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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그곳 Nov 27. 2019

나의 죽음을 적장에게 알려라

-뭍으로 잡혀온 게 고동의 최후 


나의 죽음을 적장에게 알려야 하는 이유..!!


서기 2019년 11월 26일 한 이틀 비를 쏟아붓던 우중충 하던 날씨가 거짓말같이 화창 화창.. 이날 오전 평소처럼 집에서 가까운 방파제로 산책 겸 운동을 나섰다. 날씨가 맑아서인지 바를레타 성 공원(Giardini del Castello di Barletta)의 숲을 이루고 있는 소나무 이파리들이 파릇파릇해 보인다. 공기도 너무 상쾌하다. 세상이 마치 유리구슬 속에 담아놓은 듯 반들거리는 것 같다. 이 같은 느낌은 방파제로 진입한 후부터 등주가 있는 끝까지 돌아올 때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또 집에 도착할 때까지 하루 종일.. 


이날 아침 방파제를 한 바퀴 돌아오면서 잊고 살던 우리 선조님 한 분을 떠올리게 됐다. 어른 주먹보다 더 큰 어느 게 고동 때문이었다. 세계 해전사에 길이길이 남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죽음에 얽힌 유명한 일화이다. 주지하다시피 충무공께서는 그 유명한 노량해전에서 적군이 쏜 총탄을 맞고 쓰러지셨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우리 수군의 사기를 드 높이는 한편, 왜적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최후의 유언을 남기셨다.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






노량해전을 기록한 당시 자료를 살펴보면 실로 엄청난 전과를 거둔 해전이었다. 전투 결과를 조정에 보고한 조선의 무신 좌의정 이덕형은 전투 현장을 조사한 후 이렇게 썼다.


좌의정 이덕형이 치계하였다.
“금월 19일 사천(泗川)•남해(南海)•고성(固城)에 있던 왜적의 배 3백여 척이 합세하여 노량도(露梁島)에 도착하자, 통제사 이순신이 수군을 거느리고 곧바로 나아가 맞이해 싸우고 중국 군사도 합세하여 진격하니, 왜적이 대패하여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고, 왜선(倭船) 2백여 척이 부서져 죽고 부상당한 자가 수천여 명입니다. 왜적의 시체와 부서진 배의 나무판자•무기 또는 의복 등이 바다를 뒤덮고 떠 있어 물이 흐르지 못하였고 바닷물이 온통 붉었습니다. 통제사 이순신과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 이영남(李英男), 낙안 군수(樂安郡守) 방덕룡(方德龍), 흥양 현감(興陽縣監) 고득장(高得蔣) 등 10여 명이 탄환을 맞아 죽었습니다. 남은 적선(賊船) 1백여 척은 남해(南海)로 도망쳤고 소굴에 머물러 있던 왜적은 왜선(倭船)이 대패하는 것을 보고는 소굴을 버리고 왜교(倭橋)로 도망쳤으며, 남해의 강 언덕에 옮겨 쌓아 놓았던 식량도 모두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소서행장(小西行長)도 왜선이 대패하는 것을 바라보고 먼바다로 도망쳐 갔습니다.”
사신은 논한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紀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 전일 통제사 원균(元均)은 비할 데 없이 탐학(貪虐)하여 크게 군사들의 인심을 잃고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배반하여 마침내 정유년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다. 원균이 죽은 뒤에 이순신으로 대체하자 순신이 처음 한산에 이르러 남은 군졸들을 수합하고 무기를 준비하며 둔전(屯田)을 개척하고 어염(魚鹽)을 판매하여 군량을 넉넉하게 하니 불과 몇 개월 만에 군대의 명성이 크게 떨쳐 범이 산에 있는 듯한 형세를 지녔다. 지금 예교(曳橋)의 전투에서 육군은 바라보고 전진하지 못하는데, 순신이 중국의 수군과 밤낮으로 혈전하여 많은 왜적을 참획(斬獲)하였다. 어느 날 저녁 왜적 4명이 배를 타고 나갔는데, 순신이 진인(陳璘)에게 고하기를 ‘이는 반드시 구원병을 요청하려고 나간 왜적일 것이다. 나간 지가 벌써 4일이 되었으니 내일쯤은 많은 군사가 반드시 이를 것이다. 우리 군사가 먼저 나아가 맞이해 싸우면 아마도 성공할 것이다.’ 하니, 진인이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순신이 눈물을 흘리며 굳이 청하자 진인이 허락하였다. 그래서 중국군과 노를 저어 밤새도록 나아가 날이 밝기 전에 노량(露梁)에 도착하니 과연 많은 왜적이 이르렀다. 불의에 진격하여 한참 혈전을 하던 중 순신이 몸소 왜적에게 활을 쏘다가 왜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아 선상(船上)에 쓰러지니 순신의 아들이 울려고 하고 군사들은 당황하였다. 이문욱(李文彧)이 곁에 있다가 울음을 멈추게 하고 옷으로 시체를 가려놓은 다음 북을 치며 진격하니 모든 군사들이 순신은 죽지 않았다고 여겨 용기를 내어 공격하였다. 왜적이 마침내 대패하니 사람들은 모두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고 하였다.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호남(湖南)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병신년과 정유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 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선조 106권, 31년(1598년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11월 27일(무신) 5번째 기사. 좌의정 이덕형이 수군의 활약상에 관한 치계를 올리다. 
-위 자료 출처: 노량해전_나무 위키 


고개가 절로 숙여지며 숙연해진다. 충무공께옵서 그냥 광화문에 서 계신 게 아니다. 역사라는 게 만약을 허용치 않지만, 만약.. 충무공께서 노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지금쯤 브런치에서 한글 대신 일본어를 끼적거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얼마나 기막힌 노릇인가. 다행히도 충무공과 용맹했던 조선 수군 덕분에 오늘날 IT강국의 면모를 세계만방에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죽음을 적장에게 알려야 하는 이유


그런데 이날 아침 숙연해야 할 우리 역사 앞에서 촐랑거리는 한 장면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다름 아닌 초대형 게 고동(IL PAGURO)이었다. 이날 방파제를 한 바퀴 돌아오면서 평소처럼 낚시꾼들의 동태를 살폈다. 대개 이들은 물통을 준비해 놓고 잡은 물고기를 가두어 놓고 있는데 평소와 다른 물체가 보여 허락을 얻고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을 남겼다. 


방파제 위에서 이른 아침부터 나와 사투(?) 끝에 얻은 그의 전리품은 초라했다. 손바닥보다 작은 물고기 다섯 마리가 고작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물통 속에 오늘의 주인공 게 고동 한 마리가 큼지막한 껍질 속을 들락날락하고 있었던 것이다. 


녀석이 생포된 이유는 간단했다. 낚시꾼이 녀석을 삶아 먹는 게 아니라 낚시의 미끼(보통 참돔의 미끼로 게 고동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로 사용하려고 한 것이다. 갑자기 녀석이 너무 애처로워졌다. 인간과 한 몸이 되는 게 아니라 물고기 밥이 되는 게 얼마나 억울한 노릇인가.. 그래서 들락거리는 녀석의 표정을 보니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아저씨, 저를 바다에 다시 놓아주라고 말해주세요. 자기가 먹을 것도 아니면서.ㅜㅜ"




IL PAGURO GIGANTE_초대형 게 고동
il 26 Novembre, La mattina Barletta
Foto di yookeun Chang_Geograf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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