하다가 어느 날 철이 든다 싶으면 돌로미티의 흰 눈 같은 운명에 처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지.. 돌로미티 노랑꽃양비귀의 생태 한계선을 참조하면 지난해 내린 흰 눈과 노랑꽃양귀비는 공생 관계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피차 서로 다른 까칠한 성격을 가진 녀석들.. 한 녀석은 조금만 더워도 당신을 불사르고(?) 또 한 녀석은 조금만 더워도 꽃잎을 내놓지 않는 것. 그런 꺼칠한 녀석들이 살고 있는 나라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다. 



힘이 들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올려다본 하늘에 승강기가 쉼 없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우리도 곧 승강기가 오르내리는 로지에 도착할 수 있을까.. 이때부터 우리는 난관에 봉착했다. 우리 앞에 거대한 석벽이 가로놓인 것이다. 우리는 곧 다가오게 될 매우 위험한 일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남들 모두 사라진(?) 그곳으로 우리가 못 할 일이 어딨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위험을 덮어버린 풍경이 돌로미티의 속살이었다. 하니가 저만치 앞서 걷고 있는 트래킹 코스 옆으로 노랑꽃양귀비가 줄지어 따라다니는 가운데 지냔 겨울에 내린 눈이 만년설처럼 달라붙어 있는 곳. 하니는 힘게 걷던 걸음을 멈추고 당신을 지탱해 주던 두 작대기를 길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돌로미티의 속살을 향해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우리의 운명도 그러하겠지.. 



코 앞에 닥친 미래의 일을 전혀 모른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돌로미티 산군의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건 신의 한 수가 있었다. 화룡점정(畵龍點睛).. 그 앞에서 만사를 잊고 그저 앞만 보며 묵묵히 걸어 나가는 것. 그 길을 돌로미티 노랑꽃양귀비가 일거수일투족 모두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기록, 돌로미티(Dolomiti) 19박 20일은 계속된다.


Documento di 19 notti nelle Dolomiti_dall'8 al 28 Agosto
il 15 Ottobre 2020, Citta' di Barletta PUGLIA
Foto e Scritto di Y.K CHANG_GEOGRAFIA




매거진의 이전글 여자 사람 왜 만들었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