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펄 끓는 미켈란젤로의 도시를 바라보며
피렌체를 들끓게 하는 두 가지..!!
이틀 전의 일이다. 모처럼 미켈란젤로의 도시 피렌체가 내려다 보이는 미켈란젤로 언덕으로 향했다. 그동안 몇 번이고 가 보고 싶었지만 도무지 짬을 낼 수 없었다. 이른 아침 해뜨기 전이면 몰라도 한 낯 혹은 해 질 녘 오후까지 외출은 엄두도 내지 못한 것. 볕이 얼마나 따갑고 뜨거운지 문밖으로 발을 내놓을 생각 조차 못할 정도였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날씨였다.
다행인지 습도는 낮아서 불쾌한 기분은 들지 않았지만, 한 며칠 볼 일 때문에 외출한 다음부터 반팔과 반바지 바깥으로 노출된 피부는 까맣게 녹슬었다. 물론 얼굴도 예외는 아니었다. 외출 후 집으로 돌아와 운동화와 양말을 벗으니 양말을 신은 곳과 노출된 곳이 선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희한하지?.. 르네상스의 고도 피렌체의 날씨가 이런 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연중 들끓는다. 요즘 피렌체를 방문하시는 분들이라면 눈여겨볼 게 있다. 사람들의 옷차림이 해수욕장을 방불케 하는 것. 남자 사람들은 그저 그렇다 해도 여자 사람들은 거의 발가벗고 다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치 바닷가 해수욕장에 나온 차림과 다름없다고나 할까.
피렌체를 들끓게 만든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그중 하나는 르네상스를 일군 천재 예술가 미켈란젤로와 당대의 예술가들 때문이며, 요즘 날씨 때문이다. 사람들이 옷을 훌러덩 벗는 것처럼 사람들이 피렌체를 방분하면 가슴을 열어놓고 르네상스의 예술에 심취하는 것. 불볕더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들끓는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가운에 미켈란젤로가 있었다. 나는 그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피렌체를 미켈란젤로의 도시라 부른다.
그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화를 그리는 동안 각고의 노력과 심혈을 기울였다. 누워서 그리는 그림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잠을 잘 때 어깨를 도려내고 잠들고 싶었다고 한다. 천재 예술가는 영감뿐만 아니라 당신의 노력까지 그 어느 하나도 빼놓을 수 없을 만치 예술가들의 본이 되었다. 혹자들은 메디치가의 후원 운운 하지만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시라. 그 어떤 후원이 있다고 해도 목숨까지 바꿀 수 있겠는가.
미켈란젤로는 죽는 순간까지 자기의 예술혼을 불태운 위대한 사람이었다. 만약 미켈란젤로가 돈과 명예에 눈이 어두워 당신의 작품을 만들었다면, 사람들은 단박에 장사꾼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피렌체는 파리가 날리는 텅 빈 도시로 변했을게 아닌가. 물론 르네상스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아내와 나는 미켈란젤로가 피와 땀을 흘린 이 도시를 언제부터인가 가슴에 품고 죽기 전에 딱 한 번 만이라도 살아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당신이 거닐었던 발자취를 따라가 보고 싶었던 것. 피렌체에 둥지를 튼 가장 큰 이유였다.
-다음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생애를 담은 위키백과의 내용을 참고자료로 담았다.
Michelangelo nacque il 6 marzo 1475 [3] a Caprese, in Valtiberina, vicino ad Arezzo, da Ludovico di Leonardo Buonarroti Simoni, podestà al Castello di Chiusi e di Caprese, e Francesca di Neri del Miniato del Sera [4]. La famiglia era fiorentina, ma il padre si trovava nella cittadina per ricoprire la carica politica di podestà [5]. Michelangelo era il secondogenito, su un totale di cinque figli della coppia [4].
I Buonarroti di Firenze facevano parte del patriziato fiorentino. Nessuno in famiglia aveva fino ad allora intrapreso la carriera artistica, nell'arte "meccanica" (cioè un mestiere che richiedeva sforzo fisico) poco consona al loro status, ricoprendo piuttosto incarichi nei pubblici uffici: due secoli prima un antenato, Simone di Buonarrota, era nel Consiglio dei Cento Savi, e aveva ricoperto le maggiori cariche pubbliche. Possedevano uno scudo d'arme e patronavano una cappella nella basilica di Santa Croce [5].
위 자료사진은 지난 3월 3일 아내와 함께 관람한 갤러리아 델라 아카데미아 피렌체에 소장된 미켈란젤로의 작품 '다비드'의 원작 모습이다. 대리석으로 만든 이 작품을 보는 동안 마치 살아있는 섹시한 남자를 보는 듯했다. 신이 존재한다면 악역을 메디치가에 맡기고 미켈란젤로의 손을 빌려 새로운 남자 사람을 창조했다고나 할까. 인간이 신의 형상을 닮았다고 가정할 때 신의 존재가 여전함을 나타낸 걸작으로 여겨진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신은 죽지 않았다. 놀라운 일이자 사람들이 피렌체에 들끓는 까닭이다.
All'epoca della nascita di Michelangelo la famiglia attraversava però un momento di penuria economica [5]: il padre era talmente impoverito che stava addirittura per perdere i suoi privilegi di cittadino fiorentino. La podesteria di Caprese, uno dei meno significativi possedimenti fiorentini, era un incarico politico di scarsa importanza, da lui accettato per cercare di assicurare una sopravvivenza decorosa alla propria famiglia [6], arrotondando le magre rendite di alcuni poderi nei dintorni di Firenze [5]. Il declino influenzò pesantemente le scelte familiari, nonché il destino del giovane Michelangelo e la sua personalità: la preoccupazione per il benessere economico, suo e dei suoi familiari, fu una costante in tutta la sua vita [5].
Continua leggere: https://it.wikipedia.org/wiki/Michelangelo_Buonarroti
이틀 전 더위를 무릅쓰고 미켈란젤로 광장으로 향했다. 정말 따근따끈한 날씨였다. 머리 위로 내려쬐는 볕이 얼마나 따가운지 마치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했다. 시내를 가로질러 일 뽄떼 베끼오 다리(il Ponte vecchio)를 지나 지아르디노 델레 로제를 거쳐 미켈란젤로 광장에 이르기까지 머릿속은 꽁꽁 얼린 차가운 물 생각뿐이었다. 해가 아르노강 저편으로 떨어지면 후다닥 귀가할 생각으로 카메라만 챙긴 게 후회 막급했다.
카메라는 카메라대로 피사체를 바라보는 눈이 이글거리고 있어서 미켈란젤로의 도시가 뚜렷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벌써부터 장사진을 치고 그 유명한 피렌체의 일몰을 구경하러 와글거렸다.
나는 습관처럼 미켈란젤로 광장에 서면 저 멀리 해가 서쪽으로 떨어지는 지점의 벨 베데레(Bel vedere) 쪽 풍경을 너무도 좋아한다. 올리브 나무 숲 속에 병풍처럼 세워(?) 둔 성곽은 중세의 모습을 단박에 떠올릴 뿐만 아니라, 성벽을 따라 이어지는 길은 매우 로맨틱하여 아내가 한눈에 반한 곳이다. 피렌체를 찾으시는 분들이 꼭 한 번 걸어봐야 할 숨겨진 명소인 셈이다. 저 너머로 일몰이 이어지면 그야말로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는 환상적인 풍경이 이어진다.
미켈란젤로 광장에 서면 맨 먼저 바라보이는 풍경이 이런 모습. 인구 40만 명이 채 안 되는 이 도시에 시민들보다 몇 곱절 더 많은 관광객들이 연중 들끓는 이유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도시를 끼고도는 아르노강은 르네상스 시대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겠지..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의 위치는 두오모 쿠폴라 옆 작은 쿠폴라가 있는 산 로렌쪼 성당 메디치 예배당 바로 곁 시내 중심부이다. 죽기 전에 단 한 번 만이라도 살고 싶었던 곳이었으므로 소원을 푼 셈이다.
미켈란젤로 광장에 섰을 때 가장 아름다운 풍경 중에 하나가 베끼오 다리(il Ponte vecchio) 일 것. 구시가지를 둘로 잇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곳. 가까이(베끼오 다리 오른쪽) 우피치 미술관이 보인다. 또 오른쪽으로 600년 세월을 지켜온 베끼오 궁전(palazzo Vecchio)이 삐죽 솟아있다. 그 앞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은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사람들로 붐비는 곳. 참으로 놀라운 도시다.
아직 해가 서쪽으로 떨어지려면 두어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하는데 벌써부터 사람들은 미켈란젤로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피렌체를 반문하는 관광객들이 필수적으로 찾는 명소답다. 나는 이 풍경을 뒤로하고 귀가하기로 마음먹었다. 갈증도 났고 도무지 더위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마냥 행복해하는 거 있지.. 기적 같은 일이자 놀라운 풍경이었다.
귀갓길에 담은 피렌체의 일몰 풍경은 시간을 거꾸로 돌려놓은 듯 아스라하다.
뒤돌아 보니 사람들은 여전히 피렌체의 아름다운 일몰을 기다린다. 아마도 이들 가슴속에는 르네상스를 일군 예술가들이 잠시 쉼을 얻은 후 바라본 하늘을 연상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들, 위대한 예술가들은 불볕더위를 마나 하고 인류의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작품 활동에 땀을 흘리지 않았을까..
우리에게 새로운 종교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정직함'일 것이며 '순수함'일 것. 우리는 먼 여정을 끝으로 피렌체에 둥지를 튼 것인데 사는 동안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것도 반드시 포함되었을 것으로 안다. 세상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일은 사람 사는 세상에서 쉽게 찾기 힘들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하루를 끝내는 저녁나절이면 새로운 희망을 품고 내일을 기다렸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죽기 전에 살아보고 싶었던 도시에 해가 저문다.
Visto da piazzale Michelangelo
Verso a Capoluogo della Toscana FIRENZE
Foto di yookeun Chang_Geograf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