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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그곳 Jun 12. 2021

농부와 풀꽃의 악연(惡緣)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의 6월

아이들은 잠시 후에 들이닥칠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설령 알았다고 한들..?!!



   포스트에 등장하는 사진과 영상을 눈여겨 봐 주시기 바란다. 트랙터 한 대가 밭을 갈아엎고 있는 이곳은 내가 살고 있는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이다. 종려나무가 서 있는 뒤로 보이는 풍경은 바를레티의 항구이며, 좌측으로 등대가 보이고 우측으로 방파제와 함께 끄트머리에 등주가 보인다. 이곳에서 산책 겸 아침 운동을 떠날 때는 방파제 위로 걸어서 끄트머리까지 간 다음 돌아오곤 한다. 


이틀 전 운동을 끝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가끔씩 봐 왔던 농부가 밭을 갈아엎는 풍경이 눈에 띈 것이다. 다른 때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이심전심 풀꽃들이 내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 것일까..(와글와글) 아더찌 안넝히 계떼요..ㅜ)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당장 혹은 5분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시한부 삶을 살아가고 있는 풀꽃들을 바라봤다. 



영상, BARLETTA, COLTIVATORE E CARCIOFO_농부와 엉겅퀴의 악연




그중 엉겅퀴 무리가 눈에 띄었다. 녀석들은 우기가 끝나고 건기가 시작되면서 보라색 꽃을 내놓고 잠시 동면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농부가 트랙터로 밭을 갈아엎는 동안 엉겅퀴들이 긴장하고 있는 풍경.. 이들은 시한부 삶을 농부에게 맡기고 있는 것이다. 농부는 밭을 갈아엎고.. 엉겅퀴들은 얼마 후 다시 새싹을 내놓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 악연의 현장이다. 악연(惡緣)..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말 중에는 인연(因緣)이라는 말이 있다. 인연이란, 원인을 의미하는 불교 용어로 인(因)은 결과를 낳기 위한 내적인 직접적 원인을 의미하고, 연(緣)은 이를 돕는 외적인 간접적 원인을 의미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양자를 합쳐 원인의 뜻으로 사용한다. 인과응보(因果應報) 혹은 사필귀정(事必歸正)은 그렇게 탄생한다는 것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학습했다. 원인이 있기 때문에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트랙터가 한 바퀴 돌 때마다 풀꽃들이 사라지고 있는 풍경이다.


예컨대 행복과 불행도 그러하다는 것이며 불교에서는 인연법으로 말한다. 당신이 전생에 지은 복이 많으면 복을 받게 될 것이며, 선업이나 공덕을 쌓으면 그에 걸맞은 운명을 타고난다는 것이다. 지금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면 전생에 지은 죄업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며,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면 당신이 쌓은 선업이나 공덕 혹은 스스로 지은 복이 작용했다는 말이다. 

다시 5분만 지나면 엉겅퀴들은 사라지게 된다. 5분 동안의 시한부 삶..


이런 경우의 수를 믿던 믿지 않던 그건 자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인리히 법칙(1: 29: 300의 법칙)을 생각하면 수긍이 가기도 한다. 작은 실수 하나가 종국에는 커다란 사고로 이어지는 것. 우리네 삶에는 이런 법칙이 무수히도 존재하며 매시각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군다. 세상은 요지경이라는 말을 단 한 번이라도 들어봤다면 이런 법칙이 작동하고 있다는 말일까..



우리의 운명도 이런 것일까..


그렇다면 자연계와 인간계에도 인연법이 존재할까.. 하는 게 내 앞에 나타난 풍경이 내게 말을 거는 것이다. 인연이었다면, 맛 좋고 몸에 좋은 채소로 농부의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몸에 유익하지 못하다고 판단되는 풀꽃들은 미움의 대상으로 농부를 귀찮게 하는 것이다. (마음의 양식을 잊고사는 것이랄까..) 그래서 어느 날 트랙터를 몰고 나와 밭을 갈아엎는 일이 악연으로 비치는 것이다. 


바를레타 사구(砂丘)의 잘 정리된 농토 1


그런데 이런 풍경이 악연으로 비친 이유는 따로 있다. 이곳은 단 한차례도 농사를 짓지 않은 땅이었다. 두 해 동안 살펴본 결과이다. 처음에는 밭을 갈아엎는 모습을 보면서 "파종을 할 때가 되었거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건기가 물러가고 다시 우기가 찾아와도 농사를 짓는 법이 없었다. 아니 농사를 지을 수가 없는 땅이었다. 트랙터의 갈퀴에 모두 사라진 것 같았던 풀꽃들이 다시 새싹을 내놓고 꽃을 피우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바를레타 사구(砂丘)의 잘 정리된 농토 2


만약 농부가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려면 파종을 한 후 돋아나는 풀꽃(잡초)들을 모두 뽑아야 할 것이다.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최소한 축구장만 한 크기의 1헥타르(3천여 평)에 파종을 했다면, 허리가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이쪽에서 저쪽까지 하루 종일 열심히 뽑고 또 뽑으며 자리를 이동하는 동안 등 뒤에서는 또 다른 새싹들이 고개를 쳐들 것이다. 


바를레타 사구(砂丘)의 잘 정리된 농토 3


그렇다고 야채와 과일 가격이 공짜나 다름없는 이곳 뿔리아 주에서 사람들을 동원해서 품을 팔면 품값도 나오지 않을 게 틀림없다. 바보 같은 짓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곳 바를레타 사구(砂丘)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그곳에는 풀꽃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풀꽃들이 자리 잡을 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시사철 푸성귀들이 잘 자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농부는 왜 기름을 낭비해 가며 풀꽃들을 갈아엎는 것일까.. 아이들이 내게 인사를 건넨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어차피 농사도 안 되고 지을 생각도 없는 땅에.. 풀꽃이라도 잘 살게 내버려 두었으면 싶은 것이다. 그러나 땅 주인의 생각은 달랐다. 잡초 가득한 땅을 그냥 버려두면 체면을 구기는 것이랄까.. 잡초를 싹 갈아엎으면 이방이었던 나처럼 "곧 파종을 하는구나"싶은 생각을 가지게 만들 것이다. 그게 전부이다. 한 사람으로부터 발현된 악연이 풀꽃과 엉겅퀴의 삶까지 나쁘게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궁시렁 궁시렁.. 먼 나라 남의 나라에 와서 오지랖을 떨고 있다. 씩~^^



*얼마 전 브런치가 다리(기타 제안)가 되어 <밴드 페이지>를 개설하게 됐다. 깊은 감사의 말씀 드린다.

Una bella vista del nostro villaggio_BARLETTA
il 11 Giugno 2021, La Disfida di Barletta in Puglia

Foto e scritto di YOOKEUN CHANG_GEOGRAF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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