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에 가시 거덜랑 그를 기억해주오
권력과 사랑의 닮은 점이랄까..!
르네상스의 고도 피렌체의 요즘 날씨는 한여름을 방불케 한다. 글을 끼적거리는 저녁나절 현재 수은주는 섭씨 33도씨를 가리키고 있다. 어제저녁 시내 산책을 할 때도 날씨는 여전히 후끈거렸다. 사람들의 옷차림만 봐도 얼마나 따끈한(?) 날씨인지 단박에 알아차릴 정도. 특히 여성들의 옷차림은 반라.. 그 자체다. 그야말로 가릴 곳만 가린 젊은 여성들이 적지 않다. 어제 저녁 내 발길은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조금은 멀어진 듯한 수도사이자 설교가인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_사보나롤라라 한다)의 죽음을 기념하는 기념판(동판)이 있는 곳. 사보나롤라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500년 전(1498년 5월 23일) 빨라쪼 베끼오 앞 시뇨리아 광장에서 끔찍한 화형에 처해졌는데 나는 그의 죄명이 너무 억울하다고 생각한 1인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과 사랑의 속성은 눈을 멀게 하여 이성을 잃게 만든다고나 할까. 어제저녁 그가 처형된 장소로 발길을 옮긴 것이다.
피렌체에 둥지를 튼 이후 입버릇처럼 말하는 게 있다. 피렌체는 시도 때도 없이 주야장천 관광객들로 넘치는 곳이다. 나는 이들 관광객들도 나처럼 피렌체가 좋아서 찾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무슨 이유 때문에 찾는지 잘 모른다. 나의 경우를 대입하면 이야기보따리가 천지 빼까리여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의 이런 생각은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다. 대체로 피렌체를 찾는 관광객들은 피렌체에 오래 머물지 않는 것. 조금은 부풀리면 1년은 싸돌아 다녀야 겨우 피렌체의 맛과 멋을 느낀다고나 할까.
피렌체는 그야말로 어느 곳이든 툭 치면 이야기보따리가 와르르 쏟아지는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정이 이러함으로 관광객들은 주어진 혹은 짜인 일정에 따라 부지런히 발품을 팔다 보니 웬만한 볼거리는 예사로 지나치게 되는 것. 사보나롤라가 화형에 처한 장소도 같은 이유로 사람들로부터 외면받는 장소였다.
하필이면 사보나롤라가 처형된 장소 주변으로 그 유명한 우피치 미술관과 (비록 복제품이긴 하지만)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은 물론 메두사의 머리를 들고 있는 뻬르세오(Perseo con la testa di Medusa) 동상 등이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고 있는 것. 사람들은 발아래 놓인 기념판 따위는 거들떠볼 여유도 없다. 마치 사보나롤라의 운명을 닮은 것 같은 상황이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는 것. 사람들은 한 때 그를 흠모했지만 어느 날부터 등을 돌리고만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그가 처형된 장소에 그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 동판을 만들어 둔 것이다.
사보나롤라의 생애를 기록한 위키백과는 이렇게 적고 있었다.
사보나롤라는 페라라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1475년에 도미니쿠스 수도회에 들어가기 전에 인문주의, 철학, 의학을 공부했다. 1482년에 피렌체 산마르코 수도회에 파견되어 높은 학식과 금욕 생활로 명성을 얻었고, 그 뒤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공화주의 사상과 정치적 자유주의를 기조로 한 설교를 했다. 1490년에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 당시 지배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를 공격하고, 교회와 속세의 타락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의 설교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는지, 피렌체의 포르노그라피가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그의 생애를 통해 드러난 사실은 피렌체 공화국의 우두머리인 로렌쪼 데 메디치(Lorenzo di Piero de' Medici)를 공격한 것과 함께 교회와 속세의 타락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 당시의 피렌체는 소돔과 고모라 같은 도시였을까. 그의 설교 때문에 피렌체에 성행하던 포르노그라피(La pornografia)가 모두 불살라졌다고 한다. 그의 정치적 역량이 최고조에 달한 모습이 쉽게 눈에 띈다. 이 같은 그의 영향력은 허영의 화형식에서 볼 수 있다.
허영의 화형식은 1497년 2월 7일, 사육제(가톨릭교 국가에서 사순재(四旬齋) 직전의 3일 또는 7일간 행해지는 축제)의 마지막 날, 시뇨리아 광장에 높이 18m, 둘레 72m의 거대한 사치품의 산이 쌓였는데, 피라미드 형태로 쌓아 올린 세속적인 책, 음란물, 유행 가발과 유치한 가면 등을 태우는 행사가 그것. 사치품의 산을 도는 동안 사람들은 찬양을 하고 종을 치며 불을 지폈다고 전한다. 이러한 행위를 돌아볼 때 당시 메디치가는 물론 교회와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부도덕 일색이었다고나 할까.
사보나롤라의 등장으로 위기에 몰린 권력은 두 군데, 로마 주교와 메디치가였다. 주교는 주교대로 메디치가는 메디치 가대로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적당히 거래를 하는 동안, 메디치가의 상술에 놀아난 교회는 설 자리를 잃어버렸고, 그 틈바구니의 사람들은 사치와 오락 등 타락의 도가니에 빠져든 것. 그리고 사보나롤라의 정치개혁이 불을 뿜을 때쯤 주교와 메디치가의 반격이 사보나롤라를 옥죄어 왔다. 이에 대해 한 기독교 칼럼은 이렇게 썼다.
사보나롤라가 이끌던 산마르코 수도원과 경쟁관계에 있던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의 한 설교가가 사보나롤라에 대한 공개 도전장을 던졌다.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예언가인지 ‘불의 심판’을 통해 겨뤄보자는 것이었다. 장작더미에 불을 붙여 길을 만들고 그곳을 걸어서 무사히 통과하는 사람이 진짜 하나님의 예언자라는 것이 ‘불의 심판’의 내용이었다.
1498년 4월 7일, ‘불의 심판’이 열린 날. 시뇨리아 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 가운데 30미터의 장작더미로 이뤄진 ‘불의 길’이 마련됐다. 사보나롤라의 산마르코 수도원을 대표하는 수도사와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대표하는 수도사가 불의 제단 앞에 나섰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졌고,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사보나롤라 측 수도사들이 “하나님이 불의 심판을 원하지 않으신다”라고 외쳐댔다.
이 말을 들은 피렌체 시민들은 사보나롤라를 향해 “예언자가 아니라 사기꾼”이라며 비난을 쏟아냈고, 그를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사보나롤라는 결국 감옥에 갇히게 되고 1498년 5월 23일 화형을 당해 죽게 된다.
신앙의 본질은 믿음일 텐데, 사람들의 믿음은 권력이나 눈속임을 더 사랑한 게 아닐까. 화형장으로 향하는 사보나롤라는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의 신념 속에는 오로지 한 분 밖에 없었다고 한다. 만약 그게 없다면 오늘날 교회는 물론 신앙심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것. 그는 죽음보다 더 두려웠던게 당신의 양심이 아니었을까.
사보나롤라는 페라라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1475년에 도미니쿠스 수도회에 들어가기 전에 인문주의, 철학, 의학을 공부했다. 1482년에 피렌체 산마르코 수도회에 파견되어 높은 학식과 금욕 생활로 명성을 얻은 바 있다. 그런 그에게 주교와 세상의 권력이 다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가 화형장으로 떠날 때 그의 귓전에 메아리치는 음성은 이랬을 것이다.
“(말 안 듣고 뺀질거리는)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우리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 네 마음과 네 목숨과 네 뜻과 네 힘을 다해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권력에 눈이 멀고 돈에 눈이 멀면 시쳇말로 '눈에 뵈는 게 없는 법'이다. 거기에 사랑까지 눈이 멀면 세상의 가치는 전혀 달라지는 것.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 과정에서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간구하는 동안 "단 한 사람의 의인만 있어도 멸하지 않겠다"는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사보나롤라는 비록 세력이 없어서 다 썩어 자빠진 사회를 개혁하는데 실패하며 이단자로 낙인찍혔지만, 그가 화형에 처해진 후로부터 주교와 메디치가의 권력은 서서히 바닥을 헤매게 된다.
그로부터 대략 500년 후 피렌체를 찾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예술가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것. 사보나롤라의 가슴속에 용솟음친 양심의 소리가 피렌체에 가득했더라면 르네상스는 얼마나 더 찬란하게 다가왔을까. 혹시라도 피렌체를 방문 하시 거덜랑 시뇨리아 광장 한편 넵춘 분수대(La Fontana del Nettuno) 앞에 위치한 사보나롤라의 흔적을 꼭 찾아보시기 바란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좌표를 그로부터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Girolamo Savonarola_un eretico a Firenze
piazza della signoria FIRENZE
Foto di yookeun Chang_Geografia
Girolamo Savonarola: un eretico a Firenze
Firenze è un luogo pieno di storia e di storie, e certe volte, senza neanche accorgercene, ci ritroviamo a camminare proprio sopra di esse. Questo potrebbe esservi accaduto in Piazza della Signoria, dove una grande targa di marmo posta sul pavimento della piazza, proprio di fronte alla fontana di Nettuno, ci ricorda una storia accaduta secoli fa, la quale non ebbe certamente un bel lieto fine. Una storia su un frate di nome Girolamo Savonarola.
Savonarola nacque a Ferrara nel 1451, interruppe gli studi di medicina per dedicarsi alla teologia e nel 1482 fu mandato nel convento fiorentino di San Marco, e incaricato di predicare dai pulpiti delle chiese fiorentine.
All'inizio non fu molto apprezzato, per il suo accento romagnolo e per le sue prediche, estremamente rigide nei confronti della chiesa e della città fin da subito, quando predisse l'arrivo di un flagello causato dai peccati degli uomini e dai cattivi pastori della Chiesa.
Predicò anche davanti a Palazzo Vecchio, affermando che tutto il bene e il male di una città provenivano dai suoi leader, i quali erano corrotti, sfruttavano i poveri e imponevano loro pesanti tasse. Una predica che fu subito apprezzata dai poveri e dagli avversari della famiglia Medici.
Lorenzo il Magnifico lo ammonì più volte di non tenere sermoni del genere, ma il frate domenicano non lo ascoltò mai, anzi, in un altro sermone preannunciò la sua fine: "io sono forestiero e lui cittadino e il primo della città; io ho a stare e lui se n'ha a andare".
Savonarola non solo si ribellò contro il padrone di Firenze, ma anche contro il papa Alessandro VI, che aveva cercato di impedirgli di predicare, ma era stato costretto a revocare tutte le misure emesse contro il frate a causa delle pressioni ricevute dai fiorentini che erano stati stregato dai suoi sermoni.
Predica dopo la predica, Savonarola divenne politicamente influente, e durante la Repubblica stabilita nel 1494, a seguito della temporanea espulsione dei Medici dalla città, fece chiudere le taverne e cacciare le prostitute da Firenze.
Nel 1497 Savonarola organizzò un falò delle vanità, in cui furono bruciati oggetti d'arte, dipinti dal contenuto pagano, abiti lussuosi e gioielli.
Aveva creato una nuova democrazia, libera dalla corruzione dei potenti ma dove regnava un altro tipo di dittatore.
Presto arrivò la scomunica del Papa, che risultò poi essere un falso forgiato solo per distruggere il frate; ma nonostante tutto Savonarola continuò la sua campagna contro i peccati della Chiesa.
Dapprima la Repubblica fiorentina lo appoggiò, ma poi, per paura di un'interdizione papale, gli tolse il sostegno ed il partito restaurato dei Medici lo fece arrestare e processare per eresia nel 1498.
Il frate non aveva intenzione di arrendersi e si barricò nel convento di San Marco.
Un combattimento infuriò per tutta la notte, fino a quando Savonarola fu catturato e condotto alla Torre di Arnolfo a Palazzo Vecchio, dove subì interrogatori e torture: la tortura della fune, quella del fuoco sotto i suoi piedi e poi fu posto per un'intera giornata sul cavalletto, che gli causò dislocazioni in tutto il corpo.
Il 23 maggio 1498 fu mandato al patibolo, che si ergeva in Piazza della Signoria ad un’altezza di cinque metri, su una catasta di legna. Lì Savonarola fu impiccato e bruciato sul rogo insieme ad altri due frati.
Le ceneri furono portate via e gettate in Arno da Ponte Vecchio, anche se alcuni dei seguaci di Savonarola cercarono di rubarne un po': alcune nobildonne vestite da serve, andarono in piazza con dei vasi per raccogliere le ceneri, dicendo che volevano usarle per il bucato.
Durante la notte qualcuno decise di rendere omaggio alla memoria del predicatore, coprendo di fiori il luogo in cui l'esecuzione si era svolta, dando inizio alla tradizione della Fiorita: nel punto esatto in cui è stato bruciato Savonarola, vengono sparsi petali di rosa e durante una cerimonia che Inizia con una messa nella Cappella dei Priori di Palazzo Vecchio e termina con una parata verso Ponte Vecchio, i petali di rosa vengono poi gettati nel fiume Arno.
Dopo secoli una targa in marmo ci ricorda ancora quel giorno che vide la fine di Girolamo Savonarola, un personaggio discusso, è vero, ma anche un uomo che non aveva paura di predicare "cose nuove" e denunciare la corruzione di coloro che stavano al potere, anche quando significava denunciare la Chiesa stessa.
UNA «FIORITA» PER RICORDARE SAVONAROLA
실패한 정치가인가 종교개혁의 선구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