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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그곳 Oct 19. 2020

제 발로 빠져든 깊은 수렁

#28 기록, 돌로미티(Dolomiti) 19박 20일


무식해야 갈 수 있는 길도 있다!! 

  

      오늘은 모처럼 한가해진 날이다. 노는 게 일인 아이들처럼 잘 노는 게 소원인 우리.. 아니 내게 한가한 날이 도래한 것이다. 빌어먹을 비루스 때문에 생겨난 이상한 일. 하니에게 감기 기운이 있어서 그림 수업이 무기한 연기된 것이다. 하니의 그림 선생님에게 이 사실을 즉각 통보했다. 빌어먹을 비루스 때문에 생긴 일이자 비루스 덕분에 한가해진 날이기도 하다. 


적어도 이틀 전까지 이런 일이 생길 줄 꿈에도 몰랐지만, 오늘 아침(현지시간)에 내린 우리의 결정이다. 일단 바깥출입을 삼가야 했다. 조금은 아쉬운 일이지만 가끔씩 이런 일도 있다. 하니의 체질 특성이 그러하다. 그런데 이런 일은 우리가 내린 결정이지만, 어떤 일은 우리가 전혀 모르는 사이에 결정되곤 했다. 우리의 의지와 의사와 관계없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아니.. 의지와 의사는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무식이 만든 용감한 병(病)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지난여름에 다녀온 19박 20일 동안의 돌로미티 여행 중에 발생한 초행길의 트래킹이, 이른바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똑같았다.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길의 정체에 대해 까막눈이었으며 제 발로 수렁으로 걸어 든 것이다. 



얼마나 무식했느냐 하면 목숨을 건 것과 별로 다를 바 없었다니..ㅜ 그게 곧 우리 앞에 닥칠 운명이었다. 그런데 더 희한한 일이 생겼다. 무식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통과할 수 없는 난관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우리가 너무 유식하거나 똑똑한 나머지 우리 앞길을 또렷이 분별했다면.. 우리는 그 길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 누가 천하보다 더 귀한 목숨을 트래킹에 걸겠는가 하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무식하거나 무지했으므로 통과한 길 앞에 우리가 전혀 상상 조차 하지 못했던 신세계라는 놀라운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걸 반전의 묘미라고 했던가.. 비루스 덕분에 한가해진 날에 끼적거리는 돌로미티 여행기는 잘 모르거나 무식해야 가는 길에 대한 단상으로 시작했다. 



제 발로 빠져든 깊은 수렁




하니가 저만치 앞서 간 발자국 뒤로 돌로미티 노랑꽃양귀비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나는 이들에게 돌로미티의 심장과 다름없는 수식어를 부여했다. 돌로미티의 마음이자 돌로미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풀꽃이었다. 성격이 생각보다 까칠한 풀꽃들은 적당한 고도와 온도를 필요로 했다. 아무 곳에서나 꽃을 피우는 종자가 아니었다. 그들이 사는 곳에는 아직 지난겨울에 내린 눈이 만년설로 남아 여행자를 반기고 있는 것이다. 




하니는 정상으로 행하는 길을 걷다 말고 산길에 멈추어 서서 돌로미티의 미네랄을 뒤집어쓴 만년설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리푸지오  삐쉬아두(Rifugio Pisciadu) 트래킹 코스가 정점에 이르는 곳도 모른 채 잠시 숨을 돌릴 겸 돌로미티의 비경에 빠져드는 것이다. 길은 점점 더 가팔랐고 숨이 턱에 찾다. 그저 앞만 보고 걸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니 우리가 지나온 길이 어느새 사라진 것이다. 



우리는 삐쉬아두 트래킹 길 깊숙한 곳에 발을 들여다 놓은 것이며, 돌로미티 노랑꽃양귀비의 환영을 받으며 걷는 동안 우리의 좌표를 잠시 까먹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좌표를 안다고 했을 망정 장차 우리 앞에 어떤 난관이 기다릴 것이라는 건 까마득히 모르는 상태였다. 그저 앞서간 트래킹족을 뒤따라 열심히 걸을 뿐이었다. 



그동안 관련 브런치를 열독해 오신 분들은 (순서대로) 촬영된 사진을 기억해 내실 것이다. 현재 위치에서 빠쏘 가르데나(Passo Gardena)를 내려다보면 용틀임하는 것 같은 꼬불꼬불한 길을 만났을 것이다. 이제 그 길은 거대한 석벽 사이로 사라지고 저만치서 우리를 조용히 굽어보고 있는 뿌에즈 오들레(Parco Naturale Puez Odle) 국립공원의 일부가 나타난 것이다. 



고도를 조금씩 높이자 돌로미티의 만년설이 응달에서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 하니는 이곳을 지나치며 들고 있던 두 개의 작대기를 내려놓고 카메라에 담았던 것이다. 하니는 만년설 위로 수평으로 지나쳤지만 나는 적당히 습기를 머금은 만년설 위로 수직으로 한 걸음씩 옮기며 돌로미티의 속살을 탐했다. 8월 어느 날(10일경)의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써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우리는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밟은 이 길이 수렁인지 꿈에도 몰랐다. 만년설은 수렁으로 이어지는 관문이었던지.. 하니가 지나쳤던 길을 따라 걷는 즉시 트래킹 길은 등산길로 변했으며, 초보 암벽등반가의 자세를 단박에 요구하고 나섰다. 돌로미티 꽃양귀비들도 어느덧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작은 돌무더기 속으로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길은 점점 더 가팔라졌다. 



하니가 앞서 걷고 있는 자료사진 좌측으로 보이는 절벽이 잠시 후 우리가 올라야 하는 장애물이라는 것을 알리가 없는 두 사람.. 하니는 비틀거리는 듯한 자세로 한 걸 한 걸음씩 정상으로 향했다. 뒤를 돌아보니 한 무리의 트래킹족이 어느덧 우리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그들은 조금 전에 우리가 걸었던 길을 뒤따라 오고 있고, 이들 곁으로 노랑꽃양귀비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돌로미티 노랑꽃양귀비의 생태 한계선이 거의 다다란 것이며, 하니와 나 또한 점점 힘에 부치는 트래킹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돌로미티의 만년설은 고도에 비례하여 한여름에도 녹지 않고 첫눈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이들은 머지않은 시간에 만년설을 건너 우리를 추월했다. 그리고 이들의 뒤꽁무니를 쫓아가고 있는 것. 



우리는 잠시 후 차마 되물릴 수 없는 기로에 서서 우리가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보고 있었다. 트래킹을 여기서 멈추어야 하나 아니면 계속 이어져가야 하나.. 하는 중대 갈림길에서 우리가 쓸 히든카드는 없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힘겨운 트래킹이 포기를 하지 못하게 귓속말로 자꾸만 재촉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상을 코 앞에 두고 차마 물러서지 못하고 우리는 점점 더 수렁 깊숙이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보다 더 용감했던 일은 잠시 후에 일어났다. 거의 수직에 달하는 암벽이 우리 앞에 등장한 것이다. 우리가 갖춘 건 등산용 장비라고 말할 것도 없다. 하니는 두 개의 나무 작대기.. 나는 한 개의 나무 작대기가 전부였다. 누가 이럴 줄 알았나..ㅜ 기록, 돌로미티(Dolomiti) 19박 20일은 계속된다.


*영상은 지난 10월 11과 12일 사이 우리가 다녀온 돌로미티의 봘 바디아에 눈이 소복이 쌓인 모습을 드론으로 촬영한 아름다운 풍경이다. 돌로미티는 이미 겨울이 도래한 것 같다. 라 빌라와 봘 바디아는 완전히 하얗게 변했다. Dolomiti, la neve d'ottobre imbianca la Val Badia: le immagini dal droneSulle Dolomiti sembra già arrivato l'inverno. Nella notte tra domenica 11 e lunedì 12 ottobre la neve si è spinta anche a quote basse per il periodo, con fiocchi ad appena 1.000-1.200 metri. Le immagini dal drone mostrano La Villa, in Val Badia, completamente imbiancata. Video da La Repubblica


Documento di 19 notti nelle Dolomiti_dall'8 al 28 Agosto
il 19 Ottobre 2020, Citta' di Barletta PUGLIA
Foto e Scritto di Y.K CHANG_GEOGRAF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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