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내가 꿈꾸는 그곳 Nov 22. 2021

신(神)의 간섭과 탄성지른 해넘이

-미켈란젤로의 부활과 무궁화 꽃_해넘이 편

무. 궁. 화. 꽃. 이. 피. 었. 습. 니. 다!!



사람들이 한 곳에 앉아 일제히 한 곳을 응시하는 곳..



그곳은 미켈란젤로의 도시 퓌렌쩨의 서쪽 언덕에 위치한 미켈란젤로 광장 맞은편 정서 쪽에 있는 언덕이다. 조금 전 해넘이가 시작되면서 사람들이 탄성을 자아내고 있다. 한국인은 물론 세계인들이 한 곳에 모여있다.



그곳에 가면 누구나 해넘이를 사랑하게 된다.. 왜 그럴까?



뽀르따 산 지오르지오(Porta San Giorgio)가 위치한 언덕 너머로 해넘이가 시작되면서 아름다운 실루엣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곳에 모여든 사람들은 이미 퓌렌쩨 시내 중심에 산재한 르네상스 시대 때의 유물을 답사한 사람들이다. 그곳에는 불세출의 영웅이자 예술가인 미켈란젤로가 포함되었음은 물론이다. 지난 여정에 그의 생애를 잠시 돌아봤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는 1475년 3월 6일 아레쬬(Arezzo)에서 가까운 봘티베리나(Valtiberina)의 까프레세(Caprese)에서, 레오나르도 부오나로티 시모니의 루도비코(Ludovico di Leonardo Buonarroti Simoni)로부터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플로렌티나(Firenze, 이하 '퓌렌쩨'라 읽는다.) 사람이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뽀데스타(Podestà)의 정치적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마을에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5명의 아이들 중 둘째 아이였다.



퓌렌쩨의 부오나로티는 이 지역 귀족들의 일부였다. 그때까지 가족 중에는 어느 누구도 그들의 지위에 걸맞지 않은 '기계적(meccanica)' 예술(즉, 육체적인 노력이 필요한 기술)에서 경력을 쌓지 않았다. 2세기 전, 그의 선조인 시모네 디 부오나로타(Simone di Buonarrota)는 첸토 사뷔 회의(Consiglio dei Cento Savi)에 참석해 공직에 있었다. 그들은 공적인 무기의 방패를 가지고 있었고, 바실리카의 성 십자가의 예배당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가 태어났을 무렵에 가족들은 경제적 궁핍을 겪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너무 가난해서 퓌렌체 시민으로서의 특권을 잃을 뻔했다. 퓌렌체서 가장 중요한 땅 중 하나인 카프레세의 뽀데스떼리아(podesteria di Caprese)는, 그의 가족의 적절한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그가 받아들인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정치적 임무였다. 


그들의 선택은 가족의 운명과 젊은 미켈란젤로의 운명은 물론 그의 성격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가족과 경제적 문제에 대한 우려는 그를 평생 동안 따라다녔다. 



하늘은 우리 행성 최고의 예술가에게 영광을 허락하는 대신 가난을 물려주었다. 그는 자라는 동안 대리석 가루가 섞인 우유를 유모로부터 받아 마셨다. 예술의 여러 장르 중에서 그가 조각을 택한 이유가 대리석 가루가 섞인 우유 속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더 이상 풍요로울 것도 없는 세상에서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그에게는 일상이 되었던 시대.. 퓌렌쩨를 찾는 사람들은 그에게 일어난 이런 일들 외에도 숱하게 공유되었을 것이다. 특히 SNS가 발달한 요즘에야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래서 사람들이 미켈란젤로의 도시를 방문하면 해 질 녘 반드시 들리는 곳이 광장 한쪽에 마련된 계단이 아닌가 싶다. 그곳에서 산 지오르지오 언덕 너머로 자취를 감추는 해넘이를 보면서 미켈란젤로를 그리워하며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는 것이다. 그들 앞에는 곧 미켈란젤로가 바라봤던 해넘이의 장관이 연출될 것이며 당신이 부활한 것처럼 느끼게 될 것이다. 최소한 7년 전 내게 일어난 사건은 이러했다.


무. 궁. 화. 꽃. 이. 피. 었. 습. 니. 다!!



나는 미켈란젤로 도시 퓌렌쩨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오르면 으레 위대한 예술가들을 떠올리는 한편 종국에는 어린 미켈란젤로를 떠올리는 것이다. 한 번 본 적도 없고 먼 나라에 살았던 사람이지만 이 도시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그를 생각하는 시간이 점차 늘어나는 것이다.



퓌렌체를 빛낸 예술가들은 미켈란젤로 외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라퐈 산찌오 다 우르비노엘로(Raffaello Sanzio da Urbino)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갈릴레이 갈릴레오(Galileo Galilei), 단테 알레기에리(Dante Alighieri), 니꼴로 마키아 벨리(Niccolò Machiavelli) 등 예술 문학 철학 과학 어느 장르든 출중한 이름들이 나열되는 것이다.



인구 30만의 도시 퓌렌쩨.. 한 때 퓌렌쩨 공국은 메디치 가문의 등장은 물론 몰락과 무관하지 않았다. 메디치가는 15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는 동안 퓌렌체 공국을 지배했고, 3명의 교황과 2명의 프랑스 왕비를 낳기도 했다. 3명의 교황이 메디치 가문에서 나왔다는 건 요즘으로 치면 정경유착의 산물일까.. 



권력의 정점에 교황청이 있었으며 너도 나도 교황청에 줄을 대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가 가운데 메디치 가문이 키워낸 예술가들 다수는 주로 성화를 그리며 아부를 일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우피치 미술관(Galleria degli Uffizi)에 발을 들여놓으면 맨 먼저 만나게 되는 당시의 작품들이 그러했다. 몇몇 작품들은 수태고지(Annunciatio, 受胎告知)처럼 도드라졌지만, 색이 바랜 듯 대체로 우중충했다. 숙제처럼 해치운(?) 작품들이 감동을 주지 않는 것이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었다.



나는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미켈란젤로를 생각했다. 그는 성당의 천정화는 물론 관련 조각 작품을 그리거나 만들 때마다 남들이 전혀 상상하지도 못하는 작품을 만들었다. 나는 그를 하늘에서 보낸 신의 대리인으로 생각하곤 했다. 인간이 도무지 범접할 수 없는 영역에 그가 서 있던 것이다. 


무. 궁. 화. 꽃. 이. 피. 었. 습. 니. 다!!



   서기 2021년 11월 21일 (현지시각), 우리가 살고 있는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는 맑은 날씨며 기온은 15도씨의 일요일 저녁나절이다. 해가 떨어지자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시내에 위치한 가게들은 알베로 디 나탈레(albero di Natale, 성탄 트리)를 걸어놓았다. 곧 성탄을 알리는 12월이 도래할 것이다. 12월의 이탈리아는 상상 이상의 성탄 트리가 등장하며 성자를 기리게 된다. 지금 미켈란젤로 광장에 앉아있는 세계인들 중에 서구인들은 주로 그런 문화 속에서 자란 사람들이랄까..



사람들의 관심사 중에는 신(神)을 빼놓을 수가 없다. 그들이 내세에 관심이 있어서라기 보다 당신의 삶에 깊이 관여하는 게 신의 존재이며 신을 통해 보다 더 큰 행복을 느끼게 될 것이다. 당신은 그저 신의 도구가 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상이자 삶의 형태.. 



6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어린 미켈란젤로는 석공의 마을에서 유모 손에 자라며 대리석 가루가 섞인 우유를 받아먹고 자랐다. 가난의 모습은 얼마든지 상상이 가능하다. 유모의 손에서 자란 그였지만 실상은 신의 손에 맡겨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유년기 때부터 연단이 시작되었다고나 할까.. 어린 미켈란젤로의 손에는 망치와 정이 들려있었다. 하루 종일 대리석을 만지작 거리며 소일하는 것이다.



다시 돌아본 미켈란젤로의 유소년기(1475-1487)는 이랬다. 


어느덧 3월 말, 루도뷔코 부오나로티(Ludovico Buonarroti)는 학기가 끝난 후 퓌렌쩨의 세띠냐노(Settignano)로 돌아갔을 것이다. 아마도 나중에는 븰라 미켈란젤로( Villa Michelangelo)로 불렀을 것이다. 세띠냐노는 수세기 동안 퓌렌쩨에서 귀중한 건축에 사용된 라 삐에뜨라 세레나(la pietra serena, 세레나 돌)를 추출했기 때문에 석공의 마을(un paese di scalpellini)로 불리었다.



또 미켈란젤로의 유모는 석공의 딸이자 아내였다. 어느 날 유명한 예술가로 성장한 미켈란젤로는 왜 그가 다른 예술보다 조각품을 더 좋아했는지 설명하면서 "조각가와 석공"의 나라에서 왔는지를 정확히 상기시켰다.


"대리석 먼지와 섞인 우유"

«latte impastato con la polvere di marmo»



1481년에 미켈란젤로의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당시 그는 겨우 6살이었다. 이 아이의 학교 교육은 우르비노의 인문학자 프란체스코 갈라떼아(Francesco Galatea da Urbino)에게 맡겨졌고, 그는 이 아이에게 문법을 가르쳤다. 그해에 그는 친구 프란체스코 그라나치(Francesco Granacci)를 만났고, 그는 그림 속에서 그를 격려했다.



귀족 가문들의 까데띠(cadetti, Cadetto의 복수형_사관 교육)는 보통 종교적이거나 군사적인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아주 어릴 때부터 강한 예술적 경향을 보여왔다. 이것은 아스까니오 공유의 전기(biografia di Ascanio Condivi)에서 보듯, 예술가의 협조로 작성된 것으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아버지의 방해로 기억된다. 하지만 그것은 아들의 영웅적인 저항에 의해 무산되고 만다. 


무. 궁. 화. 꽃. 이. 피. 었. 습. 니. 다!!



인간과 신의 일은 같을 수가 없으며 간혹.. 어쩌면 대부분 인간의 요구에 신의 응답은 전혀 다른 것 같다. 당신의 아버지와 가문에서 미켈란젤로가 예술가의 길에 나서는 것을 극구 말리고 훼방 놓으며 협박까지 했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그 일에 대해 누군가 묻게 되면 "대리석 가루가 섞인 우유를 먹고 자라서 그랬다"는 등의 핑계 아닌 핑계를 대는 것이다. 



하늘은 일찌감치 퓌렌체 공국의 석공 마을에 미켈란젤로를 심어두었던 것이랄까.. 사람들이 자기밖에 모르고 돈에 미쳐 날뛰며 종국에는 신앙심까지 저울질하는 패륜을 거듭하자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르네상스(Rrinascimento, 리나쉬멘또)라 불렀지만, 실상은 신이 모습을 드러낸 시대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말 안 듣기로 유명한 인간들에게 신의 존재를 보여준 사건.. 그 사건은 미켈란젤로로부터 발현되었으며, 그의 손끝에서 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기적 같은 일들이 미켈란젤로 생전에 동행했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 행성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르네상스 시대와 바로크 시대를 빼고 나면 딱히 내세울만한 문화 예술 분야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퓌렌체서 사는 동안 무시로 당신을 신의 대리인으로 인식하며 '미켈란젤로의 도시'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이 한 곳에 앉아 일제히 한 곳을 응시하는 곳.. 사람들은 그곳에서 당신이 의지하는 신을 생각하는 동시에 미켈란젤로를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해넘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한 여성이 퓌렌쩨를 휘감고 도는 아르노 강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해넘이는 계속된다.


Quando vai lì, tutti si innamorano del tramonto_FIRENZE
il 21 Novembre 2021, La Disfida di Barletta in Puglia

Foto e scritto di YOOKEUN CHANG_GEOGRAFIA

매거진의 이전글 여행자들이 빠뜨린 피렌체의 명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