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기록, 돌로미티(Dolomiti) 19박 20일
씩씩한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저만치 퐐싸레고 고갯마루의 휴게소가 보인다. 이곳의 해발 고도는 2,105m에 이른다. 주변은 풍광이 매우 뛰어난 곳이며 사람들이 하루 종일 붐비는 곳이었다. 초행길의 우리는 이곳이 명소인지 잘 몰랐다. 돌로미티 여행을 하는 동안 나중에 다시 찾게 된 곳이며, 곳곳에 에델바이스(Edelweiss_Leontopodium) 군락지가 있었다.
지난 여정 생쥐가 친근한 사람들 편 서두에 이렇게 썼다. 휴게소에서 만난 재밌는 풍경이 눈길을 끌었다. 초행길의 돌로미티 여행, 이날이 닷새째 되던 날이었다. 우리가 빠쏘 가르데나에서 지내는 동안 다음 여정은 뜨레 치메 디 라바레도로 정해 놓았기 때문에 머릿속에는 온통 그곳의 풍경들이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어느 고갯마루 휴게소에 들렀으므로 이곳에 명소가 지천에 널렸다는 걸 알 수가 없었다. 순전히 나의 기준으로 내 맘대로 그려놓은 여정에 따라 이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시행착오를 몇 번 겪고 난 다음에 다시 이곳을 찾게 되었다. 돌로미티의 명소가 이곳 고갯마루를 중심으로 넓게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표지 사진 아래에 있는 사진은 고갯마루 근처에 있는 리스또란떼이며 이곳은 바로 옆에 위치한 작은 호수가 있는 풍경이다. 지금은 안 봐도 비디오일 정도로 훤해진 곳이다. 사람들이 다닌 흔적이 묻어난 여러 오솔길을 따라 가면 저만치 절벽 아래로 에델바이스 군락지가 있었다. 그곳은 인적이 드문 곳으로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곳. 에델바이스는 그곳에 자생하고 있었다.
한 노인이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는 풍경.. 마치 나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이분들은 바로 곁에 캠핑카를 주차해 두고 이곳에서 시간을 바캉스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8월 중에는 돌로미티 전체가 쉼터로 변할 만큼 캠핑카가 줄을 잇고 있는 곳이었다. 도시로부터 멀어진 곳에 가능하면 어떤 간섭 조차 받지 않고 자연 속에서 힐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저만치 보이는 뾰족한 거대한 바위 봉우리도 친퀘 또르리(Cinque Torri)라는 다섯 개의 탑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곳이었다. 그 곁에 있는 바위 덩어리(?)도 트래킹 코스로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길 가장자리에 돌 벽돌로 지은 건축물은 1차 세계대전 당시 돌로미티에서 벌어진 전투의 기념관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오늘날 이탈리아에 속한 돌로미티의 한 고갯마루 주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의 치열했던 전쟁의 상흔이 근처에 빼곡히 널려있었다. 이탈리아군 참호와 진지는 물론 지하벙커와 동굴이 널린 곳에 여행자들이 발을 딛고 있는 것이다.
기다랗게 휘어진 길을 따라가면 곳곳에서 진지와 참호가 발견되고 당시 전쟁의 상흔이 묻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갯마루에 도착해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당시에는 그 같은 상황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또한 지내놓고 보니 알게 된 돌로미티의 매력 중에 하나였다.
이런 생각은 그저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란 듯 여행기를 준비하고 있는 동안 한국에 가 있는 하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통화가 시작되면 그녀의 보고(?)가 이어진다. 하루 종일 어떻게 지냈는지 등에 대해 마라톤 중계하듯 이어지는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맞장구를 쳐가며 이야기 전부를 들어준다. 그래야만 한다.
-응, 내 말만 먼저 들어봐..! ^^
-응, 알써..말해봐욤!
이틀 전 보일러가 고장이 났었고 사람을 불러 고쳤으며 비용이 얼마나 들었는데 생각보다 돈을 많이 달라고 해서 속상한 일까지 세세한 보고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응, 보일러가 지금은 잘 돌아가..?
-응, 잘 돌아가. 잠깐 기다려봐.. 음악 들리지..? ^^
-응, 소리가 별로 안 좋네..ㅜ
-전화기를 (진공관) 앰프 스피커에 갖다 댄 거야. ^^
-그런데.. 갑자기 웬 음악..? ㅜ
그녀는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 작품번호 20a-1번 모데라토(Tchaikovsky-The Swan Lake Suite Op.20a - I. Scene. Moderato)를 듣고 있었다. 클래식 음악만 20년 넘게 들어왔던 그녀는 이 분야에 관한 한 내로라할 정도이다. 웬만한 음악들은 듣는 순간부터 곡명을 알아차린다. 그런 그녀가 요즘은 트롯과 번갈아 듣는다니 인생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녀가 들려준 음악에 무슨 사연이 깃든 것일까..
-응, 갑자기 웬 음악..?ㅜ
-있잖아, 드러누워서 음악을 듣고 있는데 마구 눈물이 나는 거 있지..ㅜ
-그게 어제오늘 이야기야..? ㅋ
-내 말 들어보라니까..ㅜ
-응..!
-이 곡을 듣고 있으니까 루체른 호숫가가 생각나면서 눈물이 나는 거야.
그녀는 지난해 10월 23일부터 이어진 3박 4일간의 여행 중 스위스 루체른 호숫가에 들른 날을 회상하고 있었다. 당시 코로나 19를 피해 긴급히 내린 결정이며 도피여행이자 그녀가 한국에 가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한국 날씨는 엄청 추운데 하루빨리 코로나가 끝나고 이탈리아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일까.. 당시 나는 관련 브런치 차창에 비친 스위스의 어느 호숫가 편에 나의 심정을 이렇게 썼다.
호수 위에는 오리들과 고니들이 비를 맞으며 느리게 유영하고 있었다. 불과 이틀 만에 나는 혼자가 되어있었다. 당분간은 혼자 살아가야 했다. 누군가 함께 비에 젖은 만추를 바라본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자 축복받은 게 틀림없어 보였다. 나는 다시 자동차로 돌아왔다. 시동을 걸어두고 의자를 뒤로 젖혔다. 차 앞 유리에는 빗방울이 맺혀 전방을 주시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눈을 감고 차콕에 들어갔다.
차창 밖은 여전히 빗소리가 추적거렸다. 아무도 모르는 공간.. 누군가 먼 길을 떠날 순간을 맞이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우울이 극도로 치민 상태의 심정이 어느 호숫가에서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하니를 생각하고 있었다. 프랑크 프루트 공항에서 손을 흔들며 저만치 멀어져 간 그녀 때문에 비에 젖은 들판 어느 호숫가에서 별리의 슬픔에 젖어있는 것이다. 생전 이런 느낌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당시를 회상해보니 오늘 그녀가 찌질댄 이유를 단박에 알 것 같았다. 프랑크 프루트 공항의 출국장을 향해 떠나기 전 어깨를 들썩이던 그 심정.. 루체른 호수는 물론 당신이 그토록 좋아했던 돌로미티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다시 가면 되지 뭐.. 건강이나 잘 챙기세욤. 뚝!
-알써, 밥 맛있게 먹어요. ^^
음악을 들으며 힐링을 경험하는 동시에 잠자코 있던 우울모드를 뒤집어 놓은 것이랄까.. 나는 아점을 먹는 중이라며 통화를 맺었다. 환희와 별리의 현장.. 오늘따라 돌로미티와 루체른 호수가 더 그립다. 기록, 돌로미티(Dolomiti) 19박 20일은 계속 이어진다.
Documento di 19 notti nelle Dolomiti_PASSO FALZAREGO
Scritto_il 11 Gennaio 2021, La Disfida di Barletta PUGLIA
Foto e Scritto di YOOKEUN CHANG_GEOGRAF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