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의 아름다운 기록
너만 좋아했느냐 나는 더 사랑했다..!
새하얀 떡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산자락의 작은 언덕.. 밤 사이 눈이 내렸다. 이곳은 서울 강남에 살 때 자주 들렀던 곳으로 대모산 자락이다. 그 언덕에 서면 참나무 무리가 어깨동무를 하고 대모산을 바라보고 있다. 서울에서 찾기 힘든 명소를 들를 때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곤 했다. 지금은 나뭇잎이 갈색으로 변해 눈을 머리에 이고 있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사철 다른 모습으로 나를 반긴 풍경이다. 여름에는 나무 그늘에서 이른 봄에는 할미꽃을 주변에서 만나곤 했다.
서기 2021년 12월 11일 오후, 우리가 살고 있는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에서 하니가 한국의 지에서 공수해 온 사진첩을 열어놓고 내 마음은 대모산 자락에 가 있는 것이다. 12월이 오시면 대모산은 한국의 여러 산들처럼 풍경이 확 달라진다. 대모산을 여전히 풀게 물들이고 있는 소나무를 제외하면 대수의 수목들은 낙엽수림으로 갈색으로 변하게 된다.
푸르던 세상이 온통 갈색으로 변하며 약간은 쓸쓸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할 때 약수터로 발을 옮기면 전에 없었던 풍경을 만나게 된다. 인적이 드문 산속에서 직박구리의 귀를 찢는 울음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녀석들은 평소에 산기슭의 아파트 주변을 배화하며 먹이 사냥을 하다가 겨울이 오시면 산기슭에 널린 팥배나무에 몰려드는 것이다.
관련 포스트에서 언급한 바 팥배나무는 배가 열리는 나무가 아니라 봄에 피는 꽃이 배나무 꽃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나무가 가을이 되면 빨간 열매가 열리고 황량하던 숲 속에 성탄 트리에 불을 켠 듯 포토그래퍼의 발길을 붙드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텃새로 자리매김한 직박구리를 불러 모아 떼창을 부르는 것. 영상을 열어보시면 녀석들의 떼창아 얼마나 시끄러운지 모른다.
서울 대모산의 약수터로 가는 길은 평탄한 가운데 아기자기한 풍경이 연출되는 아름다운 산이다. 대모산의 높이는 293m의 산으로 산 모양이 늙은 할미와 같다 하여 할미산으로 불리다가 태종의 헌릉을 모신 후 어명으로 대모산으로 고쳤다고 전한다. 대모산 남쪽에 위치한 헌릉은 조선 3대 태종과 원경왕후 민 씨의 능으로 이곳은 헌릉의 반대편에 위치한 곳이다. 옛날에는 망자의 머리를 풍수지리설 등에 따라 뉘였으므로 대모산의 가치가 남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윤회(尹淮_조선 전기 예문 관제학, 대제학,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가 지은 신도비(神道碑) 음기(陰記)에전하는 바에 따르면 "삼가 살펴보니 이 산은 장백산(백두산)으로부터 내려와 남쪽으로 수천리를 넘어 상주의 속리산에 이르고, 여기서 꺾어 북서쪽으로 또 수백리를 달려 과천 청계산에 이르고, 또 꺾여 북동으로 달려와 한강을 등지고 멈추었는데 이것이 바로 대모산이다. 땅의 영기(坤靈)가 멈추어 솟아 맑은 기운이 꿈틀거리니 아,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간직하여(天作地藏) 능의 길조로 기다림인가"라고 했다고 전한다.
서울 강남에 살면서 자주 들른 대모산은 땅의 영기(坤靈)가 멈추어 솟아 맑은 기운이 꿈틀거리는 것까지는 잘 모르겠으나 산을 오르게 되면 기분이 좋아지는 건 사실이었다. 거기에 한 곳의 약수터는 물맛까지 좋아 산책 겸 운동삼아 자주 다녔던 곳이며 이탈리아 요리에 입문하기 직전에는 매일 아침 이어폰을 끼고 이탈리아어를 연습하던 때였다.
아무튼 그런 기운을 받아서인지 죽기 전에 딱 한 번만 살아보고 싶었던 퓌렌쩨에 둥지를 틀었으며, 지금은 하니의 그림 수업을 위해 바를레타로 둥지를 옮겨 그림 수업에 열중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배웠던 이탈리아어가 쓸모를 발휘하면서 그녀에게 작은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랄까..
이탈리아어를 배우면서 알게 된 단어 중에는 재미있고 인상적인 표현들이 있었다. 그중 몇 가지만 나열해 보면 강을 말하는 퓌우메(FIUME) 언덕을 말하는 꼴리나(COLINA) 구름을 말하는 누볼라(NUVOLA) 바람을 말하는 벤또(VENTO) 물을 말하는 아쿠아(ACQUA) 바다를 말하는(IL MARE) 다리를 말하는(IL PONTE) 그리고 수다를 말하는 동사 끼아끼아레(chiacchierare) 등이었다. 이 중 오늘 포스트에 소환한 단어가 '수다를 떨다'라는 표현의 끼아끼아레이다.
요건 찔레나무의 붉은 열매로 팥배나무와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참 아름답다.
끼아끼아레.. chiacchierare..!
언어라는 영역은 참 재밌는 분야이자 까다롭고 지겨울 뿐만 아니라 가끔씩 매력이 넘친다. 이탈리아어의 동사를 발음해 보면 끼악 끼악 하고 놀라는 표정이 연상된다. 어떤 일을 앞에 두고 놀라거니 수다를 떠는 느낌이 강하게 묻어나는 것이다. 수다란, 쓸데없이 말수가 많거나 말이 너무 많아서 시끄러울 정도의 행위를 말하는데 그들을 수다쟁이로 부르는 것이다.
대모산 기슭을 오르거나 하산하면서 수다쟁이를 떠올리는 건 다름 아니다. 앞에서 잠시 엿본 직박구리 때문이었다. 영상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실체는 안 보이는데 녀석들의 울음소리는 귀가 따가울 정도이다. 서울 대모산 자락에서 자주 목격되는 이 새는 텃새로 잡은 지 꽤 오래되었다. 참새목(Passeriformes)의 직박구리과에 속한 조류인 직박구리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텃새 중 하나로 알려졌다. 재밌는 것은 직박구리라는 어원이 '시끄러운 새'라는 데서 왔다는 것이다. 얼마나 시끄러웠으면 이런 이름을 붙였을까. 참새는 쨉도 안 되는 직박구리..
녀석들이 봄부터 가을까지는 산중 혹은 아파트 등지에서 피는 꽃잎을 쪼아 먹고살다가 겨울이 오시면 대거 산기슭으로 몰려드는 것이다. 그리고 녀석들이 떼창을 부르고 지나간 자리에는 팥배나무 열매들이 숲 속 나뭇잎 사이에 빼곡히 떨어져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무심코 지나쳤다가 밤새 눈발이 날린 어느 날 아침에 눈여겨본 숲 속은 직박구리 뿐만 아니라 나 또한 좋아하는 풍경이 남겨진 것이다. 녀석들은 빨간 열매를 사랑했고, 나는 그들이 남겨둔 흔적을 사랑한 것이다. 수다쟁이들이 남긴 아름다운 흔적이랄까..
어느 날 아침 햇살이 비치는 산기슭 숲 속에서 직박구리를 지근거리에서 만나 녀석의 실체를 담는 데 성공했다.
유난히도 붉은 팥배나무 열매가 12월의 햇살을 받으며 성탄 트리처럼 반짝거리고 있다.
녀석의 곁에는 팥배나무 열매가 빼곡하다. 녀석은 이렇게 나불거렸을 것이다.
"흠.. 올해도 팥배나무 열매가 풍년이로세.. 브라보!!"
녀석은 어느 날 이탈리아로 떠난 포토그래퍼의 밥(?)이 됐다.
그동안 대모산 자락을 어지럽히며 수다를 떨던 녀석의 정체가 이렇게 아름답다니..
먼 나라 이탈리아에서 사진첩을 열어놓고 오랫동안 녀석의 자태와 아름다운 붉은 열매를 바라보고 있다.
녀석이 다녀간 숲이 말한다.
"당신이 떨구어둔 빨간 열매 때문에 우리의 겨울을 얼마나 로맨틱한지 모른다오"
세상은 참 희한한다. 그저 된 게 하나도 없다.
수다쟁이 직박구리의 수다가 없었다면 이 겨울은 얼마나 삭막했을까.. 팥배나무 열매와 잎사귀가 다시 만났다. 또.. 달님과 해님을 함께 바라보고 바람을 함께 쇠던 솔잎도 먼 길을 떠날 차비를 하고 있었다. 참 아름다운 풍경이다.
Un bel record per l'inverno di quell'anno_Momte Demo Seoul COREA
il 12 Dicembre 2021, La Disfida di Barletta in Pugl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