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호된 외계의 출입국 심사
왜 그랬을까..?
왜 그랬는지 나도 몰라.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시선이 움직였을 뿐이야.
토끼풀이 소담스럽게 피어있는 곳은 지구 반대편 중부 파타고니아가 시작되는 작은 도시 칠레의 차이텐( Chaitén)이라는 곳이다. 한 때 이곳은 대략 1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차이텐 화산이 폭발한 직후부터 사람들의 이주가 시작됐다. 우리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인구는 천명 미만으로 대부분의 시민들이 도시를 버리고 떠난 후였다.
따라서 도시는 황량한 모습으로 이방인을 대했다. 도시 곳곳은 마치 몹쓸 전염병이 휩쓸고 간 것처럼 사람들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회색빛으로 변한 도시 한 모퉁이에는 무수한 풀꽃들이 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녀석들의 함성이 들렸다. 어떤 녀석들은 폴짝폴짝 뛰며 또 어떤 녀석들은 손을 흔들며 소리를 질러댓다.
"아줌마, 아저씨.. 너무 잘 오셨어요..!!"
차이텐으로 이동하기 전까지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이렇게 불렀다) 코자이케(Coyhaique)에서 대략 한 달간 머물렀다. 이유가 있었다. 파타고니아 투어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내게 큰 문제가 생긴 것. 오르노삐렌을 떠나던 날 보따리를 챙기면서 허리가 삐끗한 느낌이 들었는데 코자이케에 도착한 직후부터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허리가 찢어질 듯 아파왔다.
그 통증은 생전 처음 겪는 것으로 누군가 골수 깊은 곳에 뾰족한 바늘로 마구 쑤셔대는 것 같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느낀 통증이므로, 숙소를 구하기 위해 대략 200m를 이동했을 때는 거의 초주검에 이르렀다. 초주검이 됐다. 천우신조였을까. 나의 걸음이 끝나는 곳에서 두 여인을 만나게 됐다. 저녁나절 마실을 나온 이들은 나의 물음에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이렇게 말했다.
"나디에, 너네 집에 방 하나 남는 거 없어?"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로 나디에의 가까운 친구였으며 한동네에 살고 있었다. 나디에는 자기 집의 남아도는 방을 개조해 세을 놓고 있었고, 그 집을 차지한 사람들은 호텔을 짓는 공사판에서 일을 하는 노동자들이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2층 다락방에 세 들어 살던 사람이 떠난 직후 우리를 만나게 된 것.
행운이었다. 만약 이런 행운이 없었다면, 아내와 나는 전혀 모르는 낯선 땅에서 노숙 신세를 면하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문제는 우리가 내렸던 버스 정류장까지 다시 걸어가야 하는 것. 버스정류장에는 아내가 65리터용 큼직한 배낭과 작은 보조 가방 옆에서 이제나 저제나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다시 아내 곁으로 돌아가는 길은 까마득했다. 눈 앞에 빤히 보이는 곳이건만, 할 수만 있다면 당장 그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뉘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았다. 아내는 그것도 모르고 왜 이렇게 늦었느냐는 표정이 역력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숙소로 짐을 옮긴 후부터 꼬자이케 투어를 시작하는데 한 밤 자고 나면 괜찮을 것 같았던 몸상태는 날이 갈수록 나빠졌다.
그리고 종국에는 집 밖을 나서지도 못할 만큼 극심한 고통에 시달린 것. 2층 다락방에서 1층 거실까지 내려갈 때면 난간을 붙들고 한 걸음 한걸음 마치 나무늘보처럼 발길을 옮겨야 했다. 밥 먹는 것도 용변을 보는 일도 너무 힘든 일이었다. 그러다가 자칫 몸을 잘못 움직이면 나도 모르게 비명이 나오곤 했다.
"으악~!"
나 때문에 아내는 매우 힘들어했다. 마리아와 나디에의 도움으로 가까운 병원 응급실을 찾아 치료에 나섰지만,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진통제를 주사하는 일 밖에 없었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민방과 비방을 찾아 나서는 일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 했던가.
아내는 고심 끝에 기발한 도구를 만들었다. 페트병을 이용하여 핫팩을 시도한 것이다. 1리터들이 콜라병이 제격이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 물을 끓여 콜라병에 가득 채우고 통증 부위에 올려두거나 가까이 두는 것. 뜨거운 물을 견디지 못한 페트병은 조그맣게 오그라 들었고, 두 개의 페트병은 수건에 돌돌 말려 침낭 속에서 따뜻한 열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편안해지며 잠을 청하는 것.
그런데 잠결에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나는 일이 잦았다. 몸을 뒤척이다가 극심한 통증이 나를 불러일으킨 것. 그때부터 다시 잠 못 이루는 밤이 시작되곤 했는데 그게 거의 한 달간 지속됐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고관절에 문제가 생긴 것. 아내는 그 원인이 카메라 때문이라고 말했다. 무거운 줌렌즈와 장비들이 몸의 균형을 망가뜨린 것이라나 뭐라나. 절망적이었다.
"이제 막 파타고니아 투어를 시작했는데 이곳에서 주저앉다니..ㅜ"
이때부터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방구석에 그저 틀어박혀 몸을 사리고 있을 게 아니라 단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일 수만 있다면 돌아다니기로 했다. 그래서 매일 숙소 주변을 조금씩 걸어 다녔다. 처음엔 10m, 그리고 30m 50m까지 거리를 늘려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떤 때는 화단에 주저앉아 꼼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누군가 허리를 두쪽으로 찢어 발기는 듯했다. 이때 다시 한번 더 오기가 발동했다.
"그래 좋아, 어차피 도 아니면 모가 아닌가..!"
허리가 부러지든 어디가 고장이 나든지 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만에 하나 내가 걸을 수만 있다면 걸을 수 있을 때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걸어 내가 가 보고 싶은 거 다 보고 말 거야라며, 이를 악물고 고통 속에서 숙소 주변을 맴돌았다. 그런데 어느 날 도무지 믿기지 않는 기적이 내게 일어났다. 나 스스로도 차마 믿을 수 없는 기적이 찾아온 것이다. 어느 순간 나는 100m 이상을 걷고 있었다.
카메라를 다시 고쳐 메고 꼬자이케 시립공원묘지(작은 골짜기의 경치가 아름다운 곳)까지 걸어가고 있었는데 500m 이상은 족히 넘은 거리였다. 나도 모르는 이끌림에 따라 어느덧 피를 흘리며 고개를 떨군 예수상 앞에 다다라서야 내 몸의 통증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됐다. 소설이 아닌 사실이다.
사실이었다. 나는 너무 기뻐 어쩔 줄 모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 혼자 밖에 없었다. 외계의 호된 출입국 심사를 받은 것일까. 참 희한한 일이 나로부터 일어난 것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우리는 짐을 챙기고 차이텐으로 떠났다. 본격적인 파타고니아 투어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환영을 나온 요정들과 눈을 마주치며 환대에 감사하는 것이다.
"얘들아 너무 고맙구나. 고마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