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아내와 함께한 여행 사진첩
인간은 참 알다가도 모를 망각의 동물인가 봐..!
한밤중에 아내가 도시락을 싸다 말고 혼자 중얼거린다. 나는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차린다. 우리는 전국의 명산을 하나둘씩 오르락내리락하면서부터 산행의 재미에 푹 빠졌었다. 주말만 되면 자동차를 몰고 산기슭에 주차를 해 놓고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가 다시 하산하여 서울로 돌아오는 것.
또 어떤 때는 산악회에서 버스를 빌려 타고 단체 산행을 할 때도 많았다. 산행은 그저 소풍놀이가 아니란 건 산을 다녀본 사람들은 너무도 잘 안다. 짧은 코스이건 긴 코스이건 산행은 하산할 때까지 긴장을 늦추어서는 절대 안 되는 운동이다. 그래서 산행을 떠나기 전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하는 것.
도시락과 이동 간식은 물론 생수까지 자신의 처지와 능력 등에 맞추어 준비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보온을 위한 외투며 우비며 스틱까지 할 수 있는 준비는 다 해야 한다. 이런 장비들은 예전 같으면 꽤 무거웠지만 요즘은 매우 간편하게 실용적으로 잘 만들어진 등산장비들이 전문매장에 나와있다.
산을 좋아하시는 분들에게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내게는 준비물이 하나 더 있다. 산을 오르면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들을 놓칠세라 늘 카메라를 지참하는 것. 오래된 습관이다.
처음에는 작은 DSLR을 지참했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요즘 휴대폰만도 못한 화질에 귀찮기만 했다. 그래서 내가 선호하는 캐논 카메라를 가방에 따로 지참하여 산행을 하는 것. 아내는 체력적 부담 때문에 당신의 간편한 차림만 작은 배낭에 넣고 내 배낭에는 앞에서 언급한 도시락과 생수와 비상식량 등이 빼곡하게 든 것이다.
맨몸으로도 버거운 산행에 묵직한 카메라와 거추장스러운 카메라 가방까지 지참했으므로, 마치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전문 산악인처럼 무장한 모습이다. 그것도 나이나 젊으면 모를까 백발의 노구(형님들 죄송합니다 ㅜ)를 이끌고 산으로 향하면 어떤 분들은 힐끗거리기도 한다.(존경의 의미겠지 ㅎ) 사정이 이러다 보니 아내는 먼 산(장거리 지칭)을 갈 때마다 잔소리를 한다. 카메라 때문이다. 그런데 잔소리보다 더 중요한 충고가 잔소리 속에 숨어있다는 걸 모를 리 없다.
"인간은 참 알다가도 모를 망각의 동물인가 봐..!"
위 사진은 설악동에서 비선대로 이동하던 중에 만난 천혜의 옥수로 날이 밝자마자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아내가 이른 새벽에 내뱉은 이 말은 산행에 앞서 먼저 다녀왔던 산행을 추억하는 것. 우리가 다녀온 설악산 공룡능선은 완주한 수만 다섯 차례나 될 정도로 너무도 좋아했던 곳이다. 대한민국에 이런 산이 존재한다는 건 크나큰 축복이자 행운이랄까. 누구나(산행 초보자는 절대 금물) 공룡능선을 다녀오기만 하면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당시를 기억하면 저절로 가슴이 두근거리며 설렘이 이는 것. 하지만 그 같은 설렘은 꽤 오랜 시간이 경과해야 한다. 왜 그럴까..
금강굴로 들어서기 전 다리 위에서 바라본 천불동 계곡의 모습이다. 우리는 장차 이곳으로 다시 돌아 내려와야 하는 까마득한 일정을 두고 있다.
아내는 꼭두새벽 아니 한밤중에 일어나 도시락을 싸며 산행을 준비했다. 서울에서 속초까지 이동하는 시간을 감안하고 다시 설악동에서 출발하는 시간까지 감안해야 했다. 이날 설악동에서 공룡능선으로 출발하는 시간은 새벽 5시로 정해두었으므로 늦어도 새벽 2시에는 서울에서 출발을 해야 했다.
설악동에 도착하자 아직도 여명이 밝지 않아 잠시 눈을 붙인 후 이마에 렌턴을 켜고 설악동을 출발했다. 저만치서 날이 밝아오는 모습이 처음으로 카메라에 잡혔다. 설악동에서 비선대로 가는 길에 포착한 장면. 비선대로 향하는 우리는 비장했다. 우리 앞에 기다리는 것은 초주검이다.
설악동을 출발하여 비선대-금강굴-금강문-마등령-공룡능선-나한봉-천화대-희운각 대피소-천불동 계곡-양폭대피소-귀면암-비선대-설악동까지 다시 돌아오는 여정은 대략 17km에 이른다.(지도 참조)
보통 사람들이 평지에서 한 시간 동안 걷는 거리는 3km이지만 산행을 할 때는 거리가 대폭 줄어들어 1km로 보면 된다. 그러나 이런 기준은 청춘이라야 가능하지 안청춘(?)은 턱도 없는 잣대이다.
우리 기준으로 보면 평지나 내리막길에서는 이 같은 등식이 적용될 수 있겠지만, 오르막과 가파른 절벽이 무시로 나타나는 공룡능선에서는 도무지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잠시 언급한 산행코스에서 설악동에서 비선대까지 이어지는 평지나 다름없는 길은 남들처럼 걷는다.
금강굴로 가는 깔딱 고개에서 만난 어린 단풍들의 모습이 애잔하다.
하지만 비선대부터 금강굴로 가는 오솔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속도는 거의 제로로 뚝 떨어지는 것. 발걸음을 옮기기 조차 버거운 코스가 시작된다. 가파른 산길이 금강굴까지 이어지고 겨우 한숨 돌리나 싶으면 금강문에서 마등령까지 한 숨 돌릴 틈도 없이 오르막길이 끝도 없이 펼쳐지는 것.
금강굴로 서서히 고도를 높이자 조금씩 물들기 시작한 단풍이 너무 곱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쉬었다 가자"는 말을 절대로 끄집어내지 못한다. 이미 여러 차례 공룡능선뿐만 아니라 설악산 구석구석을 다녀본 경험에 따르면 우리가 내딛는 발걸음의 속도는 물론 피로도를 훤히 꿰뚫고 있는 것. 미리 말하자면 이날 산행은 총 17시간이 소요됐다.
여명이 밝기도 전 새벽 5시에 출발하여 다시 설악동에 도착하니 밤 10시가 거의 다 됐었다. 희운각 대피소 부근 무너미 고개에서부터 천불동으로 이어지는 길은 주로 평지 거나 내리막임에도 불구하고 하산길은 무릎 통증으로 여간 힘들지 않아서 걸음걸이가 처음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귀면암의 가파른 길을 오를 때면 "괜히 산행을 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피곤이 몰려들며 초주검을 경험하는 것이다.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내딛는 아내의 뒷모습이 어린 단풍처럼 애잔해 보인다. 대단하다..!
글쎄다. 이런 경험을 한 번만 했으면 족하지 너 댓 번 이상을 하는 바보가 어디 있단 말인가. 아내가 내뱉은 충고 속에는 이런 고통이 포함돼 있는 것이다. 그런데 초주검으로 끝난 산행은 머지않아 새까맣게 잊고 마는 것이다. 희한한 일이었다. 누군가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더니 고통의 시간은 시간이 경과하면 잊게 하고 행복했던 시간만 기억하게 한단 말인가.
우리가 어떠한 일을 기억해야 될지 말지를 결정하는 곳은 대뇌의 변연계란다. 다른 말로는 오감의 감각 작용을 통해 기억하고 감정 값을 매기게 된다는 것, 우리가 초주검을 여러 번 경험을 했지만, 우리의 오감 속에서 초주검 보다 더 황홀하고 아름다운 장면들이 우리를 지배했던 게 아닐까. 우리가 만난 생애 최고의 단풍 속으로 들어가 본다. 그해 가을 설악산 공룡능선의 단풍은 유난히도 아름다웠다. 행운이었다. 생애 최고였다..!
서서히 물드는 단풍들이 아내 뒤로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다.
숲의 틈바구니에서 포착한 비경.. 늘 푸른 소나무의 기상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우리도 어느 곳에서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굳굳이 살아야 하겠지..
금강굴을 돌아서자 마침내 내설악의 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신이 내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왼쪽 저 멀리 U자형 산봉우리가 장차 우리가 넘어야 할 공룡능선의 거의 끝부분이다.
사람들이 산에 미치는(?)는 이유가 있다. 산에 가 봐야 안다. 우리네 삶도 그렇겠지. 신은 고통을 경험하지 않은 자에게 삶의 행복과 황홀함을 선물하지 않는다.
우리가 공룡능선을 다시 찾은 날은 2017년 10월 4일. 이날은 추석이었다. 산행을 끝마칠 때까지 이 산중에 남은 사람은 아내와 나.. 단 둘 뿐이었다. 어쩌면 마지막 산행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고도를 조금씩 높이자 발아래로 천불동 계곡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말 아름다운 곳. 우리는 공룡능선을 돌아 저 아래 계곡으로 돌아와야 한다. 우리가 천불동 계곡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고 사방이 깜깜한 어둠에 둘러싸였다.
저 멀리 공룡능선의 U자형 산등성이가 보인다. 저곳까지 끊임없이 발걸음을 옮겨야 하며 다시 천불동 계곡으로 이어지는 긴 여정에 돌입할 것이다.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
사진 오른쪽, 아내의 뒷모습을 보니 너무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산행은 누가 거들어 줄 수 없다. 당신의 몫은 당신이 해결해야 한다. 우리네 삶도 그렇지 않은가..
지금 생각해 봐도 까마득하다. 저 계곡으로 언제쯤 돌아온단 말인가.
우리는 산행을 통해서 배운다. 아내와 내가 싫어하는 산행 코스는 내리막길이다. 공룡능선 등 산행을 통해 배웠다. 내리막길이 길게 이어지면 잠시 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곧 오르막길이 눈 앞에 나타난다는 것. 차라리 한걸음 한걸음 오르막길을 오르는 게 더 나았다. 누구나 잘 나갈 때가 있다. 그때 반드시 겸손해야 함을 산이 일러준다.
설악산을 뻔질나게 다니는 동안, 이날 설악산은 처음으로 최고의 단풍을 예비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왼쪽 상단의 U자형 산등성이를 잘 보시기 바란다. 곧 우리 앞에 닥칠 시련의 마지막 코스나 다름없다. 저곳으로부터 다시 희운각 대피소 곁 무너미 고개까지 이동한 후 천불동 계곡에 접어든다. 마등령에 도착한 후 공룡능선을 따라 저곳을 넘어야 한다.
고도를 조금씩 높이는 동안 설악산의 진풍경이 뷰파인더를 사로잡는다.
생애 최고의 단풍이 공룡능선으로부터 내설악 깊은 곳으로 물들이고 있는 대장관이 카메라에 포착되기 시작했다. 아내는 나의 건강을 위해 카메라 지참을 말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날 만에 하나 카메라를 지참하지 않았더라면 평생을 두고 후회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공룡능선을 찾아 초주검을 경험하는 일이 없어도, 나의 브런치만 열면 당시에 기억한 아름답고 황홀했던 풍경 때문에 두고두고 행복해할 것이다. <계속>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에서 쓰다.
*아래는 브런치에 못다 실은 이미지를 영상으로 엮어 봤다. 이제 겨우 금강굴을 돌아섰으므로 갈 길은 멀고 기록은 빼곡하다. 설악산 최고의 단풍은 좀 더 시간이 경과한 후에 볼 수 있다. 전 과정을 차근히 소개해 드릴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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