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돌로미티, 9월에 만난 첫눈
우리네 삶의 현재 위치는 어디쯤일까..?!!
작가노트
서기 2020년 12월 25일 성탄 절.. 이른 아침에 눈을 뜨면서 열어본 사진첩 속에 빨갛고 앙증맞은 열매가 보인다. 돌로미티 빠쏘 지아우(Passo Giau)에서 만난 귀한 풍경들. 첫눈을 가슴에 두르고 어디로 가시려나.. 기적 같은 풍경이 카메라에 잡혔다. 아니 기적이다. 그 깊은 산중에 태어난 것도 기적이지만 빨간 열매를 맺은 것은 더더욱 기적이다. 손가락 한 마디도 채 안 되는 작은 이파리로 건져 올린 열매들.. 우리네 삶도 그러하지 않을까.. 한 성자가 다녀가신 지 어느덧 2020년.. 이른 아침에 눈 뜨자마자 기적의 하루가 시작된다.
지난 여정 기적의 열매 편에 이렇게 썼다. 내가 좋아한 한 성자를 생각하며 돌로미티 빠쏘 지아우 고갯마루 능선에서 만난 아름다운 풍경을 돌아본 것이다. 붉은 열매만 만나면 값 없이 내려놓은 당신의 희생을 생각하는 것이다. 세월 참 빠르다. 사흘의 시간이 광속으로 지나갔다. 다시 사흘이면 해가 바뀐다.
돌로미티의 빠쏘 지아우 고갯마루에 펼쳐진 능선 위로 하니가 저만치 앞서 걷고 있다. 하니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은 포르첼라 지아우(Forcella Giau, 해발 2360미터)라는 곳이다. 그곳은 지난여름 19박 20일 여정의 돌로미티 여행을 끝마칠 때쯤 만난 비경이 위치한 곳이다.
이정표에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는 자료사진을 참고하면 나의 등 뒤로 빠쏘 지아우 고갯마루의 풍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때까지만 해도 무작정 길을 나섰다.
빠쏘 지아우 고갯마루 앞의 능선에서 바라본 좁은 길과 능선 너머가 궁금하여 길을 나섰다가 천신만고 끝에 포르첼라 지아우를 만나게 되었다. 실로 감개무량했다.
사람들은 돌로미티를 떠올릴 때 뜨레 치메 디 라바레도(Tre cime di lavaredo)를 먼저 떠올린다.
그곳은 천하의 절경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이 돌로미티를 떠날 때 맨 먼저 둘러보는 곳이기도 하다.
거대한 세 개의 봉우리가 우뚝 서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메두사(Medusa)를 만난 듯 시선이 멈추며 감탄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곳.. 출발선의 로지에서부터 올려다 보이는 봉우리는 카메라에 담을 수 없을 정도이다. 얼마나 웅장하고 장엄함이 느껴지는지 봉우리를 바라보며 한 바퀴 도는 동안 주로 봉우리만 바라보게 된다.
그다음 실로 엄청난 풍광 속의 당신은 보잘것없는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돌로미티 산군 중에서도 가장 남성다운 위용을 뽐내는 것이다. 그런 반면 우리가 다녀온 포르첼라 지아우는 뛰어난 미모를 가진 지혜로운 여신을 숨겨놓은 듯하다. 하니가 뒷모습을 보인채 시선을 향한 곳은 그곳이며, 저 멀리 거대한 바위산 아래 능선 뒤로 숨겨져 있는 것이다.
첫눈이 소리 없이 찾아오신 이날, 빠쏘 지아우 고갯마루 능선에서 우리는 수개월 전의 추억을 소환하며 능선길을 따라 걷고 있는 것이다. 그땐 여름(8월 중순)이었으며 우리가 첫눈을 쫓아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9월 말경이었다.
서기 2020년 12월 28일 저녁(현지시각), 사진첩을 열어 당시를 회상해 보니 꿈만 같다. 불과 100일 전의 일이 까마득히 오래 전의 추억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두고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을까.. 우리가 잠시 즐겼던 풍경은 물론 누군가 부재중일 때 그런 생각이 드는 것 같다.
그녀가 저만치 앞서 걸을 때 나는 하얀 눈에 덮인 과거의 흔적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그들은 어디로 떠나시는지 매무새를 고치고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그들은 조금 전에 내린 첫눈을 하얀 비단결로 두르고 있었다.
또 한쪽에서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화장을 고치고 꽃단장을 하고 있는 모습들..
이들의 모습은 태곳적을 닮아있었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풍경들..
이런 풍경들은 나의 유년기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의 자아를 튼튼하게 만들어준 원동력이었다.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습관이 운명처럼 찾아온 시절이 유년기였다. 어릴 적 집에서 멀지 않은 산골짜기를 찾아가 만난 풍경들이 오롯이 빠쏘 지아우 고갯마루 능선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그로부터 까마득히 먼 시간을 달려왔지만 전혀 변하지 않은 것은 당시 내 가슴에 안긴 아름다운 세상의 풍경이었다. 골짜기 바위틈바구니를 졸졸 흐르던 옥수와 이미 말라버린 이끼는 물론 바위솔 등 어린 식물들은 기적처럼 다가왔다. 천천히 뜯어보면 볼수록 오묘한 조화에 놀라 어린 녀석 답지 않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시간이 이대로 멈추었으면 좋겠다..!!
시간을 지내놓고 보니 그때 이미 시간은 내 가슴속에서 멈추어버렸던 것이다. 첫눈에 덮인 풀꽃들도 그런 생각을 했을까.. 첫눈이 내린 세상을 두리번거리는 앙증맞은 꽃 한 송이가 얼굴을 빼꼼히 내밀었다.
-안농, 아가야..!! ^^
-(방가방가 ^^)안넝하세요. 삼촌 ㅋ
다시 첫눈이 오시면 이곳으로 가 볼 수 있을까.. 다시 그런 기회가 찾아들까.. 내일은 오늘의 연장선에 불과하지. 사흘 후면 해가 바뀌는 것도 알고 보면 달력이 바뀔 뿐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늘 열심히 준비하면 내일이란 선물이 주어지는 법. 사진첩을 열어놓고 다시 첫눈을 기다린다. 평생 꿈꾸어왔던 신세계는 그렇게 다가왔다.
In attesa della prima neve che cade di nuovo_Passo Giau
il 28 Dicembre 2020, La Disfida di Barletta PUGLIA
Foto e Scritto di YOOKEUN CHANG_GEOGRAF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