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전차에 집착했던 걸까
여자 사람들은 잘 모르는 남자 사람들의 호기심..?!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풍경 속에 오래 전의 추억이 묻어있다. 그 추억들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가 어느 날 깨어나곤 했다. 이틀 전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la stazione di Santa Maria Novella_SMN) 역전에서 까마득히 잊고 살던 추억 하나가 되살아 났다. 집에서 가까운 이곳은 피렌체를 방문하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한 번쯤은 들르는 곳으로 연중 사람들이 붐빈다.
또 피렌체를 벗어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으로 근처에 버스 터미널이 있고 전차(il Tram) 정류장이 있다. 아울러 피렌체 서북쪽에 위치한 공원(Parco delle Cascine) 혹은 아르노 강(Fiume Arno) 가로 산책을 가려면 역전을 지나쳐야 한다. 따라서 이곳은 우리는 물론 관광객들과 피렌체 시민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곳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이곳에서 나는 평소와 다른 나의 습관 하나를 발견하게 됐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la stazione di Santa Maria Novella_SMN) 역(우측 상단)전의 풍경
어느 날, 직선과 곡선이 조화를 이룬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전의 풍경을 사진과 영상에 담았는데 그 과정이 재밌었다. 귓전을 자극하는 쇳소리를 내며 미끄러지듯 천천히 움직이는 전차는 물론 승객들이 빤히 들여다 보이는 전차의 움직임이 호기심을 끌었다. 전차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직선 위의 전선에 있고, 그 아래 곡선은 전차가 다닐 수 있는 철로가 길게 이어지고 있는 것. 사람들은 직선과 곡선 위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왜 그랬는지 내겐 전차의 메커니즘보다 전차에 매우 가까이 접근하는 게 너무 좋았다. 그렇지만 이렇듯 평범한 풍경들은 나의 호기심 더 끌어내지 못하고 몇 번 되풀이하던 습관을 그만둔 것이다. 그리고 며칠 전, 그 습관들이 나의 오랜 추억과 연관이 있음을 알아챘다. 나의 오랜 기억들.. 그 속에 돌아가신 할머니와 전차가 고스란히 묻어나 있는 것. 나는 까마득한 과거의 시간 속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풍경 속에서 나는 할머니와 함께 어디론가 떠나고 있었다. 그곳은 집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길바닥에는 기다란 철로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 철로 위를 다니던 물체가 전차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다. 할머니는 나의 손을 붙들고 전차에 올랐는데 버스와 다르게 생긴 전차의 생김새 때문에 무서웠다. 무서워했었다.
전차는 쇳소리를 내며 출발했는데 가끔씩 천정에서 불이 번쩍거렸다. 벌판을 지나나 싶더니 이내 미나리꽝이 나타났다. 전차 창으로 본 미나리꽝의 녹색 풍경은 지금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을 만큼 강렬했다. 그리고 전차를 탄 목적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그곳은 동래 온천장이라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할머니와 나는 부산의 서면에서부터 동래 온천장까지 이동했던 것이며, 미나리꽝이 길게 이어진 곳은 지금의 연산동이었던 것.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풍경이 내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었고, 그 기억들은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전을 오가는 전차 때문에 어느 날 화들짝 깨어나게 된 것이다.
FIRENZE_할머니와 함께 간 여탕의 풍경 LA MEMORIA DEL ESPRESSIONE DI BAGNO DI DONNE E IL TRAM
나는 할머니와 함께 난생처음 여탕에 들어간 것이다. 내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던 전차는 물론, 전찻길과 전차 안의 풍경과 전차 창밖으로 보이던 미나리꽝처럼 여탕의 풍경은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목욕탕을 가 보지 않은 사람들은(그럴 리가 있나) 모르겠지만 목욕탕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탈의실의 풍경이 한 눈에 쏙 들어오는 것.
그곳에는 내 몸의 생김새와 전혀 다른 여자 사람들이 옷을 벗고 있거나 주섬주섬 옷을 입고 있었다. 그때 한 아주머니가 할머니를 향해 나지막이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여탕에 웬 남자를 데리고 왔느냐는 항변이었다. 내 시선은 단박에 그쪽으로 향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의 몸에서 거뭇한 털과 늘어진 유방이 눈에 띈 것도 잠시, 그녀는 투덜댓다.
"할머니, 얘는 너무 커요. 이런 아이를 여탕에 데리고 오면 안 되지요.."
그녀는 내가 남자 사람으로 보였을까. 그때 내 나이는 고작 다섯 살.. 명절이 되면 종가의 맏며느리는 바쁘다. 바빴다. 어머니께선 연중 치러지는 제사는 물론 설날과 추석 때가 되면 할머니께 부탁을 하곤 했다. 나는 물론 동생들을 데리고 목욕탕을 갔던 것이다. 이유가 있었다. 어린 녀석들이 목욕탕에서 혼자 때를 잘 밀 수도 없거니와 당시에는 자주 목욕탕에 갈 수도 없었으므로, 날을 잡아 온천장으로 보냈던 것.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지만 60년대 초부터 대략 70년대까지만 해도 명절만 되면 목욕탕 속은 발을 디딜 틈 조차 없을 정도로 붐볐다. 여탕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발가벗은 여자 사람들을 실컷 보게 된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 또 마지막이었다. 아울러 나는 그런 여탕 혹은 온천장이 너무 싫었다. 할머니께선 나를 탕 속에 밀어 넣고 때를 불릴 셈이었는데 탕 속에 발을 들여다 놓는 순간 나는 까무러칠 정도로 놀랐다. 이랬지..
"이 놈아 들어와 봐 봐.. 하나도 안 뜨거워..!"
(하나도 안 뜨겁긴..ㅜ ) 서두에 이렇게 끼적거렸지. 여자 사람들은 잘 모르는 남자 사람들의 호기심이라고.. 고작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의 머릿속에 여성의 육체가 어떻게 그려지겠는가. 할머니와 함께 홀라당 다 벗고 목욕을 하고 왔는데 말이다. 그날 내 머릿속에 남은 기억들은 이게 거의 전부였다. 할머니와 전차 그리고 전차 선로와 미나리꽝과 여탕에서 겪었던 해프닝.. 온천장의 물이 그렇게 뜨거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