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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그곳 Apr 05. 2021

젤라또에 포장지 두른 까닭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의 부활절

아이스크림을 포장지로 포장하는 이상한 시대가 찾아왔다..?!!



   서기 2021년 4월 4일 부활절 아침, 내가 살고 있는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를 돌아봤다. 이 도시 중심에는 바를레타 두오모(Duomo di Barletta_Basilica Cattedrale Santa Maria Maggiore)가 자리 잡고 있다. 두오모 곁에는 바를레타 성(Castello di Barletta)이 두오모와 나란히 유서 깊은 이 도시를 빛내고 있다. 이탈리아 반도를 장화에 비교할 때 장화 뒤꿈치 바로 아래에 해당하는 이곳은 내가 '아드리아해의 진주'라고 부르는 곳이다. 이유가 뭔가.. 



내가 살고 있는 도시 바를레타 개관


대략 인구 10만 명이 살고 있는 이 도시의 구 시가지(Centro storico)는 전부 대리석으로 지어진 것이다. 대리석은 도시 전부를 덮고 있고 건축물 다수는 대리석으로 지어진 매우 특별한 도시이다. 또 마차가 다닐 수 있는 구도시 중심에는 신분을 둘로 나누는 검은 대리석과 하얀 대리석이 구도시 중심에 깔려있다. 검은 대리석이 깔린 도로는 부자들이 사는 곳이다. 


이 도시의 이름 바를레타(Barletta)는 서기 1503년 2월 13일부터 부르게 됐다. (링크된) 기록에 따르면  11세기의 십자군 원정 기간 동안 번창하며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16세기 초, 그러니까 1503년 2월 13일에 안드리아와 코라토 사이의 영토에서 열린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의 역사적인 충돌의 중심지였는데.. 이때 바를레타의 도전(Disfida di Barletta)이라는 이 도시의 정체성이 확립된다. 


1503년 2월 13일 아침, 산타 엘리아(La Disfida di Barletta fu uno scontro tenutosi il 13 febbraio 1503 nella mattina di Sant'Elia (in territorio di Trani, all'epoca dei fatti sotto giurisdizione veneziana_오늘날 바를레타-안드리아와 함께 합병된 도시 뜨라니)에서 13명의 이탈리아 기사들과 많은 프랑스 기사들 사이의 충돌(바를 레 타인을 얕잡아 보는)이었다. 


따라서 13:13의 기사들이 맞대결을 펼친 후 그 승자가 이곳을 차지하기로 한 것이다. 바를레타인(오늘날 이탈리아인)의 도전(La Disfida di Barletta)은 승리로 끝났다. 이때부터 바를레타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518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이곳 시민들은 매우 활동적이면서도 가정적이어서 시내로 외출할 때는 가족 전부가 한 몸처럼 움직이게 된다. 혼자 다니는 사람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래서 인구 10만 명이 살고 있는 도시가 아니라 100만 명이 살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명동이나 종로를 연상하면 별로 틀리지 않다. 따라서 피렌체서 이 도시로 둥지를 바꿀 때는 그냥 이름도 없는(?) 어촌 정도로 생각했지만 이때부터 생각이 완전히 바뀌게 된 것이다. 뿔리아 주에 속한 이들의 자부심과 자긍심은 대단했다. 이탈리아 어느 곳과도 비교되는 걸 원치 않는 사람들인 것이다. 뿔리아 주가 최고라는 것.


이렇듯 바를레타를 잠시 개관한 이유가 있다. 매일 같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던 시민들이 언제부터인가 종적을 감추며 도시가 공동화되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 시대에 그 어떤 자부심과 자긍심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코로나 성적표를 참조하면 시쳇말로 개죽 쑤고 있는 형편이다. 오죽하면 이탈리아 보건 당국이 부활절 행사를 취소하고 통행제한을 발표했을까.. 


사태가 매우 심각한 것이다. 그런 부활절 아침에 나는 이 도시의 표정을 살피러 나간 것이다. 바로 집 앞에 두오모가 있고 바를레타 성이 있으며 도시의 중심을 관통하는 대리석으로 만든 길이 있는 것이다. 집을 나서자마자 도시는 거짓말처럼 텅 비었다. 어쩌다 자동차 한 두대가 지나다니고 사람들도 모두 착하게 집콕을 하고 있는지 시내는 가끔씩 사람들이 삼삼오오 눈에 띌 뿐이었다. 



젤라또에 포장지 두른 까닭


나는 두오모 앞에 이르자 딱 한 곳 문을 연 젤라또(Gelato) 가게(Gelateria)를 발견했다. 이탈리아인들이 너무 좋아하는 젤라또(아이스크림)는 이 도시는 물론 이탈리아 어디를 가더라도 눈에 띌 정도로 번창하는 사업 아이템이다. 도시의 가게 대부분이 문을 닫았으므로 반가운 마음에 초코라또(Cioccolato)+노치올라(Nocciola)를 주문했다. 


가게 주인은 아이스크림 떠 담는 숟가락(Cucchiaio di Gelato)으로 재빨리 고깔콘에 담았다. 그리고 곧바로 내게 건네지 않고 우물쭈물하더니 알미늄 포일로 젤라또를 포장하고 건네주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이게 뭥미?" 싶었는데.. 가게 주인의 설명이 가관이었다. 그는 "코로나를 방지하기 위해 포장을 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웃어 보였다. 나도 피식 웃으며 "고맙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두오모 잎으로 이동했다. 평소 봐 두었던 명당을 찾아간 것이다. 그곳은 바를레타 성 앞이며 대리석으로 만든 의자에 앉으면 두오모가 코 앞에 바라보이는 곳이다.



부활절 아침에 둘러본 우리 동네


지금부터 소개되는 풍경은 이날 아침 내가 살고있는 집 주변을 한바퀴 돌아본 풍경들이다.



포장된 젤라또는 손에 들고 바를레타 두오모 앞으로 가기 전에, 한 성당(Santuario Parrocchia Santa Lucia vergine e martire) 곁에 위치한 카페의 풍경이다. 카페와 인도의 경계를 만든 화분에 자란 이름을 알 수 없는 식물이 너무 아름답다. 그 뒤로 너댓명의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며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 모두 마스크 착용을 하지 않았다. 그 중 1인이 사진을 찍는 내가 궁금했는지 이렇게 물었다.


-이곳에 사세효? 

-네, 요~기요. ^^

-이탈리아에 사신지 얼마나 되세효?

-대략 7년은 된 거 같아요.


그는 나의 이력 등에 대해서도 꼬치꼬치 되물었다. 나는 그의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을 했다. 그의 질문을 참조하면 내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 모습이 조금은 남달라 보였던 것 같다. 이 도시에는 카메라는 메고 다니는 사람을 찾아보기 쉽지않고, 대채로 카메라를 든 사람들은 기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는 내심 걱정하는 것이었다. 코로나 시대에 대여섯 명이 모여있고 마스크까지 착용하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이 도시에서 나의 일거수일투족은 조심스럽다. 지인을 통해 이곳의 소식이 대한민국과 SNS(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브런치)에 전달되고 있다는 것 때문이다. 어떤 때는 칭찬의 글도 영향력을 발휘해 도시 어느 성당 앞의 풍경이 바뀌기도 했다. 그들은 나의 생각과 달리 귀차니즘 내지 게을리즘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부활절 아침 위에서 언급한 성당은 문을 걸어 잠갔다. 새벽에 신부님이 때리는 종소리만 들었을 뿐이다.



이 도시의 리스또란떼 전부는 이런 모습으로 영업이 중지된 상태이다. 



나는 두오모 앞 명당에 자리 잡고 조심스럽게 포장지를 열었다. 젤라또를 포장지에 포장한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서는 음식을 함부로 먹을 수 없지만 이때만큼은 나 혼자.. 



포장지를 천천히 열자 젤라또가 포일에 묻어났다. 먼저 포일을 살며시 걷어내고 포일에 묻어난 젤리또를 야금야금 혀로 핥았다. 혼자 씩 웃었다. 나이도 어리지 않는 안 청춘이 어느 날 먼 나라의 한 두오모 앞에서 젤라토를 빨고 앉아있는 것이다. 세상 참 좋아졌다. 부모님 생전에 도무지.. 도대체.. 무슨 수식어를 동원해도 합리화되지 않는 일이 나로부터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ㅎ



나는 포일에 묻어난 젤라또를 싹싹 다 핥은 다음 근처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통째로 남아있는 젤라또의 달콤함에 빠졌다. 한 혓바닥 한 혓바닥 달콤하고 부드러운 노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내 앞으로 경적을 울리며 쏜살같이 지나가는 구급차.. 잠시 놓고 있던 카메라가 건진 건 두 컷이었다.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두 컷을 이어 붙이니 코로나 시대가 실감 난다. 마지막으로 고깔콘이 바스락거릴 뿐, 거금 2유로를 투자한 젤라또는 금세 혓바닥 위에서 다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때부터 동네를 한 바퀴 돌아 집으로 돌아왔다. 



포토, 부활절 아침에 돌아본 아드리아해의 진주

















스크롤을 천천히 내려 둘러보신 분들이라면 이 도시가 이탈리아의 그 어떤 도시보다 아기자기하고 정감 있는 도시란 걸 느끼게 될 것이다. 이날 내가 돌아본 바를레타의 중심은 불과 반경 300~500미터 정도의 거리였다. 그곳에 더 많은 풍경들이 숨겨져 있지만, 주로 부활의 현장을 카메라에 담으려 애썼다. 우리가 코로나에 쫓기는 동안 도시 곳곳에서는 식물들이 부활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그들과 함께 언제쯤 부활의 대합창을 부를 수 있을까.. 그날이 속히 오기를 기원해 마지않는다. 부활절 아침에..!!


Perchè il gelato è imballaggio_Auguri di Buona Pasqua 2021
il 05 Aprile 2021, La Disfida di Barletta in PUGLIA
Foto e scritto di YOOKEUN CHANG_GEOGRAF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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