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특별해 보이는 우리 동네 풍경
요즘 어떤 생각.. 무슨 생각을 하고 사십니까..?!
서기 2022년 1월 23일 일요일(현지시각), 우리가 살고 있는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에서 지난 주말 동네 산책을 나가 만났던 풍경을 열어보고 있다. 집 앞에 있는 공원에는 극락조화(Strelitzia reginae)가 꽃을 피우고 있고, 소나무와 상록수들이 푸른색을 띠며 새파랗게 돋아난 새싹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간밤에는 봄을 재촉하는 겨울비가 오셨고 날이 밝자 찬바람이 고도를 휘감고 돌아다녔다. 주말이었지만 인적은 드물었다. 사람들이 공원에 드나들 때는 햇살이 좋거니 포근한 날씨가 제격이었지만, 코로나가 창궐하면서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붐비는 일 보다 띄엄띄엄 거리를 두는 게 눈에 띄었다. 우리는 이런 을씨년스러운 풍경이 나타날 때마다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집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때 위치한 공원은 우리가 자주 찾던 곳이다. 공원에는 작은 규모의 원형극장이 있는데 잊어버릴만하면 작은 행사들이 줄을 잇는다. 또 바를레타 시민들이 좋아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공원에 들어서면 아름답게 건축된 바를레타 성(Castello di Barletta)과 바를레타 두오모(Basilica Santa Maria Maggiore)가 반듯하게 잘 차려입은 정장 차림의 신사를 보는 듯하다. 하니와 나는 공원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자연스럽게 바를레타 성의 해자가 드러나 보이는 성 곁으로 다가섰다.
"희한하네.. 오늘 무슨 날인데 사람들이 보이지 않을까..?!"
우리는 자꾸만 최근에 다시 창궐하고 있는 이탈리아의 코로나 성적표(Pandemia di COVID-19 in Italia)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하니가 이탈리아서 코로나를 피해 두 차례나 한국에 가 있었을 정도이므로, 코로나에 대한 피해의식이 가슴속에 도둑놈처럼 오롯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녀석은 언제라도 발각되면 튈 생각을 가진 몸 쓸 생각을 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마음 편히 산책을 할 때 일어난 주변 상황에도 하시라도 끼어드는 게 코로나 혹은 오미크론이었다. 그게 어느덧 3년째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바를레타 성의 해자와 저만치서 고개를 삐죽 내밀고 있는 바를레타 두오모를 보면서 3년 전의 일을 생각해 내고 있는 것이다. 3년 전.. 당시만 해도 우리는 죽기 전에 딱 한 번만 살아보고 싶었던 퓌렌쩨서 살고 있었다. 독자님이나 이웃분들은 잘 아시는 이야기지만 당시만 해도 장차 우리 앞에 바를레타라는 지명을 가진 도시가 나타날지 꿈에도 몰랐다.
이탈리아의 20개 주는 기억해 낼 수 있고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관광지는 빼놓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장화 뒤꿈치 바로 아래에 위치한 바를레타는 한국의 어느 바닷가의 어촌 보다 더 모르고 있었다. 퓌렌체서 한국으로 볼 일을 보러 떠난 후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 첫마디를 들어보면 바를레타의 위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거기.. 어촌인 거 같은데..!"
아래 첨부한 바를레타 두오모와 바를레타 시내가 촬영된 영상을 잘 살펴보시기 바란다. 흥미로울 것이다. 지난 주말 영상에 등장한 두오모와 바를레타 성 앞을 돌아 집으로 왔다. 포스트에는 그 장면을 실었다. 그리고 보다 흥미로운 장면은 두오모 지하실에 있다. 그곳은 이 도시가 생기기 전부터 만들어진 유물과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두오모는 그 위에 지어진것이다.
오늘날 뜨라니-바를레타-비쉴리의 대교구 성당인 두오모는 도시의 역사적 중심에 있고 바를레타의 중심이다. 현재의 건물은 두 개의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앞부분은 전형적인 로마네스크 양식이고, 뒷부분은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바를레타 두오모(Santa Maria Maggiore)는 수 세기 동안 여러 건축물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졌다. 기독교 이전 시대부터 지어진 건축물은 1126년부터 14세기까지 지속되었다.
La basilica di Santa Maria Maggiore è il duomo di Barletta, già cattedrale dell’arcidiocesi di Barletta ed oggi concattedrale dell’arcidiocesi di Trani-Barletta-Bisceglie. Situata nel centro storico della città, a conclusione di via Duomo, è il più antico fulcro della vita religiosa della città, nonché il suo cardine urbanistico: il disegno del tessuto urbanistico mostra la forza centripeta della sua chiesa madre.
L’edificio attuale si presenta come un organismo complesso ma unitario, composto da due parti nettamente distinte: quella anteriore tipicamente romanica, antecedente la seconda, quella posteriore di spiccati caratteri. Santa Maria Maggiore è il risultato di una serie di stratificazioni architettoniche succedutesi nei secoli, fin dall’epoca precristiana che hanno visto l’inizio della costruzione dell’edificio attuale nel 1126 protraendosi fino al XIV secolo.
Dapprima insigne collegiata di Barletta, nei secoli rivendicante esenzioni e autonomia da altre giurisdizioni, fu elevata a cattedrale dell’arcidiocesi di Barletta – Nazareth dal papa Pio IX con bolla pontificia Imperscrutabili Dei del 21 aprile 1860. È basilica minore dal. Dal 1986 è concattedrale dell’arcidiocesi di Trani-Barletta-Bisceglie.
Il culto è officiato dai canonici del capitolo di Santa Maria.
당시 그녀가 한국으로 떠날 때 우리에게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퓌렌체서 살 때 우리는 주로 재래시장(Mercato di Sant’Ambrogio)으로 장을 보러 다녔다. 장을 보러 가는 동선은 꿈만 같았다고나 할까..
집 앞 매디치 예배당(Cappelle Medicee)에서 출발하면 지근거리에 퓌렌쩨 두오모(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와 지오또의 종탑(Campanile di Giotto)과 산 조반니 세례당(Battistero di San Giovanni (Firenze))을 거쳐가게 된다.
그리고 두오모 광장(Piazza del Duomo)을 지나 뷔아 델 오리우올로 (Via dell' Oriuolo)를 따라가면 산타 암부로지오 재래시장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 어느 날 재래시장을 다녀오는 길에 로지아 델 빼쉐(Loggia del Pesce)에서 한 예술가를 만나게 됐다. 그의 이름은 루이지 라노떼(Luigi Lanotte)..
그녀는 장 보고 돌아오는 길에 로지에 델 빼세 계단에 진열해 둔 루이지의 작품에 마음을 뺏기고 있었다. 그의 화풍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당시 루이지는 그곳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그림을 팔거나 초상화를 그려주고 있었다. 그녀와 루이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런 어느 날 그녀가 내게 제안을 했다.
"루이지에게 그림을 배울 수 있을까..?!"
그런 어느 날, 다시 장을 보러 재래시장에 들렀다가 루이지를 다시 만나게 됐다. 그리고 그녀의 속사정을 털어놓고 그림을 배울 수 있는지 등에 대해 물었다. 루이지는 흔쾌히 수락하며 수업은 그가 살고 있었던 바를레타에서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부정기적으로 바를레타-퓌렌쩨를 오가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가 퓌렌쩨서 시간을 보내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퓌렌쩨 예술학교를 졸업하고 순수미술에 빠져 살고 있었으며 빛의 마술사 램브런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를 좋아하는 예술가였다.
수업이 바를레타에서 이루어지므로 하니는 잠시 망설였다. 지도를 펴 놓고 바를레타를 찾아보니 이탈리아서도 듣보잡 동네(?)가 아니었던가.. 루이지에게 그림 수업을 문의해 놓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퓌렌쩨서 바를레타까지 그림 수업을 받으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고,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운명의 시간은 점점 더 그녀를 옥죄었다. 죽기 전에 살아보고 싶었던 도시에서 다시 죽기 전에 반드시 해 보고 싶었던 그림 그리기 완성을 코 앞에 둔 것이다. 그리고 결정을 했다.
서기 2019년 7월 9일,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루이지와 함께 바를레타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초행길의 바를레타행 기차여행은 말 그대로 호기신 반 설렘 반이었다. 멀고 먼 여행길은 퓌렌쩨-볼로냐-퐈엔사-바를레타로 이탈리아 반도 동쪽으로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루이지와 함께 떠난 여행길은 바를레타에 셋집을 얻어 그곳에서 살 작정이었다. 바를레타서 살면서 그림 수업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루이지의 화실에서 열흘 동안 머물며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퓌렌쩨로 돌아와 이삿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퓌렌쩨는 물론 이곳 바를레타의 셋집에는 주방은 물론 가구가 달려있었으므로 이삿짐은 단출했다. 하지만 결코 적지 않은 이삿짐 부피 때문에 루이지의 동행이 필요했다.
이제 한국에 가 있는 그녀만 돌아오면 당신의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나는 그동안 바를레타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장차 살아가게 될 우리 동네와 이곳의 역사 등에 대해서 루이지와 그의 아버지 프랑코 등으로부터 듣게 되었다. 미켈란젤로의 도시 퓌렌쩨서 바를레타로 이사를 할 때 조금은 망설여진 게 사실이었다. 낯 설고 물 선 이 고장이 우리에게 잘 어울리는 도시일까..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웬걸..
바를레타에 둥지를 튼 후부터 우리는 죽기 전에 딱 한 번만 살아보고 싶었던 도시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그림 수업이 진행되면서부터 바를레타는 마침맞은 도시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녀는 이곳 바를레타에서 루이지로부터 그림 수업을 하는 동안의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무념무상.. 잡념은 사라지고 집중에 집중을 더하며 그림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일주일에 세 차례.. 한 차례에 3시간 동안 그녀는 딴 세상으로 사라지는 것.
그리고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오면 이곳 뿔리아 주가 내놓는 질 좋고 값싼 최고의 식재료를 야금야금 탐하며 좋아하는 것이다. 지난 주말.. 우리는 바를레타 성 앞의 공원에서 천천히 걸어서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한 봄소식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꿈같은 일이 눈앞에 벌어진 것이랄까..
사람들은 짬짬이 우연과 필연을 말하곤 한다. 지금 당신이 살아가는 일이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 전부가 우연이라 믿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인연법에 따라 모든 일이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일을 하인리히 법칙으로 말하곤 했다. 다들 아시는 것처럼 이 법칙은 1: 29: 300의 법칙이라 부르는데.. 어떤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는 같은 원인으로 수십 차례의 경미한 사고와 수백 번의 징후가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이다. 조금 각색해보면, 당신의 운명이 필연으로 이어지기까지 과정에는 그만한 이유가 작용을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한국에서 이곳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에 둥지를 틀 것이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전혀 그럴 마음도 없었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 그만한 이유가 작용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시작은 내가 이탈리아 요리에 입문을 하면서부터였다.
물 설고 낯 선 머나먼 땅.. 이름조차 듣보잡이었던 바를레타에서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이탈리아 요리를 배우기 위해 이탈리아어를 학습하면서부터였다. 매일 아침 코피를 쏟으며 늦깎기로 도전한 이탈리아 요리 공부가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된 배경이 된 것이랄까..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우연과 필연의 법칙이 매우 재미없게 된다. 사람들은 "인간이 계획히고 하늘이 실천한다"는 말을 한다.
인간이 그 어떤 계획을 세울지라도 하늘의 간섭이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운칠기삼'이라고 말하게 된다. 당신이 어떤 일을 성사시킬 때 운이 70%이며 당신의 노력이 30%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여기에 또 하나 검추어진 비밀이 있다.
그녀는 바를레타에서 살아가는 동안 이곳 사람들 혹은 건축물 등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는다. 얼렁뚱땅 대충대충 하는 법이 없는 사람들이란 걸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는 그림 선생님 루이지의 새심한 배려가 깔려있었다. 소묘 작품을 그려 나가는 동안 한 치의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것과 빈틈을 보이지 않는 그의 지도법을 우리나라에서 만날 수 없없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의 작품을 통해 신의 그림자인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 것이랄까. 그녀가 그토록 목말라했던 건 마치 '우물가의 여인'처럼 마셔도 마셔도 목마른 샘물 보다.. 한 모금만 마셔도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신의 그림자를 만난 것이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태복음 7:7-8)"
잡으로 돌아가는 길.. 하니는 이날 바를레타 성과 두오모 곁 풀밭에서 돋아난 풀꽃들을 보며, 아이들처럼 좋아했다. 우리 동네에 봄소식을 전하고 있는 풀꽃들.. 그 요정들의 표정에 신의 그림자인 아름다움이 듬뿍 묻어난 것이다. 그때 만난 냉이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요즘 우리 식탁에는 불로초가 가득한 까닭이다.
"내일은 냉이 캐러 와야겠어..! ^^"
Notizie di primavera arrivate nel sud d'italia_BARLETTA
il 23 Gennaio 2022, La Disfida di Barletta in Puglia
✨Foto e scritto di YOOKEUN CHANG_GEOGRAFIA
Il castello di Barletta, situato nell'omonima città pugliese, è il risultato architettonico di varie stratificazioni dovute al susseguirsi di diverse dinastie al potere, succedutesi dall'XI secolo al XVIII secolo. Un tempo fortezza a scopo difensivo, cinta dal mare che occupava il fossato tutt'intorno al castello e lo isolava da potenziali attacchi nemici, costituisce un punto strategico nella vita cittadina nonché un importante cardine urbanistico. È sede della Biblioteca comunale, del Museo civico e di una sala convegni e mostre.
Tra le opere conservate, oltre un presunto busto di Federico II di Svevia in pietra calcarea, risalente al XIII secolo, è qui posto il Sarcofago degli Apostoli, altorilievo in pietra prima testimonianza del Cristianesimo a Barletta, risalente al periodo compreso tra il III e il IV secol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