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서면 가시가 부드럽게 보인다
당신의 기록은 언제쯤 빛을 보게 될까..?!!
인류문화사가 시작된 이래 많은 기록 수단들이 존재했다. 수메르 문명의 점토판과 파피루스가 그랬다. 인류가 문자를 발명한 이후 사람들은 이를 인류 최초의 문자 미디어라 부르기도 한다. 현대의 미디어와 비교하면 가소롭기 짝이 없지만 그땐 대단했나 보다. 또 13세기 무렵 우리나라 고려에서 세계 최초로 발명한 금속활자는 인쇄술에 일대 혁명을 일으키는 발명이었다.
그동안은 주로 베껴 쓰는 사본에 의존했지만 인쇄술의 발달로 서사 과정의 실수를 극복하고 미디어에 일대 혁신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인쇄 수준의 발달은 지식과 문화 수준을 급격히 향상했다. 또 정보의 기록과 확산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학교에서 배운 거 복습하고 있는 중..)
아내와 함께 다녀온 안데스의 쎄로 뽀초코는 그랑 또르레 산티아고 뒤편에 보이는 눈 덮인 산이다.
인류가 간직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책은 백운화상 초록불조 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다. 간단히 직지(直指)로 부른다. 위키백과는 직지를 이렇게 기록했다
이 책은 1372년(공민왕 21)에 백운화상 경한이 임제종 18대 법손 석옥청공(石屋淸珙) 화상(和尙)으로부터 받아 온 《불조직지심체 요절을 증보하여 상·하 2권으로 엮은 것이다. 백운화상이 입적하고 3년 뒤인 1377년에 청주 흥덕사(興德寺)에서 금속활자로 찍어 낸 것이 초인본(初印本)이다. 이는 현존하는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산티아고의 명소 쎄로 산 크리스토발에서 바라본 그랑 또르레 산티아고 빌딩 신축현장과 멀리 안데스의 전경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하고 책으로 만들어 낸 기록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까지 여러 이유 등으로 세계인들로부터 각광을 받지 못한 게 참 아쉬운 부분이다. 오늘날 미디어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수천 년의 시간을 단박에 뛰어넘는 인류문화사 최고의 호사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고도를 높이자 저 멀리 쎄로 산 크리스토발과 그랑 또르레 산티아고가 짙은 스모그에 갇혀있다. 사진으로 보면 거의 같거나 비슷한 높이이다.
점토판과 파피루스로부터 출발한 기록 수단이 활자에 힘입어 신문이 생겼다. 또 라디오를 발명하고 텔레비전을 발명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TV가 전부인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로부터 얼마 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인터넷이 우리 곁에 다가온 것이다. 세상의 정보망이 인터넷 한 군데로 합쳐지면서 지구별은 말 그대로 지구촌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뿐 아니다. 인터넷 정보망이 미디어에 활용되면서부터 세상은 초음속 사대에 돌입한 것과 다름없이 변했다. 그게 대략 20년 전이며, 10년 전의 일이며, 불과 몇 년 전의 일로 압축된 것이다. 지금 내가 컴 앞에서 관련 자료를 검색하고 자판을 두드리며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는 행위는, 점토판과 파피루스가 주를 이루던 시대와 달라도 너무 다른 별천지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위로부터 스크롤바를 내리면 차례로 보이는 사진 석장의 기록도 만만치 않다. 이 사진의 배경은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이며 빌딩의 이름은 그랑 또르레 산티아고(Gran torre Santiago)이다. 남미에서 가장 높은 지상 64층의 빌딩의 높이는 300미터에 달한다.
지난 2006년에 착공한 이래 2012년에 완공하고 2013년 개장해 산티아고의 새로운 명물이 된 것이다. 자료사진은 완공되기 두 해 전의 모습으로 주로 뼈대만 갖추었다. 우리나라의 63 빌딩과 비슷한 건축물인데 빌딩 뒤를 에워싼 눈 덮인 안데스 산맥이 압권이다. 이 자료를 용케도 기록해 놓았다. 그리고 10년 만에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감회가 새롭다.
아내와 나는 남미 일주와 파타고니아 투어를 마치고 산티아고로 돌아온 후에 빠뜨로나또에 잠시 둥지를 틀었다. 아예 장기체류허가증을 취득한 후 기회가 닿으면 다시 파타고니아로 떠날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때 우리가 거의 매일 아침운동 삼아 다녔던 장소가 쎄로 산 크리스토발(Cerro San Cristóbal) 공원이었다. 동네 뒷산이었던 셈이다.
그곳은 산티아고 시민들이 즐겨 찾는 명소이자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이 꼭 들르는 곳이다. 그곳에서 멀리 동쪽 눈 덮인 안데스를 바라보면 '어서 오라'라고 손짓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우리가 꿈꾸던 산으로 발길을 돌린 것이다. 안데스의 쎄로 뽀초코(Cerro Pochoco)라는 산이었다.
당시 남반구는 건기였으므로 산은 바짝 가물대로 가문 상태였다. 얼마나 가물었는지 겉으로 드러난 흙이란 흙은 돌처럼 굳었고 그 위로 작은 돌멩이들이 얼음판처럼 미끄러웠다. 그곳에서 우리는 전혀 낯선 풍경을 만나게 된 것이다. 척박한 땅 곳곳에서 키 큰 선인장들이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갈증으로 애태울 것이었지만 여행자의 눈에는 아름다운 볼거리였다. 안데스 너머로 떠오른 태양이 선인장 가시를 살며시 빠져나가면서 솜털처럼 만드는 것이다. 보고 또다시 봐도 가시로 덮인 선인장은 이 땅 안데스의 진정한 주인이었다. 비록 이들 몸에는 가시가 촘촘히 박혔지만 이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결코 뾰족함이 아니라 부드러움이었던 것이랄까..
식물이 입을 열어 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감을 통해 여행자의 발을 붙들어 놓는 것이다. 이 같은 일은 산행이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 만약 식물에게도 언어가 있다면 여행자의 발걸음을 붙들어 놓는 신비로운 마력이 아닐까.
인류의 가장 오래된 미디어는 언어(la lingua_language)였다. 언어는 인류가 영원히 사용할 미디어 이기도 하다. 소통수단인 미디어가 아니라 할지라도 원시시대의 기록은 바위나 동굴의 벽에 그린 그림으로 짐승의 뼈 등이 사용되기도 했다.
우리가 만난 손바닥 그림(Cueva de las Manos)은 9,300년 내지 15,000년 전에 원시인들이 그린 동굴벽화였다. 그런데 미디어에 소개된 자료를 살펴보니 흥미롭다. 그 보다 훨씬 전인 4만 3900년 경에 그려진 벽화도 발견된 것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글자라 칭하지 않으면 기록 수단으로 인정하지 않고 예술 운운하게 된다. 그런데 멕시코 국립박물관에서 만난 마야의 유물과 볼리비아 띠아우아나꼬(Tiahuanaco) 문명의 유적지에 만난 달력은 그림으로만 그려져 있었다. 그림만으로 사람들과 약속을 하면 소통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요즘 그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우리가 부지불식(?) 간에 변하게 된 기록수단과 미디어처럼, 가까운 시일 그 언제인가 전혀 다른 소통 도구가 발명되거나 개발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눈만 뜨면 열어보는 인터넷 세상처럼, 세계인들이 공유하고 소통하는 활자와 언어가 새롭게 개발되는 세상.. 어쩌면 그게 4차 산업혁명의 과제일지도 모른다. 현대 인류는 불가능해 보였던 일을 해낸 호모사피엔스의 후손들이다.
나는 최소한 10년 전에 상상도 하지 못한 공간에.. 10년 전에 촬영되었던 사진을 여러분들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10년 동안 잠자던 기록이 어느 날 화들짝 깨어난 것이다. 새로운 미디어, 새로운 기록 수단, 새로운 문화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포털의 브런치로부터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LA NOSTRA VIGGIO SUD AMERICA
Cerro Pochoco_Santiago del CILE
Foto di yookeun Chang_Geograf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