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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그곳 May 15. 2021

밤비 오시는 고요한 밤

-코로나 시대,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밤 풍경

유년기 버릇 이탈리아까지 이어졌나..?!!


비가 오시면 그 아이는 툇마루에 앉아 현관 밖의 풍경에 눈을 떼지 못했다. 처마 밑으로 주르륵주르륵 떨어지는 빗물과 마당을 번갈아 보고 있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응시할 때도 있고 가끔씩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그 마당에는 점수니 호용이 영훈이 금수니 등 아이들이 뛰노는 환영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비가 그치고 땅이 뽀송뽀송하게 말라야 친구들과 놀게 될 텐데.. 마당은 촉촉이 젖어있고 처마 밑은 여전히 비가 주룩주룩 오신다. 한 녀석이 나가 놀지 못해 안달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서기 2021년 5월 14일 자정 무렵(현지시각), 내가 살고 있는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에 밤비가 오시고 있었다. 봄비가 부슬부슬 보슬보슬 도시를 적시고 있는 것이다. 비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 비의 종류만도 숱하다. 밤에 내리는 비는 밤비, 봄에 오시는 비는 봄비, 여우비도 있고 소나기도 있다. 먼저 간밤에 내린 밤비의 풍경을 영상으로 만나본다.



영상, 밤비 오시는 고요한 밤




영상을 통해 밤비 내리는 바를레타의 거리를 보시면 을씨년스럽기도 하고 분위기가 넘치는 것 같기도 하다. 코로니 시대에 나는 매일 이 같은 풍경에 익숙해 있다. 밤만 되면.. 통금시간이 시작되면 다음날 아침까지 도시는 침묵에 휩싸이는 것이다. 하니가 코로나를 피해 한국에 가 있는 동안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이런 풍경을 바라봐야 했다. 

다시 그녀가 이탈리아로 돌아올 때까지 이런 습관은 계속될 것이다. 특히 브런치에 글을 쓰는 시간이 주로 저녁때(한국의 아침시간에 맞추어)이므로 사방은 조용하다 못해 시간이 얼어붙은 것 같다. 그때 현관문을 열고 나가 바람을 쇠며 머리를 맑게 하는 것이다. 



밤비 오시는 고요한 밤




코로나 시대가 만든 새로운 습관이 유년기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있는 것이다. 그런 풍경에 작은 파문을 일으킨 게 밤비이자 봄비였다. 비는 분위기를 잘 타는 녀석이라서 노랫말에 등장하여 추억을 만들곤 했다. 가수 송창식 등이 부른 '비의 나그네'라는 노래가 코로나 시대를 살고 있는 내게 썩 잘 어울리는 노래였다. 이랬지. 


님이 오시나 보다 밤비 내리는 소리

님 발자국 소리 밤비 내리는 소리

님이 가시나 보다 밤비 그치는 소리

님 발자국 소리 밤비 그치는 소리

밤비 따라왔다가 밤비 따라 돌아가는

내 님은 비의 나그네

내려라 밤비야 내 님 오시게 내려라

주룩주룩 끝없이 내려라


참 희한한 일이야. 비는 주변 환경 등에 따라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기도 하고 천의 얼굴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우리말로 된 비의 종류는 의외로 많았다. 안개처럼 눈에 보이지 않게 내리는 비는 안개비라 부른다. 는개라는 비도 있었다. 는개는 안개보다 조금 굵은 비를 가리킨다. 알갱이가 보슬보슬 끊어지며 내리는 비는 보슬비로 부른다. 부슬비도 있다. 보슬비보다 조금 굵게 내리는 비를 가리킨다. 가루처럼 포슬포슬 내리는 비를 가루비라 부른다. 또 가늘고 잘게 내리는 비를 잔비라 일컫는다. 실처럼 가늘게, 길게 금을 그으며 내리는 비를 실비라 한다. 보슬비와 이슬비가 꼴라보를 이루면 가랑비라 부른다. 



싸라기처럼 포슬포슬 내리는 비는 싸락비, 놋날(돗자리를 칠 때 날실로 쓰는 노끈)처럼 가늘게 비끼며 내리는 비는 날비, 빗발이 보이도록 굵게 내리는 비는 발비, 굵고 세차게 퍼붓는 비는 작달비, 장대처럼 굵은 빗줄기로 세차게 쏟아지는 비는 장대비, 주룩주룩 장대처럼 쏟아지는 비는 주룩비, 달구(땅을 다지는 데 쓰이는 쇳덩이나 둥근 나무토막)로 짓누르듯 거세게 내리는 비는 달구비, 굵고 세차게 내리치는 비는 채찍비, 맑은 날에 잠깐 뿌리는 비는 여우비, 갑자기 세차게 내리다가 곧 그치는 비는 소나기 그리고 먼지나 잠재울 정도로 아주 조금 내리는 비를 가리켜 먼지잼이라 불렀다. 참 재밌는 비다. 


또 비 같지 않은 비도 있다. 장마로 홍수가 진 후에 한동안 멎었다가 다시 내려, 진흙을 씻어 내는 비를 개부심이라 불렀다. 바람이 불면서 내리는 비는 바람비, 예기치 않게 밤에 몰래 살짝 내린 비는 도둑비란다. 참 재밌다. 히히.. 우박은 누리라 부르고 오래오래 오는 비를 궂은비라 불렀다. 음력 보름 무렵에 내리는 비나 눈은 보름치라 불렀다. 음력 그믐께에 내리는 비나 눈은 그믐치라 불렀다. 그저 갖다 붙이면 비의 이름이 되는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차가운 비는 찬비, 오늘 포스트 주제로 등장한 밤비는 밤에 내리는 비이다. 또 물을 퍼붓듯이 세차게 내리는 비는 악수 혹은 억수라 불렀다. 비가 다 그치지는 않고, 한창 내리다가 잠시 그친 비는 웃비, 한쪽에서 해가 비치면서 내리는 비를 해비, 농사짓기에 적합하게 내리는 비는 꿀비, 꼭 필요할 때에 알맞게 내리는 비는 단비, 모낼 무렵에 한목 오는 비는 목비, 모를 다 낼만큼 흡족하게 오는 비는 못비, 요긴한 때에 내리는 비는 약비, 복된 비를 가리켜 복비, 바람이 불면서 내리는 비를 바람비, 뭇매를 치듯이 세차게 내리는 비를 모다깃비라 불렀다. 참 생소하다. 


우레가 치면서 내리는 비는 우레비, 철 이르게 내리는 비는 이른비, 또 철 늦게 내리는 비는 늦은비, 땅에 닿기도 전에 증발되어 버리는 비는 마른비, 간밤에 내린 비처럼 봄에 내리는 비는 봄비이고 계절에 따라 여름비 가을비 겨울비가 있다. 홍수를 일으킬 만큼 많이 내리는 비는 큰비, 장맛비의 옛말인 오란비도 있었다. 주룩주룩 내리는 전라도 사투리의 비는 쪼락비란다. 너무 귀여워..히히 ^^



그런가 하면 초가을에 비가 내리다가 개고, 또 내리다가 개곤 하는 장맛비를 건들장마라 불렀다. 쪼락비가 착하다면 녀석은 덜 착한 녀석일까.. 농경시대 혹은 농촌의 봄에는 할 일이 많기 때문에 비가 와도 일을 한다는 뜻으로 쓰는 일비도 있었다. 여름에는 바쁜 일이 없어 비가 오면 낮잠을 자기 좋다는 뜻으로 쓰는 여름비를 잠비라 불렀다. 가을걷이가 끝나 떡을 해 먹으면서 여유 있게 쉴 수 있다는 가을비를 떡비라 불렀다. 농한기라 술을 마시면서 놀기 좋다는 뜻으로 사용한 술비도 있었다. 


아.. 가끔씩 이런 비에 흠뻑 젓고 싶다. 그런때 분위기를 맞춘 비도 있다. 비가 한 방울 한 방울.. 비가 시작될 때 몇 방울 떨어지는 분위기 있는 비를 비꽃이라 불렀다. 그리고 홍수의 옛말 비므슬도 있었다. 이렇게 많은 비의 종류 가운데 어느 봄날 밤비와 봄비에 젖어있는 것이다. 빗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인적이 뚝 끊어진 한밤중에 유년기를 소환하며 추억에 젖는 것. 또 노랫말 "님이 오시나 보다 밤비 내리는 소리 님 발자국 소리 밤비 내리는 소리.."에 젖게 만든 코로나 시대의 밤 풍경이 분위기를 더했다. 그때가 불금이었는데 낮에 재래시장에 다녀오면서 찍어둔 장미꽃으로 마음을 삭힌다. 밤비.. 참 고마운 녀석이었다. 씩~ ^^


COVID 19_Notte tranquilla di pioggia primaverile
il 15 Maggio 2021, La Disfida di Barletta in Puglia
Foto e scritto di YOOKEUN CHANG_GEOGRAF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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