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일주 여행서 만난 마추픽추의 오래된 추억
얼마나 힘들었을까..?!!
서기 2023년 4월 7일 부활절 전야에 남미일주 여행에서 만난 잉카트레일 사진첩을 열어보고 있다. 생애 최고의 선택이자 여행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였으므로 그저 앞만 보고 걸었다. 그렇게 쌓인 발자국들이 모여 한 인생의 기록 속에 남게 되는 것이랄까. 지난 여정 <잉카의 길 마지막 날 펑펑 운 아내> 편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는 마침내 잉카의 심장 마추픽추 정상에 올라섰다..!
아내는 목놓아 펑펑 울었다. 얼마나 크고 서러운 울음이었던지 산타 테레사 로지(Santa Teresa Lodge)가 떠나갈 듯했다. 그곳은 일주일간의 잉카 트레일이 끝날 무렵에 이곳을 찾은 여행자들이 하룻밤을 노지에서 묵는 곳이었다. 잔디밭에 텐트를 여러 개 쳐 놓고 하룻밤을 야영하게 되는 것이다.
좌측 상단의 뾰족한 두 봉우리가 마츄픽츄가 위한 곳이라고 가이드가 설명해 주었다.
이 같은 풍경은 잉카 트레일(Camino del Inca-잉카의 길)이 끝날 때까지 계속됐는데 산타 테레사 로지의 야영은 지금까지 해 왔던 야영과 조금 다른 의미가 있었다. 머나먼 여정을 끝마치고 하룻밤만 자고 나면 잉카의 심장이라 불러야 좋은 마추픽추에 입성할 수 있는 곳이었다.
로지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잉카문명을 일군 우루밤바 강을 건너게 되고, 강 옆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하루 종일 걸으면 마추픽추의 배후 도시 아구아 깔리엔떼스에 도착하는 것. 그리고 그다음 날 잉카 트레일의 대장정을 끝내는 공중도시 마추픽추에 도착하는 여정이었다.
그동안 사람들은 기진맥진한 상태로 땅거미가 진 로지에서 피스코나 맥주 등을 마시며 곧 잠들 채비를 하고 있었던 것. 그 순간 텐트 속에서 아내가 목놓아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처음엔 잠시 흐느끼는가 싶더니 그 흐느낌은 로지를 크게 진동시켰다. 울음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로지 사람들이 하나둘씩 우리 텐트로 몰려들었다.
"제발 그만 좀 울어..!!"
사람들은 '무엇 때문인지' 혹은 '괜찮은지' 물었는데 나는 "별일 아니다"라고 말하며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런데 아내의 울음은 여전히 그치지 않았다. 서럽게 우는 아이들 울음소리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랄까. 급기야 누군가 우리 텐트에 문제가 있다며 경찰을 불렀다.
출동한 경찰은 텐트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며 플래시로 텐트 내부를 비추며 "무슨 일이냐"며 물었다. 그래서 "아내가 가끔 술을 마시면 이런 행동을 보인다"며 얼렁뚱땅 아무런 일도 없다고 말해 그들을 돌려보냈다. 소동은 그것으로 끝났다. 아내는 도무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힘들었던 것일까.. 아이들처럼 훌쩍거리더니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대략 난감한 사정에 처한 것도 잠시 산타 테레사의 밤은 깊어만 갔다.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 마지막 여정에 돌입했다. 로지를 출발한 우리는 우루밤바 강 옆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정말 힘든 여정이었다. 가만히 따지고 보면 군대생활의 행군은 비교가 안 될 정도랄까. 그나마 나의 배낭을 책임져준 짐꾼은 산타 테레사에 도착하기 전에 임무를 마치고 헤어졌다. 그는 쿠스코로 되돌아갔다.
그래서 이때부터 등에 맨 배낭은 지구를 떠받치는 듯 나를 힘들게 했다, 배낭만 없어도 날아갈 듯했을 텐데 60리터용 배낭 대부분을 채운 묵직하고 커다란 배낭은, 아구아 깔리엔떼스(Agua Calientes)까지 이어지는 여정을 너무도 힘들게 한 것이다. 강 옆을 따라 그리고 다시 철길을 따라 해질 때까지 걷자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 요즘 생각해 보면 끔찍한 경험을 여행을 통해 한 것이다.
또 산을 통해 단련된 아내였지만 일주일간 꼬박 이어지는 강행군 앞에서 죽을 만큼 힘든 고통을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우리의 나이를 일행들과 비교해 보면 일행들은 아들 딸 같은 청춘들이 다수였다. 그맘때 체력은 자고 나면 거뜬해질 때지만 우리는 달랐다. 나의 입술은 바짝 타 들어갔고 얼굴은 까맣게 그슬려 잉카인을 쏙 빼닮았다. 행색 혹은 몰골이 말이 아니었던 것.
아내의 겉모습은 나 보다 덜했지만 피곤에 쩐 모습이 역력했다. 그런 모습으로 마지막 여정을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를 안내했던 현지 가이드는 생생한 모습으로 저만치 앞서 걸었다. 그는 그냥 길잡이 역할만 할 뿐 무슨 설명 같은 게 필요 없었다. 우리는 이곳을 찾기 전에 잉카 트레일이 어떤 것인지 미리 알고 왔지만, 트레일이 시작된 이후 잠시라도 이 여정의 속성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눈만 뜨면 이어지는 강행군 때문에 녹초가 된 것.
사람들은 남미 최고의 여행지 중 한 곳인 마추픽추(Machu picchu_케츄아어로 '늙은 산'이란 뜻)에 대해 곧잘 '불가사의'라 부른다. 마추픽추에 서면 눈앞 산꼭대기에 펼쳐진 믿기지 않은 유적지는 물론, 장엄한 안데스 산맥이 하늘길처럼 길게 펼쳐져 있는 곳. 잉카 트레일은 고대 잉카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Cusco)를 출발해 공중도시라 불리는 마추픽추까지 대략 일주일 동안 걷게 되는 프로그램이다.
이 여정에 세 명의 가이드가 포함됐는데 두 사람은 우리 짐을 떠맡은 말을 모는 인부와 요리사 그리고 가이드가 포함됐다. 몇 가지 코스 중에 우리가 선택한 잉카 트레일 코스는, 쿠스코를 출발한 후 왈라밤바(Wayllabamba)까지 이동하여 마추픽추에 도착한 다음, 다시 쿠스코로 되돌아가는 일주일간의 여정이었지만 기나긴 여정으로 느껴졌다.
잉카 트레일 즉 잉카의 길은 페루의 수도 쿠스코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펼쳐져 있다. 잉카시대의 전성기 때는 이 길의 길이가 총연장 3~4만 km나 되었다고 전한다. 이 길에는 땀보(예: 오얀따이 땀보_Ollantaytambo)라는 객사를 설치했다, 또 차스끼(chasqui)라 부르는 파발꾼이 쏜살처럼 사방으로 드나들었다고 전한다.
오늘날 정보 시스템을 참고하면 매우 원시적이지만, 당시를 생각해 보면 놀라운 통신 시스템이었다. 비록 오늘날 잉카의 후예들은 여행자들을 위해 짐을 나르고 끼니를 챙겨주는 역할로 형편이 초라해졌지만, 잉카인들의 기상을 보면 위대함 그 자체였다고나 할까. 우리는 고산증세에 시달리며 하루 종일 걷는 동안 초주검이 됐지만 그들은 여전히 멀쩡한 몸으로 우리보다 한참 앞서 걸으며, 로지에 도착할 때마다 밥을 지어놓고 우리를 기다렸던 것.
우리는 로지에 도착하자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금세 곯아떨어지곤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내가 아이들처럼 목놓아 펑펑 운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또 당신의 울음 속에는 삶의 회한이 깊숙이 박혀있었을 게 아닌가.. (그게 다 나 때문인 거라 생각하니 괜히 쫄아들었었다,ㅜ)
바람도 쉬어가야 할 이 산중에 지어둔 공중도시 마추픽추는, 잉카인들이 죽기 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가 보고 싶어 하는 잉카의 심장이 위치한 곳이다. 잉카의 길은 '파발꾼의 길' 역할을 한 것뿐만 아니라. 순례길의 종점이었던 것.
협곡 속을 달리는 기차는 꾸스꼬(Cusco)서 아구아스 깔리엔떼스(Aguas Calientes)까지 운행된다.
페루 곳곳을 여행하면서 만나게 된 잉카인들의 삶은 그야말로 기적같이 보였다. 깎아지른 산비탈에서 농사를 짓는 것은 물론, 밤이 되면 얼음장처럼 꽁꽁 언 차가운 집안에서 밤을 지새우는 것이다. 그들은 양털, 라마나 혹은 알파카로 만든 가리개 하나로 몸을 가리며 별을 헤다 지쳐 잠들었다고나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누구를 헤칠 나쁜 마음이나 욕심하나 없이 대를 이어 안데스에 둥지를 틀고 살아온 것이다. 그들에게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사후에 당신의 영혼을 하늘에 데려다 줄 안데스의 독수리를 닮은 마추픽추에 가 보는 것. 세상이 제아무리 당신을 힘들게 할지라도 그들에게 마추픽추는 당신의 삶을 지켜주는 신앙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어느 날 스페인에서 건너온 침탈자 피사로로부터 당신들이 일군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일설에 따르면 이들 잉카인들이 망하게 된 주요인은 잉카의 길 때문이란다. 침탈자들이 데려온 말은 잉카의 길을 따라 단박에 잉카의 심장에 다다르는 것.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의 배꼽이란 이름의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가 그들이 만들어 놓은 통신망 때문에 속절없이 무너진 것. 그리고 어느 날 역사 속에 묻혀 있던 공중도시가 발견됐다.
꽤 오래전 나의 블로그에 기록해 두었던 당시 자료를 살펴보니 이랬다. 마추픽추는 1911년 7월 24일 미국의 대학 교수인 하이렘 빙엄에 의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이 서양 학자에 의해 발견되기 전까지는 수풀에 묻힌 채 그 존재를 몰랐기 때문에 마추픽추를 "잃어버린 도시"또는 "공중 도시"라고 불리는데 공중도시라고 불리는 이유는 산과 절벽, 밀림에 가려 밑에서는 전혀 볼 수 없고, 오직 공중에서만 존재를 확인할 수 있어서이다.
마추픽추는 총면적이 5Km로 도시 절반 가량이 경사면에 세워져 있고, 유적 주위는 성벽으로 견고하게 둘러 싸여 완전한 요새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 마추픽추(2,280m)는 옛 잉카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3,360m)에서 산악 열차를 타고 안데스 산맥의 협곡을 따라 3시간 거리에 있다.
또한 마추픽추는 산꼭대기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산 위에서는 계곡이 다 내려다 보이지만, 계곡에서는 어디에서 올려다 보아도 그 존재를 알 수 없고 접근조차 어렵다. 마추픽추에는 약 1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산정과 가파른 경사면에 들어서 있어 스페인 정복자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유일한 잉카의 위대한 유산이었다.
정확한 건설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대략 2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며 이곳에 태양신전과 생계유지를 위한 산비탈의 계단식 밭, 훼손됐을 법한 지붕 없는 집, 농사를 짓는데 이용한 태양 시계, 콘돌 모양의 바위, 그리고 제단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측되는 거대한 피라미드로 구성되어 있다.
마추픽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수준 높은 건축기술이라 할 수 있다. 커다란 돌을 다듬는 기술이 대단히 정교하며 다듬어진 돌의 각 변의 길이가 몇 m나 되고 모양도 제 각각인 돌들을 정확하게 잘라 붙여서 성벽과 건물을 세웠다. 종이 한 장도 들어갈 틈이 없이 단단하고 치밀하게 붙였으며, 젖은 모래를 표면 처리에 이용함으로써 표면을 매끄럽게 했다.
가파른 산비탈을 개간하여 계단식 밭을 만들고, 여기에 배수시설까지 완벽하게 갖추게 했으며, 모든 이용 시설에 필요한 자재로 돌을 이용했다는 점에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불리는 불후의 유적으로 꼽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1911년 하이렘 빙엄이 왕궁과 기타 부속건물을 복원한 뒤로 1956년부터 대규모 발굴과 복원이 이루어졌으며, 1974년에 일반적인 복원이 마무리됨으로써 마추픽추는 세계에 공개되었다. 그리고 아메리카 최고의 관광 유산으로 손꼽히는 고대 유적지가 된 것이다. 어느덧 15년의 세월이 훌쩍 지난 오래된 기록이 나의 블로그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아내가 혹사당할 줄도 모르고 철없이(?) 나섰던 남미 일주 여행에서 적지 않은 삶의 양식을 얻었다. 잉카의 길을 걸으면서 삶을 함부로 포기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만고의 진리랄까. 마추픽추에 서면 마주 보이는 거의 90도로 깎아지른 와이나 피추(Waynapiccu_케츄아어로 '젊은 산'이란 뜻)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그동안의 피로가 단번에 씻기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아내가 펑펑 울었던 로지에서 여정을 포기했더라면 우리는 결코 잉카의 심장 위에 우뚝 설 수 없었을 것이다. 잉카의 길에서 혹은 삶의 여정에서 무탈하게 잘 견뎌준 아내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우리는 마침내 5박 6일의 잉카트레일 일정을 끝마치고 산타 테레사 로지(Santa Teresa Lodge)에서 마츄픽츄이 베이스캠프인 아구아스 깔리엔떼스(Aguas Calientes)에 도착한 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포스트에 등재된 자료사진은 순서대로 편집 되었으며, 우리에겐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마침내 마추픽추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곳에 도착했던 것이다. 감개무량했다. 죽기 전에 꼭 한 번 가 보고 싶었던 잉카제국의 심장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부활전야에 돌아본 마추픽츄.. 멀고 먼 잉카트레일 마지막에 등장한 시비스러운 전경을 앞에 두고 있자니 엊그제 일처럼 선명하다. <계속>
Un vecchio ricordo di un viaggio in Sud America_Machu Picchu
Il 07 Aprile 2023, La Disfida di Barletta in ITAL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