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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그곳 Feb 09. 2021

돌로미티의 혼(魂)

#67 기록, 돌로미티(Dolomiti) 19박 20일


지난 여정(세 봉우리의 아름다운 동행) 끄트머리



돌로미티 여행 사진첩을 열어놓고 보니 그 속에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티끌만 한 사람들이 둘레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빼꼼히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장엄하기 짝이 없는 세 봉우리.. 이곳에 서면 당신의 등 뒤에 든든한 후원자가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랄까.. 



사람들이 그냥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당신의 등 뒤에서 자기를 굽어보고 있는 세 봉우리를 느끼며 길을 걷는 것이다. 하니와 나도 그들과 전혀 다를 바 없다. 우리는 곧 뜨레 치메 디 라바레도의 쉼터(Rifugio Auronzo alle Tre Cime di Lavaredo)에 도착하게 될 것이며, 그곳에서 우리와 함께 동행한 세 봉우리를 다시 느긋하게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곳에 신의 그림자가 서려있다. 



돌로미티의 혼(魂)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발품을 팔며 걸었더니 저만치 뜨레 치메 디 라바레도의 쉼터(Rifugio Auronzo alle Tre Cime di Lavaredo)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하니와 나는 곧 쉼터에 도착할 것이다. 그동안 나는 돌로미티의 대표선수라 일컫는 세 봉우리를 가끔씩 뒤돌아 봤다. 뷰파인더의 앵글에 세 봉우리를 통째로 담아볼 요량으로 걸음을 걸으면서 적당한 시간이 되면 다시 돌아보는 것이다. 새 봉우리 곁을 떠나면서 이 같은 동작은 반복되었다. 

그런데 돌로미티 최고의 명소라 일컫는 이곳에 치명적인 약점이 발견됐다. 주차장에서 이곳으로 이동하는 동안 뷰파인더가 피해야 하는 풍경이 이어지는 것이다. 보통의 산길에서 발견되지 않는 드넓은 길이 길게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도시의 신작로를 방불케 하는 넓은 도로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백미에 깃든 꼴불견이라고나 할까.. 나는 세 봉우리와 멀어지면서 신작로 길을 피해 사진을 남겼다. 쉼터가 저만치 보이는 풍경 앞에 등장한 신작로.. 이곳은 탱크가 지나다닐 수 있는 길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길이 생겼을까.. 



시간을 거꾸로 돌려 1915년으로 돌아가 보면 돌로미티에 깊이 새겨진 상흔을 알게 된다. 세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형성된 이탈리아 전선(Fronte italiano)은 915년부터 1918년까지 이탈리아 왕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간 국경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들을 말한다.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의 이탈리아계 주민 거주 영토를 할양받는다는 보장을 받고 협상국의 편에 서서 참전했다고 위키피디아는 전한다. 



이 전쟁에서 이탈리아는 물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과 독일 제국군은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된다. 이탈리아군은 30만 명에 달하는 인명 손실을 입었고 오스트리아, 헝가리, 독일 연합군은 40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인명 손실을 입었다. 1915년 이후로 험준한 돌로미티 산맥 근처에서 치열한 산악전이 지속되면서 생긴 피해였다. 그들은 적의 포화와 알프스의 험악한 지형으로부터 병사들과 장비를 보호하기 위해, 양측 공병대는 어느 정도의 방호와 더 나은 보급 지원을 가능하게 하는 전투용 갱도를 건설하였다. 



돌로미티 산군에서의 굴삭 작업은 근처의 산꼭대기나 빙하의 적성 군대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전한다. 따라서 이러한 작업은 극도로 높은 숙련도와 기술을 필요로 했다. 그런 까닭에 1916년 12월 13일에는 이곳에 주둔하던 병사들이 하룻만에 1만 명이 넘게 목숨을 잃었는데 눈사태 때문이었다. 그때를 일컬어 '하연 금요일'이라 불렀다. 

그런 까닭에 이곳의 산길은 전술적으로 이용되고 있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장엄한 세 봉우리를 잘 조망할 수 있는 쉼터로 가는 길은 돌로미티 산군의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마치 서울 한복판에 서 있는 빌딩 곁의 신작로를 연상케 하는 것이다. 



위 자료사진의 쉼터 뒤로 보이는 암봉 아래 뚫어 놓은 작은 구멍(동굴) 몇 개가 그때 남은 흔적이며 돌로미티 곳곳에 당시의 상흔이 남아있었다. 장엄한 비경 아래 길게 이어지고 있는 신작로 길.. 하지만 무엇이든 단점이 있으면 장점도 있는 법이다. 최악의 상황에서 1%의 가능성이 전세를 역전시키듯 세상만사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랄까..



드넓은 신작로 길에서 뒤돌아 본 세 봉우리가 건재를 과시하고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하니는 돌로미티에 발을 디딘 이후로 무시로 휴대폰을 꺼내 보고 있다. 비경을 휴대폰에 담는 것은 물론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돌로미티의 풀꽃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 것이다. 자칫 황량해 보이는 신작로 길 옆에는 풀꽃들이 여행자를 반기고 있었다.


-안녕, 아이들아! ^^ 

-(일제히) 와~아더찌다. 안넝하떼요. ㅋ 


나는 돌로미티 여행을 통해서 이들 풀꽃이 이곳을 살아 숨 쉬게 만드는 심장이자 혼이라 생각했다. 만약 이들이 없었다면 돌로미티는 얼마나 멋대가리가 없었을까. 그냥 밋밋한 돌산 혹은 바위산이라면 앙꼬 빠진 찐빵으로 변했을 게 틀림없다. 그런 한편 사람들의 발아래 혹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지들끼리 살아가고 있는 게 너무 기특해 보이는 것이다.



장엄한 세 봉우리에 견주면 개미보다 더 작게 보이는 사람들 곁에서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들은 돌로미티의 진정한 주인이 아닐까. 엄청난 재산과 인명 손실을 불러온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전사자들의 넋이 깃든 풀꽃이라 생각하니 다시금 숙연해진다. 치명적 풍경을 안겨준 신작로 길을 잊게 만든 가녀린 생명들이 무심해 보이는 산중에 빼곡한 것이다.


-안녕, 아이들아! ^^ 

-(일제히) 와~아더찌다. 안넝하떼요. ㅋ 


우리는 사는 동안 종종 원치 않는 풍경을 맞닥뜨리게 된다. 어쩌면 삶 전체에 깃든 게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일인지도 모를 일아다. 삶이 치열해 보이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 산중에서 일어난 전투나 다름없을 것. 누군가 '좁은 길을 가라'라고 했는데.. 신작로 길을 걷다가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풀꽃의 삶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신작로를 따라 걸으며 풀꽃들과 대화를 나누며 조금씩 멀어지자, 마침내 베일에 싸였던 뜨레 치메 디 라바레도의 세 봉우리가 위용을 드러냈다. 엄청난 기운이 가슴속으로 파고든다. 세 봉우리는 좌로부터 치마 삐꼴라(Cima piccola, 2,857m), 치마 그란데(Cima grande, 2,999m) 및 치마 오베스트(Cima ovest, 2,973m)로 구성돼 있다. 각각 작은 봉우리, 큰 봉우리, 동쪽 봉우리로 부른다. 기록, 돌로미티(Dolomiti) 19박 20일은 계속 이어진다. 


Documento di 19 notti nelle Dolomiti_TRE CIME DI LAVAREDO
Scritto_il 08 Febbraio 2021, La Disfida di Barletta PUGLIA
Foto e Scritto di YOOKEUN CHANG_GEOGRAF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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