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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그곳 Sep 29. 2021

그리움 소복한 작은 어항(漁港)

-전설의 바다 아드리아해의 해돋이

남들에게 말하지 못한 작은 그리움..?!



   서기 2021년 9월 24일 아침, 아드리아해의 해돋이 시작을 알리는 환상적인 빛이 바다 위를 뒤덮었다. 아직은 가로등의 간섭 때문에 불분명한 형체가 빛과 어둠 속에 파묻혀있다. 이때부터 대략 30여분 동안 해돋이 그라데이션(Gradation)이 시작된다. 해돋이가 연출하는 명암과 질감과 색조 등이 시선을 사로잡게 만든다.



언제부터였던가.. 나는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 바닷가에서 만날 수 있는 아드리아해의 해돋이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그리고 떼려야 뗄 수 없는 길들여지기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해님과 길들여지기.. 무슨 일이든 처음부터 길들여지는 법은 없다. 먼저 관계를 맺어야 한다.



해돋이가 시작되면 하늘의 별님들은 모두 사라지게 된다. 해님과 달님과 별님.. 그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하늘과 땅 그리고 이 땅 위의 만물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며 서로에게 길들여져 있는 사이이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다. 



한국에서 머나먼 이곳 이탈리아에 첫발을 들여놓을 때만 해도 불완전한 관계가 이어지고 있었다. 누군가 먼저 손을 내밀거나 아는 체를 해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 이탈리아로 날아가는 비행기 속에서 장차 나의 모습을 헤아릴 수 없었다. 대략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계획을 세워도.. 그게 현실로 드러나기까지 걸리는 데는 적지 않은 시행착오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탈리아 요리를 공부하게 된 데도 운명이라는 게 적용되었다. 그냥 우리 음식이 싫어서 이탈리아 요리를 배운 게 아니다. 이탈리아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들이 관계를 맺는데 일조를 한 것이다. 또 다른 대상과 맺어지는 관계.. 그 관계를 맺기 위해 맨 먼저 준비한 게 언어였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의 6070을 지배했던 깐소네(canzone)가 내가 아는 이탈리아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그 노래가 이탈리아와 관계를 맺어주는 작은 실마리였을까.. 이탈리아로 날아가는 나의 가방 속에는 이탈리아어로 또박또박 적어둔 노랫말이 있었다. 노랫말 속에는 한국 사회에서 지천명의 세월이 지나도록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운명의 그림자가 오롯이 녹아있었다. 나를 낳아준 부모님과 조국에 드리워진 숙명 같은 어두운 그림자.. 



그것들은 지천명의 세월을 지나 이순에 접어들어도 변하지 않았다. 해방 이후 대략 70년 동안 우리 사회를 어지럽힌 적폐들.. 나는 그들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다.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더럽히고 어지럽힌 무리들.. 그들이 이탈리아와 관계를 맺는데 일조를 한 것이다. 나의 작은 노트에 적힌 노랫말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넬라 퐌타시아(Nella fantasia)..



Nella fantasia

-Sarah Brightman



Nella fantasia io vedo un mondo giusto.(넬라 퐌타시아 이오 붸도 운 몬도 지우스또)  

Li tutti vivono in pace e in onesta.(리 뚜띠 뷔보노 인 빠체 에 인 오네스따)

환상 속에서 정의로운 세상을 봅니다. 그곳에는 모두가 정직하고 평화롭게 살지요. 



Io sogno d'anime che sono sempre libere. (이오 소뇨 다니메 께 소노 셈쁘레 리베레)

Come le nuvole che volano.(꼬메 레 누볼레 께 볼라노)

나는 항상 자유로운 영혼을 꿈꿉니다.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처럼요.



Pien' d'umanita in fondo all'anima, (삐엔 두마니따 인 폰도 알아니마)

Nella fantasia io vedo un mondo chiaro.(넬라 퐌타시아 이오  운 몬도 끼아로)

영혼 깊은 곳까지 박애로 충만한, 환상 속에서 밝고 맑은 세상을 봅니다.



Li anche la notte e meno oscura. (리 안께 라 노떼 에 메노 오스꾸라)

Io sogno d'anime che sono sempre libere, (이오 소뇨 다니메 께 소노 셈쁘레 리베레)

심지어 그곳은 밤에도 덜 어두운 세상이지요. 나는 항상 자유로운 영혼을 꿈꿉니다.



Come le nuvole che volano. (꼬메 레 누볼레 께 볼라노)

Pien' d'umanita in fondo all'anima. (삐엔 두마니따 인 폰도 알라니마)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처럼.. 영혼 깊은 곳까지 박애로 충만한..



Nella fantasia esiste un vento caldo, (넬라 퐌타시아 에시스떼 운 봰또 깔도)

Che soffia sulle citta, come amico. (께 소퓌아 술레 치따, 꼬메 아미꼬)

환상 속에서 따뜻한 바람이 불어요. 친구처럼 도시 위로 몰려들어요.



Io sogno d'anime che sono sempre libere, (이오 소뇨 다니메 께 소노 셈쁘레 리베레)

Come le nuvole che volano, (꼬메 레 누볼레 께 볼라노)

Pien' d'umanita in fondo all'anima. (삐엔 두마니따 인 폰도 알라니마)

나는 항상 자유로운 영혼을 꿈꿉니다.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처럼요. 영혼 깊은 곳까지 박애로 충만한..


*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넬라 퐌타시아의 원문(노랫말) 옆에는 이탈리아어를 우리말에 가깝게 써 두었다. 이탈리아어 발음은 영어의 발음기호와 유사한 점 참고하시기 바란다. 번역(역자 주)된 노랫말과 영상을 즐감하시기 바란다.




거의 매일 아침 이어지는 아침운동에서 만나는 아드리아해의 해돋이 장면의 순서가 바뀌었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바닷가 산책로를 이번에는 거꾸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매일 마르게리따 디 사보이아 바닷가의 반환점 혹은 해돋이 명소에 다다랐지만 이날은 바를레타 내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우리가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바를레타 내항은 그녀가 한국에 가 있는 동안 무시로 드나들었던 곳이다. 길냥이들이 가득한 내항 곁에서 밤이 오시면 몽유병자처럼 바닷가로 향하곤 했다. 그녀가 아침을 깨울 시간에 나는 초인종이 된 것이다. 그렇게 관계를 맺고 밤이면 밤마다 내항에서 찰랑대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그녀와 통화를 나누곤 했다. 



매일 나누는 통화..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어떤 때는 1시간이 넘도록 바닷가에 머물곤 했다.



관계를 맺으면..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 이처럼 달라진 나를 당신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게 그리움이란 것을 알 때쯤 그녀는 로마의 피우미치노 공항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까지만 해도 코로나가 극성을 부릴 때가 어니어서 공항 입국장에서 마스크를 착용한 건 그녀뿐이었다. 당시에는 자동차를 마련하지 않은 때여서 우리는 기차를 이용하여 한밤중에 바를레타 역에 하차를 하고 도시를 가로질렀다. 사람들의 통행이 뜸한 한밤중.. 그때가 2020년 2월 23일이었던가..



운명이란 참 묘한 법이다. 누구도 당신의 앞길을 알 수 없는 것. 아드리아해의 해돋이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수평선 너머에서 떠 오르는 것과 달이 사람들의 운명은 엉망진창이었다. 변덕이 심했다. 장난꾸러기였다. 



한국에서 창궐하던 코로나를 피해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녀 앞에 이탈리아의 코로나 19는 가혹했다. 매일 수천수만 명의 확진자가 발생했고 수백 병 이상의 사망자가 뉴스를 도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불안해 하기 시작했다. 태생적으로 면역력이 약했던 그녀는 결국 다시 한국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이번에는 지난번과 달랐다. 피렌체서 한국으로 돌아갈 때는 로마까지 동승했지만, 이번에는 멀고 먼 길을 택했다. 생전 처음으로 3000km가 넘는 왕복길을 운전했다. 바를레타에서 이탈리아 중북부를 가로질러 스위스를 거쳐 다시 독일의 프랑크 푸르트까지 머나먼 길을 떠났던 것이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에 큰 병을 얻은 것처럼 아찔하다.



먼길.. 나는 그 여행을 일러 '별리 여행'이라 대못을 박았다. 운명은 그런 것인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생각과 우울이 찾아들었다. 그때 스위스의 한 호숫가에는 가을비가 추적추적 차량하게 내리고 있었다. 차창에는 비가 억수로 쏟아부었다. 



생전 처음으로 사는 게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덧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는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더 낫다"라는 위험한 생각까지 끼어들곤 했다. 두 번의 별리를 통해서 '길들여지기'가 얼마나 무섭고 행복한 일인지 알게 된 때는 시간이 좀 더 경과한 때였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리워할 수 있다는 건 행운이자 큰 복이었다.



바를레타 내항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하니는 앞서거니 뒤서거니를 반복했다. 지난 8월 11일 이탈리아로 다시 돌아온 그녀도 아드리아해의 해돋이에 길들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른 아침 해님이 선물하는 해돋이 풍경에 길들여지면 휴대폰의 셔터가 몸살을 앓곤 한다.



빛과 그림자.. 앞선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언제인가 다시 서로 다른 공간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어느 날 그녀와 내가 원치 않았던 시공에 놓였던 것처럼, 세상은 까만 밤과 발그레한 아침을 동시에 품고 있을까..




그리움 소복한 작은 어항(漁港)




그 바닷가 어항에는 아직 해님이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호수보다 더 잔잔한 바를레타 내항은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었고 실 같은 파도에 겨우 미동하고 있었다. 그리움 소복한 작은 어항..



이곳이 정녕 내가 꿈꾸던 넬라 퐌타시아였을까..



환상 속에서 정의로운 세상을 봅니다. 그곳에는 모두가 정직하고 평화롭게 살지요.

나는 항상 자유로운 영혼을 꿈꿉니다.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처럼요.

영혼 깊은 곳까지 박애로 충만한, 환상 속에서 밝고 맑은 세상을 봅니다.

심지어 그곳은 밤에도 덜 어두운 세상이지요. 나는 항상 자유로운 영혼을 꿈꿉니다.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처럼.. 영혼 깊은 곳까지 박애로 충만한..

환상 속에서 따뜻한 바람이 불어요. 도시 위로 친구처럼 몰려들어요.

나는 항상 자유로운 영혼을 꿈꿉니다.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처럼요. 영혼 깊은 곳까지 박애로 충만한..



저만치 등대가 장승처럼 버티고 서 있는 풍경은 익숙했다. 작은 어항에서 바라보는 해돋이뿐만 아니라 해넘이는 서로 닮아있었다. 한 번은 동쪽에서 한 번은 서쪽에서 번갈아가며 고루 세상을 비추곤 했다. 그때마다 등대는 반짝반짝 눈만 깜박거리고 작은 배들은 어깨를 넘실대곤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랴..



그땐 너희들이 나와 관계를 맺고 있었지.. 너희들이 더 그리웠어..



그렇지만 지금은 달라. 달라도 한참 달라. 매일 아침 환상을 실어다 주는 해님처럼 그녀가 곁에 있어..!



나는 그녀가 휴대폰에 담고 있는 작은 어항과 해님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세상 참 희한한 일이다. 내 곁에 한 사람이 더 늘었을 뿐인데 나의 시선은 한 곳에 머물고 있는 게 아닌가. 그게 그리움의 실체라니.. 



어디로 떠나는 것일까.. 해님이 바를레타 내항 위로 얼굴을 내밀 때 작은 보트가 출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영상, BARLETTA, L'alba del leggendario Mare Adriatico_그리움이 소복한 작은 어항(漁港)




나는 그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죄송하지만 보트 가격이 얼마인지 알고 싶은뎁쇼?"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중고 보트는 대략 3천~4천 유로 정도 합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다시 " 그럼 새 보트는 얼마나 해요?"라고 물었다. 그는 "9천 유로 정도요"라고 말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음에도 싫은 내색 한 번 안 하고 대답을 해 주는 사람들.. 지난 한 주는 바쁘게 지냈다. 현지에서 볼 일을 보면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때마다 그녀의 표정이 해돋이처럼 환하다.



"이곳에는 정직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L'alba del leggendario Mare Adriatico_Un piccolo porto di pescatori
il 28 Settembre 2021, La Disfida di Barletta in Puglia

Foto e scritto di YOOKEUN CHANG_GEOGRAF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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