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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그곳 May 06. 2021

내가 다시 태어난 장소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렛지아 디 꼴로르노 궁전

나 혼자 가슴에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었던 차마 잊을 수 없는 곳..!!



   추억도 식품일까.. 날씨가 화창한 어느 봄날 아침(5월 5일)이었다. 일요일이었던 이날 나는 카메라를 들고 렛지아 디 꼴로르노(Reggia di Colorno, Parma)로 향했다. 숙소에서 멀지 않은 이곳은 나의 인생 후반전을 통째로 뒤흔든 사건이 일어난 현장이다. 


요리학교 알마(ALMA, La Scuola Internazionale di Cucina Italiana)가 이곳에 위치한 것이며, 학교는 렛지아 디 꼴로르노 궁전 90% 이상을 사용하고 있다. 매우 잘 다듬어진 궁전의 정원은 빠르꼬 두깔레(Parco Ducale (Parma)) 공원을 끼고 있었는데 나는 이날 아침 학교 전경을 카메라에 담아 기념하고 싶었다. 그게 코로나 시대가 한창인 지금 빛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날 아침 이곳에서 맨 먼저 만난 사람은 반려견을 데리고 산책 나온 한 중년 여성이었다. 때 하나 묻지 않은 햇살을 받으며 드넓은 정원의 침묵을 깨는 그녀는 내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가끔씩 나의 뷰파인더에 잡혔다. 참 평화롭고 정겨운 장면이 렛지아 디 꼴로르노 정원을 조용히 깨우고 있는 것이다. 




내가 다시 태어난 장소




궁전의 정원에서 바라본 요리학교의 전경이다. 건물 중 1층의 몇 곳을 제외하면 교무실과 강의실 등이 정면에 배치되어 있고 건물 뒤편에 요리 실습실과 부대시설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중세시대 때(1300년대 중반 무렵) 군주 꼬라지오(signore di Correggio)의 아조의 소유물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적 건물이었다. 그런 건물이 2세기를 거치면서 바르바라 디 산베리노(la contessa Barbara di Sanverino) 백작에 의해 우아한 르네상스 궁전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리고 1612년 라누치오 파르네제(Ranuccio Farnese) 백작이 산베리노의 재산을 몰수한 후 건물의 외형은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그때 보수가 완료된 건축물이 지금의 렛지아 디 꼴로르노 궁전인 것이다. 그 후 라누치오 파르네제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남자 상속인이 없어, 빠르마와 삐아첸차 공작은 엘리사베따 파르네스(Elisabetta Farnese)와 스페인 왕 필립 5세의 아들들(re di Spagna Filippo V di Borbone)에게 넘겨졌다. 


처음 까를로는 1734년 까뽀디몬떼(Capodimonte)에 있는 나폴리 궁전으로 옮겨진.. 파르네스가 궁전을 장식했던 미술 소장품들과 가구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 후 그의 형과 달리 꼴로르노를 그의 주요 거주지로 만들며 단지를 통째로 리모델링했다. 



그 일은 프랑스 건축가(Ennemond Alexandre Petitot)가 맡았으며, 궁정 장인들과 함께 왕궁의 내부를 베르사유 공작부인이 알고 있는 것과 비슷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1765년 필립 디 보르봉(Filippo di Borbone)의 아들인 페르디난도가 죽었을 때, 빠르마 공국(il Ducato di Parma)은 나폴레옹(Napoléon Bonaparte)의 프랑스에 합병되었다. 



그 후 1807년, 꼴로르노 궁전은 "팔라초 임페리얼(Palazzo Imperiale, 제국의 궁전)"으로 선언되었지만,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꼴로르노와 빠르마, 삐아첸차, 구아스딸라의 전부가 퇴위된 나폴레옹의 아내 마리아 루이지아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중요한 변화의 새로운 국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대략 약 30년 동안 빠르마의 사랑하는 공작부인이었던 마리아 루이지아(Maria Luigia d’Austria)는 그녀의 취향의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듀칼 아파트(agli appartamenti ducali)와 그녀가 사랑한 큰 정원에 새겼다. 그 후 이탈리아의 통일과 까사 사보이아(Casa Savoia)에 의해 이탈리아 국유 재산으로 왕궁을 양도한 후, 이 궁전은 1871년에 빠르마 지방(Parma)의 소유가 되었다. 



오늘날 한 해 수만 명의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이 궁전은 이탈리아의 요리 학교 ALMA의 본거지로 사용되고 있고, 이탈리아의 요리 아버지로 불리는 거장 괄띠에로 마르께지(Gualtiero Marchesi) 선생의 지도로 한 해 수백 명 이상의 요리사를 배출하게 된 것이다. 



나는 용케도 선생으로부터 이탈리아 요리의 철학 등을 배우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가 대략 간추려본 렛지아 디 꼴로르노 궁전에 얽힌 역사이다. 기회가 닿으면 다시 관련 자료를 번역해 게재토록 한다. 서기 2021년 5월 5일 저녁나절(현지시각), 나는 오랫동안 덮어 두었던 사진첩을 열어 당시를 회상해 보고 있다. 통금이 시작되기 전 두서너 대의 구급차가 요란한 경적을 울리며 사라졌다. 



나는 코로나 시대에 요리학교의 사진첩을 열어보고 있는 것이다. 누차 강조하지만 집콕이 일상이 된 코로나 시대가 아니라면 죽을 때까지 요리학교의 사진첩은 빛을 보지 못하거나 일부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날 아침 나의 카메라에 담긴 기록들은 내게 매우 중요했다. 



유서 깊은 이 궁전에서 세상을 새롭게 보는 수업을 받았으며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랄까.. 세상은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을지 모르지만, 조국과 어머니는 절대로 바꾸지 못한다. 그럼에도 다시 태어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작은 결심이 함께 했다. 지천명의 나이와 이순을 지나면 세상은 더 이상 흥미로울 게 없어지는데 하늘은 나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이때부터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것이며 그곳이 나를 다시 낳아준 렛지아 디 꼴로르노 궁전이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이나 다름없는 가난한 나라의 국민 1인이, 어느 날 귀족의 궁전에서 요리를 공부하는 희한한 일이 생겼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요리는 단지 식재료를 입으로 먹는데 그치지 않고 오감을 동원한다는 사실까지 깨닫게 됐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자주 입에 올리는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이 코로나 시대에 실감되는 것이다. 식품이 육신을 살찌운다면 추억은 익어가는 영혼에 향기를 더하는 것이랄까..



내가 살고 있는 이곳 바를레타는 밤이 깊어가면 갈수록 침묵도 동시에 깊어간다. 코로나 시대가 만든 암울한 그림자이다. 이때 컴 앞에 앉아 나 홀로 열어본 꼴로르노 궁전은 가슴에 환한 빛을 쏟아붓는다. 신의 그림자가 동행한 그날 아침의 풍경이 내 가슴에 오롯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영상, 내가 다시 태어난 장소



LA STORIA DELLA CUCINA ITALIANA_REGGIA DI COLORNO
ALMA LA SCUOLA INTERNAZIONALE DI CUCINA ITALIANA
il 06 Maggio 2021, La Disfida di Barletta in Puglia
Foto e scritto di YOOKEUN CHANG_GEOGRAF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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