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출신 화가 GIUSEPPE DE NITTIS 기념 사생대회
사람들의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하다!!
서기 2022년 3월 22일 저녁나절(현지 사각), 우리가 살고 있는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서 이틀 전(20일)에 만난 사진첩을 열었다. 그곳에는 이곳 바를레타 출신 유명 화가 쥬세뻬 데 니띠스(Giuseppe De Nittis)를 기념하는 사생대회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전문가들로부터 학생들까지 바를레타 성 주변 공원 곳곳을 수놓고 있었다.
하니와 나는 점심을 먹은 직후 산책 삼아 나왔다가 눈에 띄는 장면을 보고 좋아라 이들이 그리고 있는 작품 구경에 몰두했다. 이날 행사의 주제는 <바를레타>였다. 바를레타 두오모(Basilica Cattedrale Santa Maria maggiore)와 바를레타 성(Castello di Barletta) 앞에서 장시진을 친 사람들.. 그들의 모습에서 신의 그림자인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것 당연하다고나 할까..
우리가 이곳 바를레타로 이사를 온 이유는 딱 하나.. 하니의 평생소원을 물기 위함이었다. 우연찮게도 우리가 퓌렌쩨서 살 때 한 예술가(Luigi lanotte)를 만난 일이 우리의 운명을 바꾸고 있었던 것이다. 루이지의 고향이 바를레타였으며 그녀는 루이지의 화풍에 매료되어있었다.
그런 어느 날 둥지를 퓌렌쩨서 바를레타로 옮긴 것이다. 세상은 참 희한하다. 바를레타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집을 계약할 때 전혀 딴 세상을 만난 듯 새로운 기분이 들곤 했다. 처음엔 그저 이탈리아 장화 뒤꿈치 아래에 위치한 어촌이려니 하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이탈리아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랄까.
도시가 크지는 않았지만 작아도 세련미가 넘치는 곳이었다. 그게 어느덧 4년 차에 접어들면서 정이 들대로 든 것이다. 하니는 "한국보다 이곳이 더 좋다"라고 말할 정도로 정이 든 것도 그녀의 평생소원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면서부터가 아닌가 싶다.
나는 그녀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거나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신(神)의 존재기 아름다움으로 드러나는 과정이라 생각했다. 그건 행복한 일이다. 실체가 모호한 자아로부터 당신 속에 '신의 그림자인 아름다움'이 거한다는 것은, 신과 함께 동행하는 일이 아닌가.
이날 나는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는 한편, 그들이 지참한 미술 도구를 보며 덩달아 행복했다. 이들이 지참한 미술도구들은 당신이 보고 싶어 한 세상을 표현하는가 하면, 이 도시에 깃든 도전의 정신을 화폭에 담아내기도 했다. 바를레타 성 앞 공원 지아르디니 프라텔리 체르비(Giardini Fratelli Cervi) 곳곳에 흩어진 참가자들의 모습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동안 하니는 재빨리 이들의 작품을 둘러본 후 내게로 다가와 "저쪽에 있는 작품이 조금은 다른 거 같아. 잘 그리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어느덧 비교를 해 본 것이다. 그때 만난 사람들이 나의 뷰파인더를 채웠다. 그녀의 이름은 라우라 까스뗄라노(Laura Castellano).. 그녀가 사는 곳은 이곳에서 대략 50km 떨어진 뿔리아 주의 주도 바리(Bari) 근교에서 살고 있었다. 직업이 화가였으며, 공방(Bottega d'Arte Lacast)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나는 당신의 작품을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라우라는 금세 나와 친해졌다. 하니가 일러준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라우라였으며, 당신의 작품에 등장한 소재를 곁에서 설명을 곁들이자 "그렇다"며 좋아했다.
라우라가 그리고 있는 작품은 대략 30호 정도의 크기로 맨 먼저 아크릴로 밑그림을 그린 다음 오일을 칠하고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나이프로 마감을 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 등장한 말을 탄 기사들의 모습은 도전의 도시 바를레타(Disfida di Barletta)의 상징인 '13인의 기사(I Tredici(13) Cavalieri)'를 표현했으며, 뒤로는 두오모를 배치하고 불길이 타오르는 정열적인 모습을 담았다.
그리고 마감을 할 때는 뿔리아 주가 자랑하는 파스타 원재료 그라노 두로(Il grano duro, 듀럼밀)를 그려 넣으면 작품을 완성해 나가고 있었다. 참가자들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자, 뿔리에제(Pugliese, 뿔리아 사람들)의 자존감이 묻어나는 정열적이고 신의 그림자인 아름다움 가득한 작품이었다.
곁에서 작품을 지켜보는 동안 라우라와 친해지면서 "다시 한번 더 만나자"라고 했더니 대뜸 명함을 건네주었다. 그 직후 라우라와 두 학생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이 과정에서 남긴 그녀의 작품은 이러했다.
OPERE: LAURA CASTELLANO
라우라가 그려나가는 작품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작금 내 조국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낯 뜨거운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권력에 미쳐 날뛰는 한 인간과 그들의 패거리를 보면서 일면 이곳 사람들의 심성과 비교해보고 있는 것이다. 정의가 무엇이며 불의가 또 무엇인가..
당신 마음에 신의 그림자가 깃들지 않으면.. 그건 필시 사악함이 깃든 것이자 인면수심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랄까. 나는 까발레또(Cavalletto, 이젤)를 앞에 놓고 행복해하는 라우라는 물론, 행사 참가자들의 표정에서 신의 그림자를 찾아 떠난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곳은 바를레타 성 앞의 풍경이다. 이날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주로 여성들이었으며, 일반인과 대학생과 중고등학생 또래의 학생들이 무리를 지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표정은 화창했던 봄 날씨처럼 밝고 환했으며 허락을 얻고 촬영을 하자 좋아라 하며 입이 귀에 걸렸다. 사생대회 풍경을 무작위로 영상에 담아봤다.
영상을 열어보면 우리가 자주 찾는 집 앞 공원의 아름다운 풍경은 물론 행사 참가자들의 표정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이날 참가자 중에는 마테오(69세)와 움베르또(74세)도 등장한다. 두 분과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느낀 점은 표정이 너무 밝고 행복해 보인다는 점이다. 마테오는 독학으로 그림을 시작했으며 어느덧 40년 경력의 베테랑으로 학생들에게 그림을 지도하고 있었다.
마테오(MATTEO FIORENTINO)의 작품 뜨라니 항구의 밤 풍경
내가 그와 가까워진 이유는 당신의 작품을 알아보면서 시작됐다. 그가 그린 작품은 이곳 바를레타서 가까운 뜨라니 항구가 주제로 등장하면서였다. 하니도 마테오의 작품을 좋아했다. 지금 이곳에서 그림 수업을 하고 있는 하니가 장차 그려낼 작품이 그녀 앞에 등장한 것이다.
움베르또는 작품 에라클리오와 도전의 도시 바를레타(Eraclio - Il Colosso di Barletta)
그녀는 마테오의 작품에 빠져들면서 당장이라도 당신의 작품을 그리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동안 그린 소묘 작품을 아이폰을 꺼내 보여주자 "BRAVA! BELLISSIMA!"를 연발하며 마테오의 칭찬이 이어졌다. 그리고 표정이 너무 밝은 움베르또는 작품 한 점을 남기고 있었다. 생면부지의 처음 만난 사람들.. 그분들이 마음을 열고 한국에서 온 꼬레아노를 반겨주니 이 도시가 어떻게 낯설 수 있겠는가.
천천히 둘러본 사생대회 현장.. 이 행사의 주인공인 쥬세뻬 데 니띠스는 누구인지 간략하게 살펴보며 글을 마친다. 자료를 정리하고 글 몇 자 적고 보니 어느새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다.
Giuseppe De Nittis.. 그는 누구인가?
Colazione in giardino, olio su tela, Barletta, Pinacoteca De Nittis, 1883-1884
위 작품은 위키피디아에 등재된 쥬세뻬 데 니띠스(Giuseppe Gaetano De Nittis)의 작품으로 <정원에서 아침식사> 풍경을 유화로 그린 것이다. 그의 유작들(Opere)을 둘러보면 1873년부터(Paesaggio lacustre nei pressi di Napoli (1873)) 1884년까지(Colazione in giardino (1883-1884)) 집중된 것을 알 수 있다. 당신이 열정적으로 그려낸 작품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1846년 돈 라파엘 드 니티스(don Raffaele De Nittis )와 테레사 에마누엘라 바라치아(Teresa Emanuela Barracchia)의 내번째 아들로 이곳 바를레타에서 태어났다. 그의 유년기는 불행했다. 그가 태어나기 전 당신의 아버지는 정치적인 이유로 당국에 체포되었고, 2년의 감옥생활 후 석방되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
어린 시절부터 고아가 된 그는 조부모님과 함께 자랐다. 그는 청년기(1861년) 때부터 바를레타 출신 화가 지오반니 바띠스따 깔로(il pittore barlettano Giovanni Battista Calò)와 함께 훈련을 받은 후,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폴리에 있는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로부터 그리 오래지 않은 기간 동안 세상에 널린 신의 그림자인 아름다움에 눈뜨며 작품들을 남기게 된 것이다.
만에 하나 그가 가족들의 반대에 동의했다면 그의 작품은 물론 이름조차 기억해 낼 수 있는 사람들이 없을 것이다. 마치 불세출의 영웅이자 예술가인 미켈란젤로의 생애 중 유년기의 선택을 보는 듯하다. 사람들은 그 누구도 어떤 선택을 하게 된다. 그때 당신의 선택이 신의 섭리에 옳다고 판단되는 것은 반드시 아름다움이 깃든 것이라 생각한다. 어느 날 먼 나라 이탈리아서 만난 사생대회를 통해 신의 그림자를 찾아 떠난 사람들을 만나 행복했던 하루이다.
Quelli che se ne andarono alla ricerca dell'ombra di Dio
il 21 Marzo 2022, La Disfida di Barletta in Pugl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