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향원정의 조성시기와 취향교의 원형
정치와 종교 체재와 이념 등을 제거하면 신의 그림자인 아름다움이 보인다!
서기 2022년 6월 18일 정오경(현지시각), 우리가 살고 있는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서 조선왕조의 법궁 경복궁의 향원정을 만나보고 있다. 이곳 바를레타의 현재 기온은 26도씨로 높은 편은 아니나 시내 중심서 볼일을 보고 돌아오는 머리 위로 땡볕이 쏟아졌다. 인도의 그늘진 곳을 찾아 걸으며 집으로 돌아와 사진첩을 열어보니 시원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대략 이틀 전에 발행한 포스트에 사용한 경복궁 향원정의 풍경들.. 시사문제와 관련된 포스팅 때문에 스스로 청량제로 사용하고 싶었던 풍경이다.
세상 그 어떤 풍경이든 정치와 종교 체재와 이념 등이 가미되면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식상하게 마련이다. 대자연이란 세상 사람들이 품고 있는 마음과 전혀 다른 법이니 말이다. 그래서 이번 포스트는 향원정 본연의 풍경에 집중할 수 있도록 경복궁 향원정의 조성시기와 취향교의 원형(景福宮 香遠亭의 造成時期와 醉香橋의 原形)을 기록한 자료를 통해 천천히 감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한다. 아래 첨부해둔 자료의 PDF를 참조하시기 바란다.
향원정은 경복궁 북쪽 후원에 있는 향원지 내의 가운데 섬 위에 건립된 육각형의 정자이다. 향원지의 ‘향원(香遠)’은 ‘향기가 멀리 간다’는 뜻으로 북송대 학자 주돈이(1017∼1073)가 지은 '애련설(愛蓮說)'에서 따온 말로서 왕이나 왕족들이 휴식하고 소요하던 침전의 후원으로 여기에는 향원지(香遠池)와 녹산(鹿山)등 원림 (苑林) 공간이 된다.
향원지가 있던 곳에는 본래 세조 2년(1456)에 취로정(翠露亭)이란 정자를 짓고 연꽃을 심었다는 기록이「세조실록」에 보인다. 향원지는 4,605㎡의 넓이의 방형인데, 모서리를 둥글게 조성한 방형의 연지에 연꽃과 수초가 자라고, 잉어 등 물고기가 살고 있다. 향원지의 수원(水源)은 북쪽 언덕 밑에 솟아나는 '열상진원(洌上眞源)'이라는 샘물이다.
이 향원정에 들어가는 다리인 '취향교'는 본래 목교로서 1873년에 향원정의 북쪽에 건청궁 방향으로 설치되었다. 취향교는 건청궁에서 향원정으로 들어가도록 북쪽에 있었으나, 6·25 전쟁 당시 없어졌으며, 현재는 1953년에 지은 다리가 향원지 남쪽에 있다.
본래의 취향교는 조선시대 원지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길이 32m, 폭 165cm)이다. 향원지의 북쪽으로 녹산지역에 있는 담장에는 인유문(麟遊門)이란 일각문(一角門)이 있으며, 그 남쪽에는 봉집문(鳳集門)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연못은 한층 아늑한 정취(情趣)에 싸여 있었다.
향원정은 고종이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간섭에서 벗어나 친정체제를 구축하면서 정치적 자립의 일환으로 건청궁을 지으면서 그 건청궁 앞에 연못을 파서 가운데 섬을 만들고 세운 2층 정자로, 고종 4년(1867)부터 고종 10년(1873)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향원정으로 가는 섬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취향교라는 다리가 있으며, 남쪽에는 함화당, 집경당이 위치해 있다.
정자의 평면은 정육각형으로 아래·위층이 똑같은 크기이며, 장대석으로 마무리한 낮은 기단 위에 육각형으로 된 초석을 놓고, 그 위에 일층과 이층을 관통하는 육모 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이층 기둥 위에 짜이는데, 기둥 윗몸을 창방(昌枋)으로 결구하고 기둥 위에 주두(柱枓:대접 받침)를 놓고 끝이 둥글게 초각(草刻)된 헛첨차를 놓았다.
일출목(一出目)의 행공첨차를 받치고, 다시 소로를 두어 외목도리(外目道里)밑의 장려를 받친 물익공이다. 일층 평면은 바닥 주위로 평 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두었고, 이층 바닥 주위로는 계자 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두었다. 천장은 우물천장이며 사방 둘레의 모든 칸에는 완자살 창틀을 달았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육모지붕으로, 중앙의 추녀마루들이 모이는 중심점에 절병통(節甁桶)을 얹어 치장하였다.
향원정은 왕과 그 가족들이 휴식을 취하는 공간으로 경복궁 후원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 안겨있는 상징적 대표 건물이다. 육각형 초석, 육각형 평면, 육모지붕 등 육각형의 공간을 구성하여 섬세하고 미려하게 다듬은 모든 구성요소들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비례감이 뛰어난 정자로 역사적, 예술적, 건축적으로 가치가 높다.
경복궁 향원정의 조성시기와 취향교의 원형(景福宮 香遠亭의 造成時期와 醉香橋의 原形)
-문화재청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남호현*·김태민)
국 문 초 록
경복궁의 후원에 위치한 향원정과 취향교는 고종 연간의 관련 사료와 조선 후기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몇몇 도면에 의지하여 연구되고 있었다. 현재의 취향교는 한국전쟁을 거치며 전소된 것을 종전 후 임시적으로 재건한 것이기 때문에 형태를 비롯하여 재건 위치도 정확한 고증을 거친 것이 아니다. 구한말~일제강점기에 촬영된 사진과 이를 묘사한 그림엽서 따위 가 일부 남아있지만 촬영 주체나 시기에 대한 정보가 부재하여 어떤 사진이 취향교의 원모습을 담은 것인지 판정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2017년 취향교 복원에 필요한 기초자료 확보를 위해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는데 조사를 통해 취향교의 원위치와 교각 주춧돌의 형태가 확인되었으며 이를 통해 취향교의 변화과정을 유추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최초의 취향교는 상판이 약한 아치 를 그리는 3렬의 교각열을 가진 형태였으며 시간의 경과에 따라 교각열이 늘어난 평교형태로 변화한 것이 밝혀졌다. 또한 향원지 내 가도(假島)의 성토층에 대한 AMS연대측정을 통해 향원정이 임란 이후에 조성되었음이 판정되어 기존에 제기되던 ‘조선 전기 취로정 전신설’은 근거가 없음이 확인되었다. 발굴조사 및 사료 검토 결과를 토대로 종합적으로 판단한다면 취향교와 향원정의 조성 시기는 조선 후기 건청궁의 건립연대와 평행할 가능성이 높다.
* 본 논문은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서울지역 도성유적 학술조사 연구」의 연구결과를 활용하여 작성되었음.
도성은 국가 단계에 도달한 정치체의 중심 취락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도성의 핵심시설은 최고 지배자의 치소인 궁(宮)이다. 최고의 정치 엘리트가 거주했던 궁궐에는 당연 히 당대의 문화와 사상의 본질이 투영된 건축행위가 베풀어졌으며 한국뿐만이 아니라 중국, 일본을 위시한 동북아시 아의 주요 국가에서도 그 나라의 궁궐에 대해서는 건축사· 미술사·문헌사에 걸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본고에서 다루고 있는 경복궁은 조선 왕조의 정궁(正宮)으로 창덕궁, 경희궁, 경운궁(덕수궁)과 함께 소위 4대 궁으로 지칭돼 기도 한다.
주지하듯 조선왕조는 유교 이념에 기반하여 통치되던 국가였고 당연히 왕실의 생활이 이루어졌던 궁궐은 유교원 리가 반영되어 주거공간, 통치행위, 의례가 진행되던 공간이 배치되었다. 기본적으로 궁궐 내 공간은 왕이 국내·외의 공식적 행사를 진행하는 정전과 신하와 정사를 의논하던 편전, 왕이 거주하던 침전, 이 세 영역을 중심으로 구성되는데 이 영역들 주변으로 후궁전과 기타 궐내 각사들을 배치시켰 다. 중국이나 일본의 궁궐들이 그러하듯 경복궁도『주례(周 禮)』, 「고공기(考工記)」에 기록된 사상과 배치구법이 각 전각들의 배치 원리에 반영되어 있다.
전조후침(前朝後寢)과 삼 문삼조(三門三朝)의 원리가 그것인데 왕이 정치를 하는 조정을 궁궐의 앞에 두고 그 뒤에 거처인 침전을 배치하고, 궁궐을 3개의 영역으로 나눠 각 영역에 3개의 문을 둔다는 것이다. 3개의 영역은 내조(內朝)(연조燕朝), 치조(治朝), 외조 (外朝)를 뜻하는데 간단히 말해 왕의 침전과 왕실의 생활공간인 연조는 치조와 외조보다 궁궐의 안쪽에 위치한다는 개념이다(남호현 2016:17).
왕과 왕비가 기거하던 침전의 배 후에는 왕이 휴식하고 소요하던 후원, 다시 말해 원림(苑林)을 조성하였는데 경복궁은 아미산(峨眉山) 뒤로 펼쳐지는 향원지(香遠池)와 녹산(鹿山) 지역이 이에 해당된다. 경복궁 원림에는 커다란 연못인 향원지(香遠池)가 위 치하며 향원지의 중심에는 인공적인 섬(이하 가도假島로 지 칭)이 조성되어 있는데 그 위로 육각형의 정자 1기와 정자로 진입하는 다리가 걸쳐져 있다. 이들은 각각 ‘향원정(香遠亭)’ 과 ‘취향교(醉香橋)’로 명명되어 있으며 본고에서 검토하고자 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향원지는 북서쪽에 ‘열상진원(洌上眞源)’으로 명명된 석조 입수구가 존재하는데 이곳이 공식적인 향원지의 수원이다.
이곳에서 발원하는 물이 향원지를 거쳐 경회루까지 공급되지만 지금까지의 경복궁 조사 결과로 미루어 볼 때, 향원지를 포함하여 북쪽의 건청궁, 남쪽의 함화당·집경당 지역은 기본적으로 지하수가 풍부한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은 지속적으로 지하수가 용출되는 지역이기 때문에 연못에 대한 급수는 수원인 보이는 ‘열상진원‘에 크게 의존하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향원지의 바닥은 북 동쪽이 가장 높고 남서쪽으로 점점 낮아지는 모습(문화재청 2007)을 보이고 있으며 취향교의 위치는 건청궁과의 관계뿐 아니라 향원지 바닥의 지형 특성을 감안한 시공용이성도 고려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향원정은 섬세하고 화려한 외형을 자랑하는 반면, 골조 등을 구성하는 부재가 소형부재들로 축조되어 다른 건물에 비해 그 내구성이 취약하다고 평가된다. 실제로 일제강 점기에서 지금까지 수회의 보강공사가 진행되었으며 현재는 내구성 보강을 위해 해체 복원공사가 준비 중에 있다(문화 재청 2013). 현재의 취향교는 한국전쟁을 거치며 훼손된 것을 별 다른 고증 없이 임시적으로 설치한 것이기 때문에 그 위치와 다리 외관이 원형과 전혀 다르다는 지적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취향교의 원형복원과 향원정 주변 정비를 위한 기초 학술자료 확보를 목적으로 2017년 국립강화문화재 연구소에 취향교 및 교대 추정지를 대상으로 발굴조사가 진행 되었다. 조사 결과, 취향교의 원위치 및 원형 검토에 필요한 학 술자료와 향원정의 초축연대 파악이 가능한 연대측정 자료 가 확보되어 향후 복원 연구에 있어 큰 획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본고에서는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실시된 발 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향원정의 초축연대와 취향교의 변화 과정에 대해 검토해 보기로 한다
향원정과 취향교는 경복궁의 원림, 다시 말해 후원에 자리 잡고 있으며 경복궁의 중축 선상에 위치한다. 향원정 (보물 제1759호)은 북쪽으로는 건청궁을 남쪽으로는 함화 당・집경당을 면하고 있다. 향원정은『고종실록(高宗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궁궐지(宮闕志)』,『경복궁배치도 (景福宮配置圖)』,『북궐도형(北闕圖形)』,『조선고적도보(朝鮮 古蹟圖譜)』등에서 기록이 확인되는데 이를 신뢰한다면 향 원정의 낙성시점이 1873년이므로 접근시설인 취향교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조선왕조 실록(朝鮮王朝實錄)』의 기록에 대궐 후원에 못을 파고 ‘취 로정(翠露亭)’을 만들었다는 기록도 확인되기 때문에 ‘향 원정‘의 전신을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취로정’이나 ‘서현정’ 으로 보는 선언적인 주장도 많았다.6 하지만 이 건물들의 연관성을 확정지어 볼 수 있는 실증자료가 부재하여 이러 한 의견은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현재 조선 전기의 자료로 추정7되고 있는 도면들을 참고할 경우, 취로 정 뿐만이 아니라 아미산 뒤편의 연지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위치했던 서현정(序賢亭), 관저전(關雎亭), 충순당(忠順 堂)(충순정)8, 접송정(接松亭)까지도 향원정과의 개연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향원정과 취향교에 대한 기록은 [궁궐 지]나 조선 후기의 도설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지만 취로 정이나 서현정과 같은 경복궁 중건 이전에 후원에 존재하 였던 정자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고종대 이전의 도형(圖 形)이나 도설(圖說)9이 필요하다.
창건기의 모습을 보여주 는 자료들은 현전하지 않지만, 18세기 영·정조대에 제작된 도설10들이 일부 전해지고 있어 이를 통해 임란 이전의 경 복궁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도설들 은 건물이나 지형에 대한 묘사가 간략화 되어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연못과 정자가 표기되어 있어도 그 명칭을 생 략한 경우가 대다수이다. 명칭이 표기된 도면들을 중심으 로 살펴 본다면 먼저 소더비 한국미술 경매전에 출품되어 알려진 『경복궁도(景福宮圖)』의 경우, 사각형 연못에 서현 정과 충순정이 표현되어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경복궁도』의 경우에는 충순당과 서현정, 취로정, 접 송정이 서쪽부터 표기가 되어 있으며, 취로정 남편으로 작은 사각형의 연못이 있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 된 『경복궁고도(景福宮古圖)』에는 사각형의 연못을 사이에 두고 서편에는 충순당과 서현정, 동편에는 취로정과 접 송정이 그려져 있는데 연못 내부에 섬이 존재하는 것처럼 묘사된 부분은 다른 도면들과 다른 점이기 때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그림 1).
향원정과 취향교와 관련된 공식적 기록은 1930년 발간된 『조선고적도보』 10권의 기록이 마지 막이며 해방 후 한국전쟁을 거치며 전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의 모습은 종전 후에 재건된 것이다. 전술한 바 와 같이 향원정과 관련한 공식기록을 참고할 때, 낙성시점 은 1873년으로 비정할 수 있고 당시 고종이 거주하던 건 청궁에서 향원정으로 건너가는 방향에 취향교가 놓여있어 정황상, 현재의 향원정과 취향교는 건청궁이 만들어진 조 선 후기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정황증거 이 외에 향원정과 취향교의 실제 축조시기를 가늠할 직접증거 가 부재하여 건물복원이나 정비에 있어 불요한 논란이 존재하는 것이다. 실제조사를 통해 정비의 기준이 될 수 있는 초축연대를 제시해 둘 필요가 있다
전술했듯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취로정이나 서현 정이 향원정의 전신일 것으로 비정되고 있지만 태조시기 후원에 조성된 연못이 향원지일 것이라는 주장을 지지하 는 직접증거는 아직 확인된 바가 없다. 경복궁의 후원영역 을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와도 연관되는 문제인데 『북궐도 형』에 표기된 후원영역, 다시말해 현재의 청와대까지 범위 를 넓혀 볼 경우, 향원정의 초축 연대는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기 때문이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의 자료 중에는 향원정과 취향 교가 촬영된 사진이 일부 남아있는데 향원정은 지붕상부 의 찰주가 2가지 형태로 취향교의 경우, 다리의 형태가 4 가지 이상이 존재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문제는 사진촬영 시점이 기록되어 있지 않아 ‘향원정과 취향교의 본래 모습 이 어떤 것이었는지’, ‘어떻게 변형되어 왔는지’에 대한 실증이 어려웠던 것이다. 심지어 현재의 취향교는 한국전쟁 이 후11, 경복궁을 정비·보수하는 과정에서 정확한 고증없이 재건된 것이라 외형은 물론이거니와 복원 위치도 과거 기록과 부합하지 않고 있다. 본 장에서는 발굴조사와 사진자 료 검토를 토대로 확인한 향원정의 조성시기와 취향교의 변화과정에 대하여 설명하도록 한다.
1. 향원정의 조성시기
발굴조사에서는 취향교 추정지에 대한 조사와 함께 향원정이 위치한 향원지 내 가도(假島)에 대한 트렌치 조 사도 이루어졌다. 조사는 현재의 표토층 아래로 2.5m 아 래까지 수직 하강조사를 실시하였으며 인위적으로 형성시 킨 성토층을 확인하였다. 성토층은 적갈색의 사질점토와 회갈색의 점질토를 40cm 정도 두께로 번갈아가면서 시루 떡 같이 쌓아올렸는데 조사단은 성토층에서 확인되는 회 갈색의 점토과 회흑색의 사질점토를 환원작용에 노출되어 형성된 토양으로 판단하였다(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2018). 정황 증거로 판단한다면 성토에 활용된 흙은 향원지를 조 성하며 나온 Backdirt(굴광한 흙) 혹은 이미 존재했던 연 못의 바닥을 준설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토사를 활용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조사단은 트렌치 단면에서 관찰 되는 성토양상에서 특별한 보강공사나 재성토 흔적이 관 찰되지 않기 때문에 가도를 구성하는 성토층이 단일공정 을 통해 조성된 것으로 판단하였는데 이 해석을 존중한다 면, 향원정이 설치된 가도(假島)는 연못을 조성하면서 배 출된 흙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쌓아올린 것일 가능성이 높 다고 할 수 있다(그림 3, 4). 지금까지 경복궁 내 건축물들의 조성연대를 판단하 는 수단들은 남아있는 건물의 양식적 형태를 검토(문화재 청 2013)한다거나 출토유물 분석 등을 통한 상대편년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문화재청 2013).
하지만 유적편년과 관련한 최근의 연구경향을 고려한다면 경복궁도 관성적으로 적용시키던 상대연대 편년법에서 탈 피해 유적 연대를 검토해 볼 필요성이 있다. 이러한 관점에 서 향원지 가도에 대한 조사에서는 성토층에서 수습한 목 탄과 유기물에 대한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이 실시되었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2018). 고고학 발굴현장에서는 출토 유물의 재질 및 연대의 상·하한 범위에 따라 다양한 절 대연대측정법이 활용되는데 이 중 방사성탄소 연대측정 (Radiocarbon agedating)은 방사성동위원소의 반감기를 이용한 여러 연대측정법 중 비교적 짧은 반감기로 인하여 고고학 및 지질학 분야에서 다양하게 활용되는 절대연대 측정법이며, 목탄, 나무, 뼈, 패각, 생물체 및 생물체의 잔여 물 등 탄소를 포함하고 있는 것들을 대상으로 한다.
특히 AMS(Accelerator Mass Spectrometry) 연대측정은 아주 미세한 양의 유기체에 대해서도 정밀한 측정을 시행할 수 있기 때문에 최근의 C14연대측정은 모두 AMS를 통해 이 루어지고 있다. 방사성탄소연대 측정의 전제는 대기 중의 방사성탄 소농도가 일정해야 한다는 가정이 필수적이나 과거 Late Pleistocene에서 현재까지 대기 중의 방사성탄소양이 몇 번의 변화13를 겪어 왔기 때문에 시료로서 활용되는 연대는 시료의 생명활동이 멈춘 Calendar Age와의 차이를 보정하기 위해 보정곡선(Calibration Curve)을 이용해 보정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보정곡선이 활용되기 시작된 이래 지속적인 오차의 보정이 이루어졌지만 아직까지 명확한 보정곡선을 보이지 못하는 구간도 있다. 대표적으로 AD500년을 전후한 시기 와 조선시대의 일부 구간 등이 그에 해당된다. 탄소연대 고 원기(C14 Plateu Period)로 지칭되기도 하는 연대 구간인 데 이러한 이유로 중·근세의 유적에 탄소연대측정을 활용 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일부 존재하는 것이 사실 이다.
하지만 연대측정 방법이나 오차보정과 관련하여 지 속적인 연구와 개량이 이루어지고 있고 편년과정에서 절 대연대측정 결과가 요구되는 상황도 빈번하기 때문에 오용을 경계해야 하는 것이지 무조건적인 불신을 하는 것을 올 바른 연구태도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하간에 성토 층 수습 시료에 대한 AMS 연대측정을 통해 지층의 형성된 시기의 상한을 파악하는 것이 가능한데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성토층에 포함된 샘플의 연대보다 지층의 형성시기를 올려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향원정 하부 성토층에서는 총 6점의 시료가 채취되 었으며 이 가운데 샘플오류가 발생한 1점을 제외하고 5점 에 대한 AMS연대측정 결과가 도출되었다. 5점 가운데 3점은 Conventional Age가 1800±30BP, 4350±30BP, 3990± 30BP로 측정되었는데 연대측정과정에서 오류가 없는 발굴 현장에서도 유적의 대표연대를 상회하는 연대가 측정되는 경우도 빈번하기 때문에 문제의 소지는 적다고 판단된다.
향원정 가도의 조성연대와 연관시켜 볼 수 있는 것은 시료 1번과 5번의 연대이다. 시료 1번은 Conventional Age가 120±30BP, 시료 5번 170±30BP가 측정(국립강화문화재 연구소 2018)되었는데 두 성토층이 동일한 시점에 형성되 었다는 점을 고려하여 두 시료의 결합연대를 측정한 결과는 다음와 같다(그림 5).15 주목해 볼 부분은 두 시료의 결 합연대의 확률분포가 대부분 1700년 이후의 시간대에 집 중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채취된 샘플들의 생성 연대가 조선 후기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따라서 샘플이 채취 된 성토층의 연대도 조선 후기보다 올라가기 어렵다는 의미가 된다. AMS연대측정 결과를 신뢰한다면 적어도 향원 정이 위치한 향원지 내 가도는 1700년 이후의 어느 시점에 조성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임진왜란으로 인한 경복궁의 전소(1592년),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1865~1868년)등의 사건으로 미루어 본다면 고종대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거나 경복궁 중건이 완료된 이후, 건청궁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함께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향원지 가도의 조성연대를 경복궁 중건기로 해석하 는 것이 허락된다면 취로정을 향원정의 전신으로 보는 의견은 철훼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아울러 조선 전기 후원에 위치했던 전각들인 서현정, 관저전, 충순당도 향원 정과의 개연성이 매우 희박해졌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몇 가지 다른 가능성도 상정해 볼 수 있다. AMS연대측정 결과는 향원지 내의 가도에 한정된 것이기 때문에 향원지 자체의 축조연대를 반영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조선 전기의 궁궐 전경을 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몇몇 도면에는 아미산 뒤편으로 취로정이나 서현 정, 관저전, 충순당이 묘사되어 있고 건물 전면으로 명명되지 않은 연못이 확인된다.
남아있는 도면들이 정확한 축척 을 기반으로 작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묘사된 건물이나 연못의 위치 역시, 현재의 향원지의 위치와 비교된다. 물론 묘사된 연못의 규모가 협소하고 평 면형태도 상이하며 연못에 가도따위도 확인되지 않는 차 이점도 있다. 만약 이 도면들에 표시된 연못이 향원지의 전신이라면 태조대 후원에 조성했던 연못을 경복궁 중건시 에 보수·확장시키면서 연못 안에 새로이 가도를 만들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 시점에서 취향교의 원배치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조선 후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경복궁배치도(고려대박물관 소장)』와 『북궐도형(국립문화재연구소 소 장)』이 있다. 『경복궁배치도』를 『북궐도형』보다 약간 앞선 시기로 보는 견해(문화재청 2002; 이혜원 2008; 국립문화 재연구소 2006, 2013)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데 두 도면은 상이한 부분이 꽤나 존재하지만 취향교와 관 련한 내용은 거의 일치하고 있다.
두 자료에서는 모두 근 정전 중심축과 연결되는 정북방향으로 취향교가 표시되어 있지만 『조선고적도보』, 『조선총독부 부지평면도』 등 근대 적인 측량기법이 적용된 도면에는 취향교가 주요 전각들 의 중심축을 기준으로 동쪽으로 3.5~5도 정도 기울어져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그림 2). 현전하는 문헌에는 현재의 위치와는 다르게 취향교가 건청궁과 연결되는 북쪽에 위 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현재 남아있는 구한말 의 사진자료에서도 확인된다.
발굴조사 이전에는 향원정 북편에 남아있는 석축이 취향교의 교대로 여겨지고 있었 으나 조사 결과, 후대에 다시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반면 석축 주변에 대한 조사과정에서 확인된 보도석이 취 향교와 향원정을 연결하는 모양새로 확인되었는데 별다른 교란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미뤄 볼 때, 지금 남아 있는 석축 역시, 원)취향교의 위치를 고려하여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그림 11). 구한말의 자료 중에는 향원정 및 취향교가 촬영된 사진 혹은 사진을 도상으로 하여 묘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엽서들이 일부 남아있다(그림 10).
대체로 취향교 북서 편에서 동편을 바라보며 촬영한 사진과 남서편에서 동편 을 바라보고 촬영한 사진이 남아있는데 향원정과 취향교 의 본래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는 자료로서 매우 중요하 게 다뤄지고 있었다. 문제는 몇몇 사진을 제외하고는 각 사진들의 촬영시점을 특정할 수 없어 지금까지는 건물의 외 형에 근거, 대략적인 추정을 해 오고 있었다. 사진에서 향 원정은 지붕상부의 찰주가 2가지 형태로 취향교는 다리 의 형태가 4가지 이상이 존재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향원정의 찰주 형태를 근거로 다리상판이 약한 아치형태를 그리는 사진이 가장 이른 것으로 추정되고 있었지만 촬영 앵글 등의 문제로 다릿발의 개수나 형태, 색상 등을 파악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또한 향원정 찰주의 형태가 동 일한 사진들은 어떤 사진이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인지 나중 의 것인지에 대해 파악하기 어려워 취향교의 변화는 몇가지 추정에 근거하여 짐작되고 있었다.
(그림 10)을 통해 설 명한다면 촬영시점을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A, B의 사진이 가장 이른 시기에 촬영되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으며, D, E, G번 사진이 그 이후 단계, C, F번 사진이 가장 늦은 단계의 것이다. 취향교지 발굴조사를 통해 적심 3열과 목주 7열이 확인되었는데 목주는 적심보다 늦은 단계에 조성 된 것이 층서관계에서 확인되어 취향교 교각의 변화과정에 대한 파악이 일정부분 가능하게 되었다.
먼저 적심은 경간 거리가 약 6m, 폭이 4.3m 정도로 조성되어 있으며 최초의 취향교는 다릿발 6개였다는 것이 확인되었다(국립강화문 화재연구소 2018). 적심은 둘레 약 1m 정도로 평면원형을 의도하고 조성하였는데 향원지의 바닥층을 굴광하고 돌을 채워넣은 형태이다. 적심에서는 주변의 석재들을 재활용한 모습도 관찰되고 있어서 다리의 조성이 이른 시기가 아닐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그림 6, 7). 목주들은 경간 거리가 1.5~3.5m, 너비는 2.5~2.8m 정 도로 다소 불규칙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조사단은 목주의 분포양상을 통해 최소한 2개 이상의 평면계획이 중첩되어 있을 가능성을 상정하였다.
사진에서 확인되는 교각의 형태 를 고려할 때 조사단의 해석은 타당한 것으로 보여진다(그 림 11). 목주는 굴광없이 나무기둥을 원지반에 박아 넣어 조성하였는데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전통적인 공법보다는 일본식에 가깝다고 보여진다. 일부 목주의 경우 적심을 조성하기 위해 땅을 굴광한 범위의 안쪽에 설치된 것이 확인 되기 때문에 적심보다 늦은 단계의 것임이 확인된다(그림 6). 목주는 끝부분을 뾰족하게 다듬은 형태인데 표피가 그 대로 남아있어 공을 들여 가공한 목재는 아닌 것으로 보인 다.
현재 약1.2~1.4m 정도 높이로 남아있는데 일정하게 절 단면이 확인되는 것으로 볼 때, 특정시점에 일괄적으로 훼 철되었을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그림 8). 발굴조사 결과를 기초로 시간성을 반영하는 속성을 분류, 이를 기준 으로 사진들을 순서배열할 경우, 취향교는 6개의 다리발을 가지고 교각상판이 약한 아치를 그리는 교각에서 여러개 의 다리발을 가진 평교에 가까운 형태로 변화하였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표 2).
한편 취향교 북편교대 추정지에 대한 트렌치 조사과 정에서 건청궁 조사(중앙문화재연구원 2003)에서 확인되 었던 석조암거의 연장렬이 확인되었다(사진 9). 현재 북편 교대와 관련된 시설이 남아있지 않아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정황적으로 판단할 때, 교대 아래로 암거를 조성하고 교대 를 완성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석조암거는 건청궁과 관련 된 배수시설이기 때문에 건청궁 건립을 위한 기초공사 단 계에서 만들어졌을 것인데 이를 감안하면 교대의 축조가 건청궁 공사보다 앞설 수 없으므로 취향교가 조선 후기에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취향교지와 향원정 교대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는 향원정 및 취향교 복원과 관련하여 진행되고 있는 연구들에 대하여 해석의 기준이 될 수 있는 레퍼런스를 제시하였다 는 부분에서 평가할 만하다. 먼저 취로정을 포함하여 서현정, 관저전, 충순당 등 조선 전기의 기록에서 나타나는 후원 건물들은 현재의 향 원정과 연결시켜 볼 여지가 축소되었다. 향원정 가도에 대 한 AMS연대측정 결과는 적어도 가도가 조선 후기에 조성 되었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때문에 향원정의 조성연대를 조선 전기까지 올려보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물론 AMS연 대는 가도의 성토층에 대한 검토 결과이기 때문에 향원지 자체의 조성연대가 이보다 올라갈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전하는 도형이나 도설들을 참고할 때, 그러할 여지는 높지 않을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연못 바닥에 남아있던 목교의 적심을 발견한 것은 취향교의 원형을 검토할 수 있는 결정적 자료를 확보한 것이 다.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없던 元취향교의 다릿발 수와 다리 규모에 대한 검증이 가능해졌다. 이외에도 후대 목교 의 주립법(柱立法)이 목주를 땅에 밖아 넣는 일본적인 특 징을 보이고 있다는 점, 다리의 형태와 규모는 계속 변화하 였지만 元목교의 위치를 고수했다는 점, 북편교대가 건청 궁의 배수시설보다 늦은 단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확 인할 수 있었다. 유적복원 특히 건축물의 복원에 있어 축 조 시기와 같은 건립배경에 대한 정확한 검토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설계에 앞서 복원에 적용해야 하는 건축양식과 건축당시의 공법 등을 유추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본 연구의 결과가 향원정과 취향교를 올바르게 복원하는데 미 약하게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위 논문을 일독하는 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우리 문화재의 소중함은 물론, 경복궁 향원정과 취향교에 얽힌 여러 정보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짬짬이 몇 번 더 읽으며 논문 작성자의 수고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한다. 서두에 잠시 언급했지만, 세상 그 어떤 풍경이든 정치와 종교 체재와 이념 등이 가미되면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식상하게 마련이다. 대자연이란 세상 사람들이 품고 있는 마음과 전혀 다른법이니 말이다. 위 논문에서 생략된 사진과 표 등은 아래 첨부한 PDF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즐감하시기 바란다.
il bellissimo palazzo della Repubblica di Corea_Gyeongbokgung(景福宮)
il 18 Giugno 2022, La Disfida di Barletta in Pugl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