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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그곳 Aug 08. 2019

엄마의 밥상은 위대한 전설

#27 이탈리아인들의 건강 장수 비결 


여러분들에게 어머니는 어떤 분으로 기억될까..?



아내와 함께 방문한 이탈리아 요리 유학 실습 장소


지난해 여름 정확히 이맘때(2018년 8월 6일), 아내와 나는 피렌체의 한 리스또란떼 샬레 폰타나(Chalet Fontana)를 방문했다. 우리가 이탈리아에 둥지를 틀기로 결심한 직후 이탈리아로 건너와 맨 먼저 방문한 곳인데, 이곳은 글쓴이('나'라고 한다)가 이탈리아 요리 유학 당시 땀 흘리며 일했던 요리 실습 현장이었다. (표지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토스카나 주의 풍경을 그대로 옮겨둔 듯한 빼어난 풍광은 피렌체에서 손꼽히는 명소답게 연중 사람들로 붐비곤 한다. 

대략 12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 리스또란떼에 들어서면 깔끔하게 잘 정리된 잔디밭은 물론, 정원에는 올리브 나무와 함께 신선한 야채와 허브가 재배되는 곳. 그 가운데 작은 분수가 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테라스 혹은 정원에 꾸며진 창이 넓은 파라솔 밑 테이블에 앉으면 여간 편안할 수 없다. 특히 해질 녘 풍경은 가히 환상적이다. 저녁시간(Cena)이 시작될 때쯤이면 손님들은 좋은 자리를 골라잡고 밤늦도록 음식을 즐기며 대화에 열중한다. 



피렌체로 요리 실습을 떠난 이유


샬레 폰타나의 주인은 피렌체의 유명인사였으므로 이곳을 찾는 손님들 다수는 단체손님이 많았다. 또 살롱에서는 연증 각종 문화행사가 치러지고 있었으므로, 손님의 수만큼 꾸치나(Cucina)는 바쁠 수밖에 없었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늦깎이 요리 실습생도 덩달아 바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요리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초보 실습생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몇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내겐 경우의 수 중에 행운을 거머쥔 것이나 다름없는 일들이 시작됐다. 



보통은 요리학교에서 (우리나라) 학생들이 실습 장소를 택할  미슐랭 별이 있는 유명한 리스또란떼를 선호한다. 젊은 학생들이 경력을 쌓을 때 "유명 리스또란떼에서 일했어요"라고 말하면 당신의 몸값(?)을 더 쳐주기를 바라는 것 때문이랄까. 하지만 당시의 나는 미슐랭 보다 두 마리 토끼를 겨냥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요리 유학을 통해서 이탈리아에 자리를 잡고, 기회가 닿으면 피렌체에 작은 리스또란떼(Trattoria)를 경영하고 싶었던 것이다. 


따라서 유명 리스또란떼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일단 피렌체에 위치한 리스또란떼면 무조건 동의할 마음이었다. 물론 아내와 여러모로 의견을 나눈 끝의 결정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내게 행운이 찾아온 것이며 이때부터 호된 신고식이 동시에 치러지기 시작한 것. 나는 이곳에서 군대생활은 비교도 안 되는 힘든 경험을 통해 요리사의 길 혹은 셰프가 되는 길은 결코 쉽지 않음을 알게 됐다. (위 자료 사진은 지난해 이맘때 샬레 폰타나를 함께 방문한 아내의 모습. 내가 좋아했던 정원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본문에 삽입된 자료 사진들은 지난해 8월 6일에 촬영된 것들로 샬레 폰타나의 전경을 담았습니다.



머나먼 요리사의 길


나의 하루 일과는 점심(il Pranzo) 준비를 위해, 아침에 출근하는 즉시 작은 바구니를 들고 정원에 나가 허브를 채집해 오는 일이 시작이었다. 허브를 채집하는 일은 정말 기분 좋은 일이었다. 따가운 아침 햇살을 받으며 정원에 나가 띠모, 로즈마리노, 살비아 등을 적당량 채집해 오는데 어떤 때는 빨갛게 익어가는 딸기를 따 먹기도 했다. 특히 허브를 채집할 때 손에서 묻어나는 향기는 최고였다. 내 생애 이런 날도 있었나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이때가 요리 유학 중에서 제일 행복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잠시 잠깐 체험하는 일일뿐 내게 주어진 일은 나를 벅차게 만들었다. 실습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어느 날 셰프가 나에게 일을 맡겼다. 내게 빠스띠체리아(Pasticceria) 리체타를 알려주며 "빵을 만들어 보라"는 것. 그동안 이 일은 셰프가 주로 했던 일인데 어느 날 수 셰프가 공석이 되면서부터 셰프의 손이 바빠 일을 내게 맡긴 것이다. 

당시 샬레 폰타나에서 손님들이 주로 먹던 빵은 수제품으로 빠네 디 까쁘레제(il pane di caprese)였다. 빵의 내용물은 매우 단순하지만 담백한 맛이 일품이어서 어떤 음식과도 잘 어울리는 맛있는 빵이었다. 


그런데 하루에 소모되는 빵의 양만큼 미리 만들어 두어야 했으므로 한 번에 만드는 양은 만만치 않았다. 빵을 반죽하기 전에 재료를 일일이 정확히 계량한 다음 반죽하여 손으로 하나하나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다. 이런 과정으로 만들어진 빵은 급랭기에 넣어 얼린 후 냉동고에 보관했다가, 사용할 때 해동하여 오븐에서 노릇노릇 맛있게 구워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이 만만치 않았다. 나는 반죽을 하면서 또 빵을 만들면서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조리복이 흥건히 다 젖었다. 또 얼굴은 연신 땀이 줄줄 흐르는 것. 이런 일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 뜨거운 여름날 꾸치나 안에서 행해지는 일은 사우나가 전혀 비교가 안 될 정도라면 믿기시는가. 



눈에 띄게 달라진 초보 요리사의 모습


이 같은 모습을 본 셰프가 어느 날 내게 다가와 "프란체스코, 괜찮아요?"를 연신 되물을 정도였다. 당시 나의 이탈리아 이름은 프란체스코였는데 이때부터 프란체스코의 주가는 상승하기 시작했다. 꾸치나 내부의 다른 파트에서 왜 이 일을 마다했는지 알 수 있었다. 모두가 기피하는 일이었다. 그때부터 셰프의 신임이 두터워지기 시작했다. 


셰프는 당신이 알고 있던 소중한 리체타를 내게 전수해 주는가 하면 다른 파트와 구별된 일을 내게 주문하는 것이다. 섬세한 손길이 가는 요리 세팅(주로 셰프가 한다) 또한 내 몫이 되어 다른 파트의 녀석들이 시샘을 할 정도였다. 또 이때부터 빵 만드는 일은 내 몫으로 자리 잡아 셰프가 눈짓만 해도 빵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인 것을 눈치챌 정도였다. 셰프는 독일인 젊은 미혼 여성이었는데 백발의 나에게 힘든 일을 시키는 게 미안했던지 나중에는 미안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어느 날 셰프는 스텝들이 모인 곳에서 날더러 제빵 달인(Panettiere 혹은 Panista)이라고 불러주었다. 맨 처음 빵을 만들 때 2시간 30분이 소요됐다면,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30분 남짓이면 당일 분량을 모두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마치 기계로 찍어낸 듯 똑같은 모양의 빵들이 두 손 안에서 연신 쏟아져(?) 나왔다. 이때부터 동료들의 신임이 두터워졌다. 초보 요리사의 과정을 잘 소화해 낸 모습을 보며 마음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스텝들과 아침을 함께 먹는 자리에서 재밌었지만 가슴 먹먹한 일이 생겼다. 



엄마의 밥상은 위대한 전설


리스또란떼의 하루 일과는 보통의 직장과 사뭇 다르다. 보통 직장에서는 출근 이후 점심을 먹고 저녁시간이 되면 퇴근을 하는 게 일상이다. 규정상 하루 8시간 정도만 일하면 하루 일과는 끝나는 것. 하지만 리스또란떼의 일과는 달랐다. 하루 두 번의 휴식시간 빠우사(Pausa_break time)가 주어진다. 점심 준비를 끝마치고 한 번, 저녁 준비를 끝마치고 한 번, 짧게는 2시간 길게는 서너 시간의 휴식시간을 갖게 되는 것. 휴식시간은 참 달콤하다. 잠시 쉼을 얻거나 볼 일을 볼 수 있는 시간인 것이다. 


그런데 유학 중인 내게는 이런 관행이 불편할 때가 너무도 많았다. 빠우사가 시작되는 즉시 쉬는 공간으로 이동해야 했지만, 샬레 폰타나로부터 숙소가 위치한 피렌체 중심가까지 이동하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하루 네 번씩이나 차를 갈아타는 일정이 귀찮은 정도가 아닌 것. 다행인 건 사나흘 만에 돌아오는 릴레이 휴식이었다. 하루 반나절 동안 꿀맛 같은 휴식을 얻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와 달랐던 식탁문화가 불러일으킨 오해


이런 일상이 반복되던 어느 날 아침 대략 12명의 스텝들과 아침을 함께 먹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마치 누군가에게 호된 꾸지람을 당하고 식탁 앞에 앉은 분위가 같은 매우 서먹서먹한 분위기이자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식탁이었다. 그때 살롱의 서열 두 번째 웨이터(Cameriere)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질문을 했다.,


"프란체스코, 무슨 불편한 일이나 기분 나쁜 일 있으세요..?"

".. 왜?"

"아무런 말씀이 없으셔서요."

"..!!"


나는 그제야 식탁 분위기가 이상한 걸 눈치챘다. 이탈리아인들은 우리나라의 식탁문화와 달라도 한참 달라서 이른바 '밥상' 앞에서 미주알고주알 할 말 못 할 말 다 늘어놓으며 깔깔대면서 식사를 했다. 내겐 별로 익숙하지 않은 문화여서, 그때마다 거의 입을 다물고 밥(?)만 먹고 제자리(꾸치나)로 돌아갔다. 그게 문제의 발단이었다.


그런데 이런 문화를 잘 이해하지 못한 어린 스텝들(30살 내외)이 자기들끼리 무슨 잘못이 있었나를 반성한 후에, 대표로 한 녀석이 나의 기분을 케 물은 것이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노! 노!!"를 외쳐가며 동서양 혹은 우리 집과 서로 다른 식탁문화 설명에 들어갔다. 녀석들은 아침을 먹다 말고 나를 빤히 쳐다보며 설명을 경청했다.




어머니의 성스러운 공간 


어릴 적 우리 형제자매 7남매가 살던 집은 디긋(ㄷ) 자 형태의 납작한 기와집이었다. 집은 남서향으로 뒤뜰로 출입할 수 있는 집이었는데, 해 질 녘 툇마루에 앉으면 저녁노을이 유난히도 아름다운 집이었다. 어머니께선 가끔씩 부엌문을 나서자마자 물끄러미 노을을 바라보시곤 했다. 


부엌을 나서면 작은 계단 옆으로 화단이 있었는데 어머니와 누님이 그곳에 쪼그리고 앉아 대화를 나누시곤 했다. 여름이 되면 나팔꽃들이 처마 끝까지 대롱대롱 매달리던 화단을 지나면 우물이 나오고, 그 옆으로 크고 작은 장독들이 수북한 장독대가 있었다. 어머니의 동선은 대략 여기까지였다. 


부엌에서 나와 우물을 지나면 장독대까지 이어지는 작은 공간. 가끔씩 외출이나 모임을 나가시는 일 외에 어머니의 삶은 이 작은 공간에서 모두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 누구 하나 이 공간을 침범하는 법이 없었다. 당신께선 이 공간의 침입(?)을 좋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남자들이 많은 우리 집안의 분위기 때문에, 그나마 출입은 할머니와 누님과 숙모님 등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린 녀석들의 밥투정


부엌에 들어서면 왼쪽으로 작고 큰 솥단지가 놓여있었는데 불쏘시개 와 장작이 작은 더미를 이루고 함께 있었다. 어머님이 자주 사용하시는 솥은 큰 가마솥이었는데 우리 집에는 안팎으로 두 개의 가마솥이 걸려있었다. 장독대 옆에 걸려있던 가마솥은 보다 많은 양의 음식을 끓일 때 사용하던 것으로, 이를 테면 시래기를 삶는 일이 이에 해당됐다. 그리고 부엌의 가마솥은 우리 식구들이 먹는 밥을 짓는데 주로 사용됐다. 


부엌은 안방으로 연결되는 작은 문이 있었는데 부엌에서 음식을 모두 장만하면 안방에서 상을 펴 놓고 상을 차리는 구조였다. 지금 생각해도 기적 같은 일이 매일 반복되었다. 작은 문으로 공수된 음식들은 우리 식구들이 빙 둘러앉아 먹곤 했다. 그런데 밥을 먹는 동안 나를 포함한 어린 동생들의 밥투정이 이어진 것이다. 당시 어머님이 만드신 밥상은 아이들의 눈높이에선 초라했다. 된장찌개와 김치는 하루도 빠지는 날이 없는 단골 차림표였다. 


그리고 온갖 풀이란 풀(?)은 매일 같이 상에 올랐다. 집 뒤뜰 텃밭에서 키운 상추며 배추며 열무며 호박닢이며 아주까리 잎까지, 또 산나물은 어디서 케 오셨는지 밥상은 온통 풀밭(?)이었다. 또 된장찌개에 든 멸치는 왜 그렇게 크고 된장 맛은 내 입맛에 짠지, 밥상 앞에 앉은 어린 나는 불만투성이였다. 형들과 누님은 조용한데 유독 나와 어린 동생들의 불만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위 자료 사진은 글쓴이가 매일 아침 허브를 채집하던 샬레 폰타나의 아름다운 정원 풍경



엄마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직함


그나마 이런 불만을 재운 건 종가의 관행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1년 열두 달 내내 제사 아니면 명절이 이어졌던 것 같은데, 이때 상 위에 오르는 음식은 그야말로 한식이자 궁궐 음식이나 다를 바 없었다. 제삿날이나 명절이 다가오면 어머니의 공간에 듣보잡 생선이나 과일 육류가 가득 널렸다. 어떤 생선은 소금을 쳐 말리고 산적을 뜬 생선이나 고기는 부엌의 천장에 매달려있거나 그늘진 곳에서 구득 구득 말라가고 있었다. 어린 녀석들이 이때만 되면  "엄마, 언제 제삿날이야?" 하며 잿밥에 눈이 어두워 침을 잴잴 흘리며 제삿날이나 명절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 


그동안 어머님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셨다. 어머니의 차림은 늘 치마저고리에 앞치마를 두르고 머리에는 수건을 쓰셨는데 어머님이 일손을 놓을 실 때까지 이런 모습은 여전하셨다. 하루 삼시 새끼를 준비해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했는데 마치 군대의 대규모 주방 같은 일이 매일같이 반복됐다. 그런데 어머님이 단 한차례라도 편히 쉬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렇게 초인적 삶을 사신 어머니의 부엌은 늘 정갈했고 밥 한 톨 떨어진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어쩌다 학교에서 돌아와 어머니가 궁금해(밥이 궁금했겠지) 부엌문을 열어보면 어머님은 정화수를 떠다 놓고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리시고 계셨다. 자나 깨나 새끼들이 잘 되기를 비는 엄마의 기도.. 어릴 때 그게 무슨 일인지 알 수없었지만 매우 성스러운 일이란 걸 느꼈다. 또 그 더운 날씨에 선풍기 한 대 없는 부엌에서 7남매와 가문을 위해 삼시 새끼를 꼬박 챙겨 먹였으니 그 은혜를 어찌 다 갚을 수 있었겠는가.. 요리 실습을 할 때 흘린 땀이나 수고는 어머님의 삶에 전혀 비교가 될 바가 아니었다. 그것도 제가 좋아서 했던 일이지 누구를 위한 일이었겠는가. 


그나마 요리학교에서 배운 이론과 실습 등을 통해서 요리사는 아무나 될 수 있지만 셰프는 누구나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건 천만다행이었다. 셰프는 그저 요리를 잘하는데 그치지 않고 특정 리스또란떼의 살림을 도맡아 해야 한다. 매일 수 십 명 혹은 수백 명의 손님들이 찾아와 잔치집을 연상케 해도 눈 하나 깜빡하는 일 없이 매끈하게 업무를 처리한다. 또 당신이 만들어 내는 음식은 가족이나 손님을 살찌울 뿐만 아니라 음식을 통해 대자연에 감사하는 법까지 자연스럽게 가르치는 것. 신성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당신의 공간은 생각보다 넓지 않고 땀 흘리고 수고하는 일만큼 보상도 받지 못한다. 마치 성자 같은 삶을 요구하는 게 셰프의 세계라고 관련 브런치에 언급하기도 했지만 턱 없이 부족한 설명이었다. 따라서 어머니의 삶은 너무 숭고한 나머지 성스러운 셰프의 삶을 연상케 하는 것으로 어머니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직함처럼 여기기도 했다. (어머님은 남들처럼 평범한 여성의 삶을 살고 싶었을 것이다. 어머니 죄송합니다.ㅜ)



어린 녀석들의 밥투정이 남긴 깨달음의 현장


그러나 어릴 때 어머니의 이 같은 모습은 가슴에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세월이 한참이나 지낸 어느 날, 철이 들고 난 다음부터 당시의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애잔했던 당신의 삶이 떠오르는 것. 그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지며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속을 불편하게 만든 사건들이 연이어 등장하는 것이다. 부엌에서 안방으로 옮겨진 상 앞에서 음식 투정을 부리는 어린 녀석들 앞에 어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지는 것. 이 장면이 요리 실습 현장의 살롱에서 벌어진 해프닝이자, 너무 가난했던 우리나라 혹은 1960년대 우리 집 식탁문화의 한 모습이었다. 이랬지..


: (인상을 팍 쓰며) 엄마 된장(찌게) 너무 짜!

엄마: (조용히) 그냥 먹어..

: (다시 한번 더 인상을 써가며) 김치도 너무 짜!

엄마: (엄마의 표정이 심상찮다) 그냥 먹으라니까!

: (볼멘소리로) 왜 우리 집에는 맨날 상추 하고 풀뿐야?!

엄마: (화난 표정으로) 밥 먹기 싫으면 숟가락 놔!!

: (찌질 대며) 흑흑.. 짜다니까요.ㅜ

엄마: (군밤으로 툭 쥐어박으며) 밥이나 먹어!

: (울면서)네.. 흑흑!


대략 이때부터 밥상 앞에 앉으면 밥이나 먹지 구차한 이야기들은 오가지 않는 것. 설명이 장황하게 이어진 스텝들과의 아침식사는 기분 좋게 끝났다. 그다음부터 살롱에서 먹는 아침 식사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식탁 앞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로 주절대며 떠드는 녀석을 겨냥하여 이렇게 말했다. 여러 주문을 하지도 않고 이름만 불렀는데 녀석은 이렇게 대답했다.


: 마르코!

마르코: 넵! 밥이나 먹어!!


글을 끼적거리다가 짜디짠 된장찌개와 어머님이 그리워졌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현대의 이탈리아 요리가 아니라 어머님이 손수 차려주신 음식이 너무 그리운 것. 우리가 삶을 지탱할 수 조차 없을 만큼 힘들었던 시절, 상 위에 내놓았던 음식들은 당신의 모든 것을 내놓은 그야말로 위대한 밥상이었다. 


그 깨달음의 현장에 아내와 함께 방문하며 아내의 노고를 동시에 기린 것이다.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어머니의 손 마디마디는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가락을 닮았다. 온통 불거진 손마디마다 우리 7남매의 삶과 종가의 전설이 오롯이 맺힌 것. 이탈리아 요리 유학의 힘든 과정이 없었으면 고스란히 묻힐뻔한 어머님의 전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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