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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그곳 Mar 18. 2021

그 남자의 기록

#74 기록, 돌로미티(Dolomiti) 19박 20일

이탈리아에서 코로나 시대를 지내는 나만의 방법..!!


지난 여정(가슴에서 지워지지 않는 풍경) 중에서



내가 향한 공동묘지는 누군가의 이끌림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숙소에서 100미터를 채 오가지도 못한 몸으로 1킬로미터가 더 되는 시 외곽의 묘지로 향했던 것이다. 왕복거리가 만만치 않았다. 묘지까지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하고 허리를 찢는 듯한 고통을 무릅쓰고 묘지 입구에 다다랐다. 
그런 잠시 후 고개를 들고 묘지 내부로 통하는 길 끄트머리에 붉은 피를 뚝뚝 흘리며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상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잠시 잊고 살던 예수의 십자가.. 당신은 힘 없이 머리를 떨군 채 내 앞에 매달려 있었고 나는 그의 곁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때 희한한 일이 생겼다.



허리병 때문에 다리를 절며 걸음을 옮겨야 할 텐데 이때부터 허리의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 나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조금 전까지 나를 괴롭혔던 허리의 통증을 찾아내려고 애썼다. 그런데 감쪽같이 허리의 통증이 사라진 것이다. 나는 예수상 앞에서 몇 발자국 뛰어보기도 하고 깡충깡충 점프를 해보기도 했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리오 꼬자이께(Rio Coyhayque) 강 옆에 위치한 묘지에는 나 혼자 밖에 없었다.


당시 나를 간호해 준 하니가 저만치 앞서 가고 있다.



그 남자의 기록




   서기 2021년 3월 17일 저녁나절(현지시각), 나는 파타고니아 여행 사진첩을 열어놓고 내게 기적(奇蹟) 베푼 그 남자를 기념하고 있었다. 그 시간이 어느덧 10년의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숙소를 나서 꼬자이께 시립 공동묘지까지 젖 먹던 힘을 다해 걸어가며 카메라는 손에서 놓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허리병의 주요인이 척추를 바르게 하지 못하는 자세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거운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다녔던 것이다. 죽으면 죽으리라.. 



당시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으면 자진하고 싶었을까.. 사람들은 갑자기 뜻하지 않는 일이 생기면 아무런 생각도 대책도 없는 법이다. 내가 가끔씩 어린왕자의 등장을 소환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어느 비행사(생떽쥐페리)가 사막에 불시착하여 고장 난 엔진을 열심히 고치느라 초주검이 되었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엔진을 수리하여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만약 엔진 수리가 불가능하다면 그는 사막에서 혼자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사막의 뜨거운 볕 아래서 엔진 수리를 하다가 지쳐 잠이 들었을 때 그의 귀를 의심케 하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잠결에 들은 어떤 목소리는 꿈인가 생신가 했을 것이다. 어린 왕자가 말했다. 


"아저씨, 나 양 한 마리만 그려 줘."

"응?"

"나 양 한 마리만 그려줘."



생떽쥐페리가 쓴 고전 <어린왕자>는 이렇게 시작됐다. 그리고 작가는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썼다.


나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화닥닥 일어섰다. 그리고 눈을 비비고 자세히 쳐다보았다. 나를 점잖게 바라보고 있는 어린 친구가 보였다. 여기 있는 그림이 내가 나중에 그린 그의 가장 근사한 초상화다. 물론 내 그림은 모델보다는 훨씬 덜 아름답다. 그러나 이것은 내 탓이 아니다. 여섯 살 적에 이미 어른들 때문에 화가로서의 장래에 낙심하여, 속이 보이기도 하고 안 보이기도 하는 보아 구렁이밖에 그림이라고는 전혀 배운 일이 없었으니까.
그래 나는 눈이 휘둥그래 저 가지고 그 허깨비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사람 사는 지방에서 수만 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었다. 그런데 이 어린 친구가 길을 잘못 든 것 같지는 않았다. 몹시 고달프다든가, 시장하다든가, 목이 마르다든가, 무서워서 벌벌 떤다든가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사람 사는 곳에서 수만 리 떨어진 사막 가운데서 길을 잃은 아이다운 빛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이윽고 나는 말문이 열려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넌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러나 그 아이는 아주 무슨 중대한 일이기나 한 것처럼 가만히 같은 말을 되뇌었다.


"아저씨, 나 양 한 마리만 그려줘."



소설은 이런 것이다. 말 그대로 있을 법한 개연성을 글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는 얼마나 놀랐을까.. 앙투안 마리 장 바티스트 로제 드 생떽쥐페리(Antoine Marie Jean-Baptiste Roger de Saint-Exupéry)는 프랑스 리옹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몰연대는 1900년 6월 29일 ~ 1944년 7월 31일(추정)이다. 4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당신의 상상력을 소환한 것은 다름 아니다. 당신은 소설을 썼지만 나는 실제의 경험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로부터 대략 1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돌로미티 여행 때 만난 뜨레 치메 디 라바레도의 절경을 포스트에 담고 있다. 하니의 지극한 간호에 힘입어 부활한 것이다. 



부활의 배경에는 서두에 언급한 한 남자, 예수님이 베푼 기적이 작용을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너무 지쳐 힘들 때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일 텐데 내가 기적을 체험하기 직전까지 습관처럼 해 오던 하늘을 향한 기도는 생략된 것이다. 



기적은 그런 것이었다. 누군가의 이끌림에 의해 공동묘지에 도착했을 때 어린왕자의 등장처럼 내 앞에는 십자가에 매달리 예수님이 고개를 떨구고 처연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게 전부였다. 기적적으로 소생한 나의 손에는 여전히 카메라가 들려있었다. 사순절을 맞이하여 당시 카메라에 담았던 장면 전부를 편집해 놓고 보니 당시의 심정이 오롯이 되살아 났다. 



그때 그 남자.. 죽을 고비를 넘기고 부활한 한 남자 사람이 뜨레 치메 디 라바레도 현장에서 인증숏을 날리고 있는 것이다. 당시에는 남미 파타고니아 땅에 있었지만 절치부심 우여곡절 끝에 하니와 나는 이탈리아에 둥지를 틀게 된 것이다. 중언부언.. 했던 말 또 하고 또 우려먹어도 그저 감사하고 신기할 뿐이다. 삶의 시간을 계수하고 있는 게 아니라 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현상과 사람을 기억해 내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런 추억이 없었다면.. 나의 취미가 '사진'이 아니었더라면 코로나 시대는 얼마나 암울했을지 모른다. 코로나 시대에 나 혼자 이탈리아에 고아처럼 버려졌다고 생각하면.. 실로 끔찍한 일이다. 이탈리아 반도 전체에 문화유산과 절경이 널렸다고 한들 혼자 싸돌아 다니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며 무슨 즐거움이 배어날까.. 



오늘 아침(현지시각)에 그녀가 궁금해 전화를 했더니 지인들과 함께 속초까지 다녀왔다고 했다. 그리고 속초시장에서 생선회를 배 터지게 먹었다고 했다. (잘했군 잘했군 잘했어~ ^^) 주로 집콕을 하다가 여럿이서 봄나들이를 했으니 내가 함께한 것처럼 속이 다 시원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화제는 코로나이다. 그때부터 전화기 너머 목소리는 일순간 어두워진다.



서기 2021년 3월 17일 자 이탈리아 코로나 성적표는 암울했다. 감염자 수가 가파른 상승세를 이어가며 새로운 감염자가 23,059명에 이르렀으며, 사망자 수는 431명에 이르렀다. (Covid Italia, bollettino oggi 17 marzo: 23.059 nuovi casi e 431 morti, picco di ingressi in rianimazione) 사람들이 겉으로는 태연해 보여도 이탈리아는 매일 지옥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3차 팬데믹까지 유려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하니의 이탈리아행 티켓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때 '그 남자의 기록'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하루의 시작과 마무리는 기록으로 시작해서 기록으로 끝나는 것이다. 기록, 돌로미티(Dolomiti) 19박 20일은 계속 이어진다. 


Documento di 19 notti nelle Dolomiti_TRE CIME DI LAVAREDO
Scritto_il 18 Marzo 2021, La Disfida di Barletta PUGLIA
Foto e Scritto di YOOKEUN CHANG_GEOGRAF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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