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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그곳 Feb 01. 2021

가슴에서 지울 수 없는 사람

-어느 날 수원 화성에서 형과 나의 망중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형의 별세 소식은 한국에 있는 아우님의 페이스북으로부터 전해져 왔다. 내용은 이랬다.

형이 죽었다. 그답게 살다 그답게 갔다. 2008년 속초에서 처음 만났다. 여름날이었다. 첫 만남에서 의형제를 맺고, 단풍 붉던 가을날 구룡령을 함께 넘었다. 그 후 10여 년 남짓 여주, 남원, 전주, 수원 등 각지를 떠돌며 우린 미친 듯이 만났다. 23년의 나이 차이는 무의미했다.

지난해 여름 쓰러졌다고 했다. 믿지 않았다. 9월 말쯤으로 기억된다. 수원의 한 병원에서 누워 있는 형을 봤다. 그는 이미 내가 아는 형이 아니었다. 그래도 다시 돌아올 줄 알았다. 굳게 믿었다. 그리고... 어제 문자 한 통, 이어서 온 전화, “형이 갔어...” 여주에 사는 둘째 의형의 목소리였다. 

하주성, 온누리. 그는 방송인이었고, 문화예술인이었고, 블로거였다. 지독히도 우리 문화를 사랑했다. 돈도 안 되는 전통예술 신문을 창간했고, 경기도 굿을 깊이 연구했고, 재인청 춤의 전문가였고, 우리의 소리를 방송에 담았고, 예순을 넘어 선 십수 여 년간 전국을 답사하며 우리 문화재를 알려냈다.

내일이 발인인데, 아직 꼼짝할 수 없다. 장례식장에도 가지 않았다. 조의금을 넣고 문상하는 것은 내 일이 아니다. 형은 아직 가지 않았으니까. 형은 여전히 내게 머물고 있다. 이렇게 기억이 또렷한데, 이렇게 웃고 있는데, 이렇게 나직이 내 이름을 부르는데... 네, 형님...




가슴에서 지울 수 없는 사람_Una persona che non può essere cancellata dal cuore


아우님은 형의 소식을 전하면서 나와 함께 망중한을 즐기는 사진과 함께 당신의 소회를 담아 부고를 전했다. 나는 다시 이 소식을 한국에 가 있는 하니에게 전했다. 우리는 막역한 사이였을 뿐만 아니라 아우가 언급한 장소 등지에서 만나 정을 키워나갔다. 아우의 메시지에 등장한 의형제는 여주에 살고 있는 도예가 아우님을 중심으로 가끔씩 만나 정을 나누던 사이였다. 그렇지만 내가 이탈리아 요리에 입문한 이후에는 거의 만나지 못 헸다. 한두 차례 여주의 아우네 집에서 만나 회포를 풀었을 뿐이다. 그 이후에는 주로 페이스북을 통해 가끔씩 연락을 주고받았다. 아우가 언급한 대로 형은 다양한 이력의 소유자였을 뿐만 아니라 나이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매우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그런 형이 어느 날 페이스북에서 자취를 감춘 것이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있나 보다고 생각했지만 공백이 너무 길었다. 아무튼 무슨 사정이 있나 보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형에게 나쁜 일이 생긴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아침(현지시각) 아우로부터 부고가 날아든 것이다. 그 즉시 왈칵 눈물이 쏟아지며 형과 함께 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아우가 페북에서 언급한 대부분의 자리에 내가 함께 있었다. 속초에서 수원 화성에서 여주에서 전주에서 남원에서 형과 함께 출사와 취재를 다니는 동안 행복했던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런 일이 한 두 장면이 라야지..ㅜ 한국에 있으면 한 걸음에 달려갔을 텐데.. 하루 종일 형이 내 곁에 서성거려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형을 생각하며 글을 쓰는 지금도 글씨가 희미해 보인다. 사노라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분들은 제각각의 향기를 낸다. 형의 겉모습은 무뚝뚝해 보이지만 속이 깊은 분이었다. 한 번 정을 주면 목숨까지 내줄 정도로 의리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지냈다. 그런 형 앞에서는 재롱까지 떨어도 아무렇지도 않다. 아우가 우연찮게 기록을 남긴 사진도 그중 한 장면이다. 어느 날 수원화성에서 망중한을 즐길 때 형의 어깨를 주물러주는 장면이 용케도 남아있었다. 한국과 이탈리아.. 먼 거리이기도 하지만 한 걸음에 달려간다고 한들 다 무슨 소용이랴..ㅜ 가슴속에서 절대로 지울 수 없는 사람.. 형의 영전에 드릴 게 이것 밖에 없다는 말입니까..!


여주 즘골에 살고 있는 도예가 아우님의 소박한 전시관 풍경(2017년 6월 29일). 형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만리장성을 쌓았다. 친형제 보다 더 진한 사랑과 우정으로 행복했던 시간들.. 글쎄, 왜 그렇게 빨리 가십니까..ㅜ



Mio fratello è morto


Mio fratello è morto, ha vissuto come lui e se ne è andato. Ci siamo incontrati per la prima volta all'inizio del 2008. Era un giorno d'estate. Durante il primo incontro, fece un fratello e attraversò insieme lo spirito di Guryongryong in un giorno di autunno rosso acero. Poi, per più di dieci anni, ci siamo incontrati come pazzi, girando per le varie località: Namwon, Jeonju, Suwon. La differenza di età di 23 anni era inutile.


La scorsa estate è crollata. non ci credette Si ricorda verso la fine di settembre. Ho visto un fratello sdraiato in un ospedale di Suwon. Non era già un fratello che conoscevo. Eppure ho pensato che sarei tornato. credettero fermamente E... un testo ieri, una telefonata seguita, "Sono tornato mio fratello." Era la voce del secondo fratello che viveva in Yeoju.


il castello basso Era un broadcasting, un artista culturale e un blogger. Amava molto la nostra cultura. Ha fondato un giornale d'arte tradizionale che non ha soldi, ha studiato a fondo l'esorcismo, è stato un esperto di danza re-in-coming, ha messo in onda i nostri suoni e ha superato l'ordinazione per decine di anni e ha informato i nostri beni culturali.


Domani è partenza del corteo funebre
, non posso ancora muovermi. Non sono mai andato al funerale. Non è il mio lavoro mettere un po' d'oro e impastare. Mio fratello non è ancora andato. Mio fratello mi sta ancora a letto. Mi ricordo bene che sorride così, e io chiamo il mio nome... Sì, fratello maggiore...


Una persona che non può essere cancellata dal cuore
il 31 Gennaio 2021, La Disfida di Barletta PUGLIA
Foto di CHEONRYEONG KIM e Scritto di YOOKEUN CH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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