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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그곳 Feb 29. 2020

너는 좋으냐 거친 봄바람

-바람 부는 날 아침 산책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서기 2020년 2월 29일 오전 9시경,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고 바람이 세차게 분다. 3월 초하루를 하루 앞둔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의 날씨는 당장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듯 찌뿌듯하다. 아내가 한국에서 이탈리아로 돌아온 지 어느새 일주일이 후다닥 지나고 있다. 



아내는 아침 일찍 무엇을 만드는지 주방에서 바쁘다. 나는 갑자기 할 일이 없어졌다. 아내가 서 있는 자리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의 자리(?)였다. 아침운동을 다녀오면 마트에 들러 장을 봐 오는 한편 음식을 만들어 먹곤 했다. 운동하고 요리하고 브런치에 글 쓰는 등.. 아내의 빈자리를 메꾸어 왔다. 



그런 어느 날 비어있던 자리를 아내가 차지하고 도시락을 만드는 것이다. 오래된 습관이다. 우리는 집에서 혹은 여행지에서 날이 밝아오면 도시락을 챙겼다. 어떤 때는 커피포트와 빈 컵만 작은 가방에 넣어 집을 나설 때도 있었다. 또 어떤 날은 거기에 빵과 과자 조각을 챙겨 넣었다. 


그런가 하면 김밥을 싸거나 떡 몇 조각을 챙겨 넣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챙긴 간식 혹은 주전부리는 목적지에 도착한 즉시 잠시 쉬면서 나누어 먹곤 했던 것이다. 별거 아니지만 작은 먹거리는 부부애 혹은 동지애를 느낄 수 있는 연결고리 같은 것이랄까..





그 짧은 시간 동안 아내와 나는 짬짬이 바를레타 곳곳을 싸돌아 다녔다. 시차를 극복하고 장차 삶의 터전이 될 이곳의 지형을 하루라도 빨리 익히려면 눈도장과 발도장을 많이 꼭꼭 찍어두어야 했다. 그래서 집안을 정리하고 나면 이곳저곳을 함께 들르며 소개를 곁들이는 것. 



흠.. 이 길은 예전 아드리아해를 건너온 상인들이나 그리스로 떠나던 순례자들이 묵던 곳이거나 거상들의 집이 위치한 곳이거든.. 바닥의 대리석이 그걸 구분해 주고 있어. 구도시(Centro storico) 대부분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콘크리트로 지어진 신도시와 확연히 구분이 돼요. 부자들이 살았던 곳은 길바닥이 검은 대리석으로 깔려있어서 신분의 차이를 느끼기 충분한 곳이야. 주로 항구 앞 혹은 바를레타 성 주변 두오모를 중심으로 구도시로 이어지고 있어요..



도시 곳곳을 소개할 때마다 아내는 아이들처럼 좋아했다. 인구 10만에 불과한 한 작은 도시의 규모가 상상 밖인데 놀라고 있는 것이다. 시내 중심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작은 골목과 주택들은 빨래가 바람에 펄럭이며 마르고 있었는데 아내는 그런 풍경을 너무 좋아했다. 발코니에서 빨래가 마르는 골목 아래는 대리석들이 일부러 윤기를 더한 듯 반들거리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처럼 호기심 어린 눈망울의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 그래서 난 이 도시를 아드리아 해의 보석이라 부르고 있어..!!"





불과 일주일 전부터 내가 걷던 아침운동 코스에 그림자 하나가 더 생겼다. 꿈같은 일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사람들은 이 같은 현상을 당연시하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사람 사는 세상은 의미를 부여하기에 따라 천차 별 만차 별 결과가 달라진다. 기적이나 운명 같은 일이 그런 것일 것이다. 늘 좋은 일만 있는 것도 아니며 반대의 현상만 찾아드는 게 아니었다. 세상만사 생각하기 나름이었던 것. 



아내가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바닷가에 나서면 아드리아해 저편을 바라보는 게 습관이 되었다. 아내는 바다 저편에서 은빛날개를 달고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올 것이었다. 미래형이었다. 그리고 이내 현재 진행형.. 그 바다 너머로부터 세찬 봄바람과 먹구름이 도시를 뒤덮고 있는 것이다. 당분간은 비바람이 치던 바다.. 앙칼진 바다.. 착하디 착한 바다.. 는 별 의미가 없어졌다. 그 대신.. 풀꽃들이 바람에 날리는 풍경 속으로 환영처럼 드나드는 한 여인이 눈 앞에 어른거릴 뿐이다.




도시락을 작은 배낭에 챙겨 넣고 평소의 운동 코스로 이동하면서 바람이 신경 쓰였다. 불과 일주일 전 같았으면 세찬 비바람도 큰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불순한 일기 조차 삶의 한 조각일 것이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대가로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아침 아드리아해 너머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과 먹구름은 하시라도 빨리 피하는 게 나을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조변석개(朝變夕改)란 이런 것..!(정말 웃겨요. 욱껴!! ㅋ)



그런데 아내의 표정을 보니 나의 생각과 조금은 달랐다. 처음 보는 도시의 풍경과 바닷가 지천에 널린 풀꽃들 때문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내 속에서 작은 울림이 있었다. 내가 늘 바라보던 바다 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도시를 뒤덮는 먹구름과 아내를 뒤섞어 놓으니 아내의 움직임이 천방지축 좋아라 날뛰는 아이들 같은 것..!!


"너는 좋으냐 거친 봄바람이..!!"


GIORNATA VENTOSA A FARE UNA PASSEGGIATA
il 29 Febbraio 2020, La Spiaggia della Citta' di Barletta
Foto di yookeun Chang_Geograf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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