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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그곳 Dec 12. 2021

우리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요

-능내리의 겨울 


사랑하고 살아도 부족한 삶.. 사랑하고 살아야 한다!



    서기 2021년 12월 12일 아침(현지시각), 우리가 살고 있는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에서 사진첩을 열었다. 그곳에는 하니와 함께 스케치 여행을 다녔던 능내리의 풍경이 담겨있었다. 당시 그녀는 수채화를 그리고 있었고 서울에서 가까운 능내리 혹은 조안면 등지로 뻔질나게 다녔다. 그때 만난 풍경들이 사진첩 가득한 것이다. 그중에 은행나무가 서 있던 강어귀에서 만난 풍경이 눈길을 끌었다. 만추의 어느 날 들렀을 때 은행잎은 샛노랗게 볕을 쬐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주변의 풍광은 익을 대로 익어 누군가 일부러 연출해 놓은 듯했다. 바람이 불면 우수수 은행잎이 날리던 강어귀.. 



그곳에는 텃밭을 일군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가까운 갈대숲에서 스케치를 하고 수채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능내리 곳곳의 풍경을 뷰파인더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12월 어느 날 능내리의 겨울.. 세상은 겨울 깊숙이 발을 들여놓았다. 



연잎은 일찌감치 호수 아래로 사라졌고 줄기는 꺾여있었다. 연밥은 사라지고 빈자리에 까만 어둠이 깃들었다. 수면 위로 바람이 살랑거렸으며 억새들이 서걱거리고 있었다. 나는 근처를 배화하다가 다시 은행나무 아래로 발길을 옮겼다. 그곳에는 추위를 이기지 못한 배추와 무들이 은행 잎을 이불처럼 덮고 있었다. 사람들이 텃밭에서 수확을 끝마친 풍경이 그대로 남아 여행자를 조우한 것이다. 그곳.. 



사람들이 눈길도 주지 않는 텃밭에 아직도 생명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상품이 되지 못한 무와 배춧잎은 벌레가 먹었다. 시간이 이대로 흐른다면 머지않아 추위에 꽁꽁 얼거나 배추 가장자리만 남고 모두 시들어버릴 태세다. 시래기로도 사용할 수 없는 배춧닢.. 그 위로 은행잎이 가득 쌓였다. 



은행잎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목에 매달려있을 때는 샛노랗게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지만 바람에 날려 텃밭에 떨어진 후에는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샛노란 잎사귀들이 어느덧 누렇게 변했다. 화려했던 색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점점 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듯한 모습들.. 언제인가 세상에 태어난 모든 것들은 이렇게 변해가는 것일까.. 



텃밭에 쪼그려 앉아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면서 인연의 끈을 생각한다. 그때는 몰랐으며 전혀 관계가 없었던 것 같았던 은행잎과 텃밭의 배추.. 그들은 만추의 긴 터널을 지나 한겨울에 다시 조우를 한 것이다.



 그제야 둘은 이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이 뷰파인더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요..!"



한 해가 다 저물어 가는 겨울 어느 날 처음으로 나눈 대화이다. 곁에 있었으면서도 눈인사 한 번 나누지 않았던 배추와 은행잎.. 사람들이 전혀 거들떠보지 않는 버려진 텃밭에서 처음으로 사랑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때 미리 알아차렸다면 얼마나 반가웠을까.. 



12월이 오시면 그동안 잊고 지내던 일들이 슬며시 고개를 쳐든다. 성탄 트리가 반짝이면 그제야 사랑을 생각하게 된다. 그동안 장롱 속 깊이 꽁꽁 숨겨두었던 이웃에 대한 그리움들이 능내리에서 만난 풍경과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인다. 사랑하며 살아도 부족한 삶.. 



마음껏 사랑하고 살아야 한다. 후회 없도록 사랑해야 한다. 우리도 언제인가 어느 공간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 곁에 두고도 사랑하지 못했다면 얼마나 서먹하고 아쉬울 것인가..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의 겨울은 별난 풍경이다. 밤새 꽁꽁 얼려둔 얼음물을 물 뿌리게에 담아 뿌린 듯 도시는 음산하게 변했다. 영하의 날씨가 아닌데 영하의 체감을 하는 12월이다. 다행히도 12월에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불빛들이 차갑게 식은 빗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황금빛으로 반짝이게 만들고 있다. 12월에 그들 불빛이 없었다면 몸서리 칠 정도로 외롭고 춥지 않았을까.. 그냥 흘려버릴 수 있는 풍경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사랑의 온기를 느끼게 된다. 신의 그림자인 아름다움은 늘 당신과 내 곁에 머물고 있다. 혜안은 당신 몫이다. 


L'ombra di Dio e il cavolo come lui anche noi_Neungnae-ri COREA
il 12 Dicembre 2021, La Dis Fida di Barletta in Puglia

Foto e scritto di YOOKEUN CHANG_GEOGRAF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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