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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그곳 Jan 31. 2022

봄나들이에 묻어난 은밀한 대화

-바를레타 항구, 하늘과 바다가 꼭 껴안았어요


설 연휴에 열어보는 이탈리아 남부 우리 동네 봄소식..!!



   서기 2022년 1월 30일 정오 경(현지시각), 우리가 살고 있는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에 봄소식이 깃들었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비 내린 후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그런데 오늘은 바람이 잦아들었고 동네 까페에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치 잔칫집 분위기 같은 동네의 풍경.. 늦은 아침을 먹고 하니와 함께 동네 산책을 나서기로 했다. 



집을 나서자마자 바를레타 두오모 앞에 사람들이 넘쳐났다. 무슨 행사라도 있었던 것일까.. 하니는 두오모 앞을 함께 걸어며 "누군가 등 뒤에서 불을 비추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따뜻한 햇살이 동네를 천천히 달구고 있었다. 그녀는 이어서 "이게 무슨 일이냐?!"며 "무슨 행사가 있는지 물어봐"라고 했다. 


인파를 헤집고 두오모 앞을 벗어난 후 한 노인이 볕을 쬐고 있어서 "죄송하지만.. 오늘 왜 사람들이 붐비는지 알 수 있을까요?"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장의자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노인은 씩 웃으며 "행사는요. 날씨가 따뜻하니까 까페 앞에 사람들이 모여들었어요"라고 말했다. 



사람들의 차림은 겨울옷이지만 표정은 따뜻했으며 모처럼 활기를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습관처럼 두오모 앞을 지나 바를레타 항구로 발길을 옮겼다. 이틀 전 바닷가로 산책을 나섰다가 아드리아 해서 불어오는 칼바람에 즉시 등을 돌린 경험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배시시 웃는 노인의 표정처럼 아드리아해는 졸고 자빠졌다. 마침내 이탈리아 남부에 완연한 봄이 찾아온 것일까.. 



노트북에 로그인하고 설 연휴의 한국 날씨(서울)를 보니 영하 7°C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곳 바를레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기온이다. 보통은 영상 5°C에서 10°C 전후를 오락가락한다. 이런 상태에서 비라도 오시면 체감온도는 영하권에 접어들지만, 이곳에 사는 동안 냉장고 속에 성에는 꼈을 망정 얼음이 언 풍경을 볼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이탈리아의 코로나 성적표 때문에 사람들은 영하의 추위와 다름없는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을까.. 



오늘(30일) 자 이탈리아의 코로나 성적표는 며칠 전 보다 매우 나아졌다. 확진자 수가 거의 20만 명에 육박하고 매일 수 백명의 사망자를 만들곤 했는데 글을 쓰면서 열어본 오늘의 성적표(?)는 그나마 양호한 편이었다.  확진자 수는 10만 4천여 명이고 사망자 수는 235명이었다. 아울러 우리가 살고 있는 뿔리아 주(전체 확진자 수 2.209명 )와 바를레타(확진자 수 214명)의 성적표는 상대적으로 매우 양호한(Area Bianca) 편이었다. 


Covid oggi Italia:(1월 30일 현재 이탈리아와 뿔리아 주 코로나 성적표)


-104.065 contagi e 235 morti: bollettino 30 gennaio 2022


-PUGLIA - Sono 2.209 i nuovi contagi da coronavirus oggi 30 gennaio in Puglia, secondo i dati dell'ultimo bollettino covid-19. Non si registrano morti. I nuovi casi, individuati attraverso 20.437 tamponi eseguiti, sono così distribuiti per provincia: Bari: 689; Bat: 214; Brindisi: 189; Foggia: 300; Lecce: 482; Taranto: 300; Residenti fuori regione: 16; Provincia in definizione: 19



그렇지만 봄나들이 인파 속에는 여전히 긴장감이 감돌았다. 대체로 마스크를 착용하고 나들이에 나서는 모습이었다. 물론 두오모 앞의 까페에 모여든 사람들 중에는 거리두기가 많이 허물어진 상태였으며, 앞서 만난 노인도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채 배시시 웃으며 장의자 위에 드러누워있었다. 봄볕이 너무 좋은 것이다. 



봄나들이에 묻어난 은밀한 대화




우리는 두오모 앞의 인파를 덜어내고 지근거리에 있는 바를레타 항구로 발길을 돌렸다. 그곳은 하니가 코로나를 피해 한국에 가 있을 때 나 홀로 망중한을 달랜 곳이며, 수만 톤에 달하는 큰 배와 작은 어선들이 쉼을 얻는 곳이다. 


항구 바깥 아드리아해를 가로막고 있는 방파제 때문에 큰 바람이 불지 않는 한 내항은 정중동의 풍경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아름다운 항구.. 우리는 바를레타 항구를 돌아 텅 빈 바닷가 모래빝과 봄나물을 캐던 공터를 지나는 동안 적지 않은 대화를 나누었다. 둘만의 은밀한 대화.. 



내가 꿈꾸는 그곳의 이웃분들 혹은 독자님들은 잘 아시지만, 참고로 우리 동네 바를레타(Barletta)를 간단히 소개해 드리도록 한다.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에 속한 바를레타는 우리나라의 진해 마산 창원을 한데 묶은 것처럼, 세 도시 바를레타-안드리아-뜨라니(provincia di Barletta-Andria-Trani in Puglia.)를 한데 묶어 도(현, Prefettura)를 만들었다. 



인구는 세 도시 전부를 합쳐 대략 30만 명을 조금 넘는다. 그러니까 한 도시의 인구는 대략 10만 명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바를레타에서 날마다 일어나고 있다. 인구 10만 영이 살고 있는 도시는 마치 100만 명 이상이 살고 있는 것처럼 붐비며, 주말과 행사가 있는 날이면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다. 



서울에서 오래 살았지만, 사람들이 이렇게 붐비는 곳은 몇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서울의 명동 종로 코엑스몰 등.. 하지만 인파들의 모습을 보면 다시 놀라게 된다. 시민들이 외출을 나올 때 차림은 마치 패션쇼를 방불케 할 정도로 옷을 잘 입고 잘 가꾸며 다닌다. 남녀노소 거의 동일하다. 



예컨대 오늘처럼 봄볕이 따뜻하게 쬐는 날이면, 온 가족이 선글라스를 끼고 외출을 한다. 유모차를 탄 녀석이나.. 녀석의 형이나 누나들도 새까만 안경을 끼고 외출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까페에 모이는 즉시 조잘조잘 와글와글 빠를라 빠를라.. 수다가 이어지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런 풍경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인구 10만 명에 불과한 도시에 사람들이 붐비는 이유 중에는 바를레타 근처에 살고 있는 사람들까지 모두 이 도시로 모여든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구도시 주변의 주차장은 늘 만원을 이룬다. 그들이 이 도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에 하나는 구도시의 구조이다. 



천년고도 바를레타의 구도시 전부는 대리석으로 건축되어 있다. 늘 반들반들.. 비라도 오시거나 밤이 되어 가로등 불빛이 비치면 도시는 황금빛으로 환상적인 풍경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나는 이 도시를 '아드리아해의 진주'라 부른다. 그런 곳에 위치한 까페나 리스또란떼는 정말 고급지고 멋스럽다. 



대리석으로 도배된 까페와 리스또란떼 그리고 오래된 도시의 풍경.. 시민들은 그런 풍경에 익숙했던지 집에서 뭉기적 거리는 사람들은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뿐이랄까.. 우리가 퓌렌쩨서 살다가 이곳으로 둥지를 바꾼 이후로 어느덧 그들의 습성을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니의 그림 수업이 없는 날이면 잠깐이라도 산책을 나가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랄까.. 



우리는 두오모 앞을 지나 어느덧 바를레타 내항의 방파제로 접어들었다. 바다는 잔잔하고 작은 배들은 여전히 졸고 자빠진 곳. 내항을 천천히 걷는 동안 하니의 제안이 도착했다.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그녀는 갑자기 "파타고니아로 떠나고 싶다"라고 했다. 파타고니아가 보고 싶다고 했다.


"우리 다시 파타고니아로 떠날 수 있을까..?!"



우리가 긴 여정으로 다녀온 파타고니아 여행이 어느덧 11년을 맞이하고 있다. 요즘 끼적거리고 있는 파타고니아 여행기를 본 그녀는 시차를 전혀 느끼지 못했는지 "그때가 그립다"라고 말하면서 이탈리아서 남미 파타고니아로 이어지는 동선을 그리고 있었다. 



당시에는 배낭여행으로 남미 일주와 파타고니아 여행을 떠났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사정이 생겼다. 그땐 그나마 청춘의 흉내를 내며 열심히 싸돌아 다녔다. 그러나 세월을 이기는 장사가 있을까.. 어느덧 진짜 안 청춘의 시절에 돌입하면서부터 세상은 점점 더 낯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노트북을 열어 사진첩을 보면 여전히 청춘(?)이 있던 것이랄까..


그녀에게 바람을 불어넣은 건 카톡 때문이었다. 요즘 부쩍 잦아진 카톡 통화 속에 이탈리아서 겪은 여행 이야기가 하나둘씩 섞이면서 지인들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시간 저편의 추억을 소환하고 그곳으로 떠나고 싶은 것이다. 다시 파타고니아로 떠날 때 필요한 건 캠핑카(Camper, 깜뻬르) 혹은 지프였다. 그렇다면 지프와 캠핑카를 이탈리아서 남미로 공수해가야 한단 말인가..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 살고 있는 지인들한테 부탁하면 되잖아..ㅜ"



대략 난감한 일이 생긴 것이다. 봄바람은 잦아들었는데 그녀의 마음속에 불어 든 역마살의 바람.. 그동안의 사정을 미루어 볼 때 그녀는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했다. 무슨 수를 동원해서라도 떠나고 싶을 때는 떠나야 했다. 그게 바닷가까지 이어지며 내 마음까지 꿈틀거리게 만드는 것이다. 



이곳 바를레타에는 겨울이 와도 얼음이 얼지 않는데.. 언제 그랬는지 마음에 해동의 바람이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 바람도 요즘 불붙기 시작한 봄나물 때문이 아닌가 싶다. 매일 밥상에 올라오는 냉이며 씀바귀며 고들빼기는 물론 자연산 비에똘라까지 그리고 이틀 전에는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봄나물을 발견하고 쾌재를 불렀다.(설날 아침에 등장할 예정이다. 기대하시라..^^) 그녀의 가슴에 봄바람이 완연히 찾아든 것이다. 



그녀 가슴뿐만 아니었지.. 바를레타 내항의 바다는 하늘을 꼭 껴안고 있어서 어디가 하늘인지 바다인지 분간하기도 힘들 정도로 아름답다. 봄바람.. 그나저나 그녀의 가슴 깊이 찾아든 파타고니아 여행은 어떻게 해야 하나.. 


Il Mare e il cielo. Porto di Barletta di fronte a Noi_con mia moglie
il 30 Gennaio 2022, La Disfuda di Barletta in Puglia

Foto e scritto di YOOKEUN CHANG_GEOGRAFIA 



Porto di Barletta_Storia


Dalle origini al XIV secolo: 

Nel IV secolo a.C. si presume che una popolazione di origine illirica indoeuropea, i Bardei, si sia stabilita sulle attuali coste barlettane, costruendo un molo, ad oggi mai rinvenuto, a causa dell'arretramento delle acque. Tuttavia il De Leon sostiene che in realtà la costruzione del porto sia da datare intorno al 1000 a.C. e da attribuire agli abitanti di Canosa, in cerca di uno sbocco per il traffico commerciale marittimo. Per quanto resti incerta la sua origine è comunque certo che in età romana questo abbia costituito il porto principale della città di Canosa. Tra il III e il IV secolo, l'originario molo viene ampliato a causa della sua ormai insufficiente capienza, e a questo periodo corrisponde il periodo più florido dell'economia canosina. La crescita di Barletta e del suo porto in quest'epoca segue parallelamente quella di Canosa e, proprio per il suo ruolo commerciale a sostegno della vicina città collinare, quest'ultimo viene anche detto Caricaturo di Canosa. L'importanza crescente di Barletta viene confermata dalla presenza della città nella Tavola Peutingeriana, come luogo di transito delle legioni romane. L'antico porto costruito dai canosini era costituito da un braccio che legava la terraferma al mare, orientato verso nord-est, che poggiava su enormi blocchi squadrati, incastrati e legati tra loro con grappe di ferro. Per ovviare al problema del vento di maestrale, vi era una diga di curvilinea, posta in maniera trasversale rispetto al braccio, che tendeva a proteggere le navi ancorate nel porto. Solo nel 1300 Carlo II d'Angiò ordinò il prolungamento della diga verso 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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