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끼는 세상의 모든 것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게 있을까..?
봄볕이 화창한 오후, 해묵은 앨범을 정리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나 마나 세상 모든 게 늘 변화를 거듭하는 가운데 스스로도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게 사실이자 현실이었다. 그런데 날짜순으로 정리된 외장하드 가운데 변하는 듯 변하지 않는 모습을 발견하고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일상에서 주로 잊고 살던 키워드랄까. 우리 인간들의 오랜 욕망과 다름없는 부활의 모습이 화면 가득 펼쳐지며 나를 모니터 앞으로 끌어냈다.
"아저씨, 아저씬 제가 보고 싶지 않았어요?"
모니터 속에서 봄꽃들이 앙증맞은 자태를 하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녀석들은 대략 5년 전부터 나의 기억 속에서 멀어진 채 별거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녀석은 우리가 바쁘게 사는 동안 작은 공간 하나를 차지하고 입을 꾹 다문채 납작 엎드려 있었던 것.
"흠.. 내게도 이렇게 아름다운 추억이 있었다니..!"
녀석들이 살아가는 장소는 서울 강남구 일원의 대모산 어느 약수터 근처 길옆 풀숲인데 봄이 오면 맨 먼저 머리를 내밀곤 했다. 사람들은 주로 녀석들을 본체만체 그냥 지나쳤지만 내겐 너무 소중한 친구들이었다. 그래서 매년 입춘이 지나면 녀석들이 언제쯤 외출 차비를 할까 눈여겨보던 곳이다. 이맘때만 되면 부활을 거듭하고 있었던 것.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식물은 그렇다 치고 인간들의 부활도 가능할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단테의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을 참고하면 불행하게도 인간의 부활은 결코 쉬워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사후 세계를 잘 알 수도 없거니와 한 천재 작가의 상상력 속에서도 지옥과 연옥 혹은 천국 정도는 그려지고 있지만, 결코 부활한 인간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단테가 살았던 중세의 한 도시국가가 얼마나 부패했으면 '생전에 착한 일을 많이 하라'라고 권유하는 글을 끼적거렸을까.
꽤 오래전에 만났던 아름다운 녀석들을 앞에 두고 부활을 꿈꾸는 건 다름 아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의기투합하며 내가 정말 좋아했던 친구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그 친구들은 피붙이가 아니었지만 의형제로 맺은 의리를 한 번도 져버리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중에는 형도 있고 아우들도 있었는데 열 손가락으로 꼽으면 한 손이 거의 빌 정도로 적은 수의 친구들이다. 내 앞에 얼굴을 내민 풀꽃들을 보니 그 형제들이 눈에 밟히고 있는 것.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사람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꾸고, 당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소중한 것들을 지키고 또 공유하고 싶어 한다. 나도 그랬다. 그리고 언제인가부터 나를 지탱하고 있는 일련의 기억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지면서 내가 누리던 세상이 새삼스럽게 소중해지는 것. 풀 한 포기 바람 한 조각까지 내 속에선 변함없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는 게 아닌가.
참 재밌는 일이다. 어느 날 불쑥 끄집어낸 기억장치 속에서 부활한 풀꽃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자니 누군가로부터 잊히는 것만큼 불행한 일도 없는 듯싶다. 그래서 나를 기억해 줄 수 있는 그 무엇들이 더더욱 소중해지는 게 아닐까.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의 부름을 기다린 한 기억장치가 잊고 살던 키워드 하나를 던져놓고 책상 앞에 붙들어 놓고 있는 것.
그리고 녀석들은 내가 잊고 살던 기억들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우리 삶에 정말 소중한 것들이 무엇인지 반문하고 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나(我)를 일구고 우리의 존재를 일깨우는 기억만큼은 죽는 날까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해 두는 게 좋을 듯싶다. 그 기억 속에 오롯이 남아있는 형제들과 내가 만난 세상 모든 것들이 너무도 사랑스러운 봄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