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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그곳 Mar 11. 2020

빛과 두 그림자

-그림자에 대한 소고

그림자를 걷어낸 그림자..?!!



햇살을 받아 붉은 기운이 감도는 이곳은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의 아침 풍경이다. 집에서 아침 산책을 나서면 맨 먼저 만나게 되는 풍경이다. 태양은 아드리아해 너머에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고도 바를레타를 비추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이곳은 빛의 잔치가 시작된다.



조금 전까지 및및했던 풍경이 햇살을 받아 붉게 변하는 한편 종려나무 가로수길과 해변의 나무들이 본래의 모습에 당신의 그림자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피렌체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 후 최소한 7개월을 보내는 동안 이 같은 풍경을 거의 매일 봐 왔지만 이날은 달랐다. 일상에서 늘 만났던 그림자의 존재를 그제야 깨닫게 된 것이다. 




아내와 나는 조금 전 언덕 위에서 아드리아해가 연출한 바다를 함께 바라봤다. 한국에 있을 때 아침 산책에서 의례히 만나던 풍경은 가까운 산길이었지만 요즘은 전혀 다른 풍경을 만나게 된다. 매일 아침 바다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거의 매일 만나던 산과 다른 풍경 앞에서 아내는 흡족해했다. 나와 함께 걷는 것도 오랜만의 일이지만 그동안 우리에게 없었던 풍경은 물론 잊고 살던 그림자를 동시에 챙기게 된 것이다. 어느 날 우리 앞에 그림자가 하나 더 생긴 것이다. 



두 개의 그림자.. 언덕길을 내려와 산책길에 접어들면 우리 앞에 긴 그림자가 앞서 걸으며 길을 재촉하고 있는 것. 재밌는 일이다. 그림자 하나가 더 생겼을 뿐인데 아무도 몰래 가슴속에 드리워진 그림자 하나가 바깥으로 나온 듯하다. 그림자는 꽤 오랜동안 내 속에서 그리움으로 남아 발효를 거듭했던지.. 나의 그림자 곁에 생겨난 그림자의 향기는 너무 풋풋하고 생기 발랄했다.





빛과 그림자


그림자는 빛의 경로 상에 불투명한 물체가 있을 때 빛의 직진성으로 인해 물체에 빛이 통과하지 못하여 생기는 어두운 부분을 말하며, 유의어로 음영(陰影)이라고도 부른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사노라면 이런 그림자의 정체는 변신을 거듭하여 여러 형태로 진화를 거듭했다.



그림자에도 여러 종류가 있으며 빈부귀천을 나누는 일이 생긴 것이다. 빛을 이용하는 사진은 빛이 없는 곳에서 피사체의 결과물을 얻을 수 없다. 어둠의 정도에 따라서 아니면 빛의 세기에 따라서 강한 빛은 강한 모습으로 약한 빛은 그에 걸맞은 모습을 연출하는 게 사진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즉 빛을 이용해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어둠을 적절히 이용하는 것이며 그림자를 통해 피사체의 모습을 천의 얼굴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빛의 방향에 따라 사진의 결과물이 다르다. 우리가 말하는 정면광 역광 사광 반역광 측면광 등 빛의 방향에 따라.. 또 셔터 스피드에 따라 피사체의 결과물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아내와 나는 아침 햇살을 등지고 걸었기 때문에 우리 앞에는 기다란 그림자와 함께 아침햇살에 젖은(?) 나무들이 붉게 물들고 적당히 어두운 묘한 분위기가 연출된 것이다. 그림자 또한 대상이 어떠한가에 따라 빛과 같은 운명을 걷게 된다. 우리가 자주 입에 떠올리거나 학습한 그림자들 속에는 빛(사진)의 결과물만큼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림자의 미학


친구들과 함께 노래방에 들를 때 열창하는 내가 좋아하는 노래에 그림자에 얽힌 노랫말이 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가수 서유석 씨와 노사연 씨가 부른 <그림자>이다. 생김새는 같은 그림자건만 내용은 너무 다르고 느낌 은 하늘과 땅 차이처럼 다가온다. 그림자가 시대 상황 혹은 당신이 처한 현실 등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랬다.


그림자

-서유석


그림자 내 모습은 거리를 헤매인다

그림자 내 영혼은 허공에 흩어지네

어둠이 내리는 길목에 서성이며

불 켜진 창문을 바라보면서

아아  외로운 맘  달랠 길 없네

그림자 내 이름은 하얀 그림자



어둠이 내리는 길목에 서성이며

불 켜진 창문을 바라보면서

아아 외로운 맘 달랠 길 없네

그림자 내 이름은  하얀 그림자


노래의 멜로디만으로도 당신의 모습이 그림자로 변해 방황하고 있는 모습이다. 너무 외로운 나머지 그림자가 하얗게 색이 바랬다. 그런가 하면 누군가를 너무 그리워한 나머지 골목길 가로등 밑에서 절망하고 있는 모습이 하얗게 그려진 것이다. 그림자가 하얗다. 너무 허전한 마음이 그림자를 하얗게 만든 것이다. 물론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당신에겐 고통스러운..) 그림자의 모습이다. 그런데 같은 그림자라도 할지라도 노사연 씨의 그림자는 그리움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이랬지..



님 그림자

-노사연


저만치 앞서가는 님 뒤로

그림자 길게 드린 밤

님의 그림자 밟으려 하니

서러움이 가슴에 이네

님은 나의 마음 헤아릴까

별만 해듯 걷는 밤

휘훵한 달빛 아래 님 뒤로

긴 그림자 밟을 날 없네



저만치 앞서가는 님 뒤로

그림자 길게 드린 밤

님의 그림자 밟으려 하니

서러움이 가슴에 이네

님은 나의 마음 헤아릴까

별만 헤듯 거린 밤

휘훵한 달빛 아래 님 뒤로

긴 그림자 밟을 날 없네


달빛에 길게 드리워진 역광의 그림자 뒤로 한 여성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노랫말에 잘 그려져 있다. 그가 뉘신지 모르겠다만 한 여인의 마음만 빼앗고 도망치는 듯한 매정한 모습이 그림자에 담겨있다. 내가 당신을 너무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던지.. 언제쯤 우리 결혼하자라 던 지.. 홍콩을 다녀오면 그때 다시 만나자던지.. 등등 한 여연의 마음만 뺏고 사라진 당신.. 가까이하기엔 넘도 먼 당신이 달빛 아래서 흐느끼고 있는 느낌이 물씬 밴 아름다운 노랫말이다. 물론 당신에겐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그림자의 종류


글을 끼적거리면서 생각나는 그림자가 적지 않았다. 그림자의 종류도 사진 기술에 드러난 빛의 종류처럼 생김새가 다양했다. 앞서 살펴본 두 노랫말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그림자를 밟고 싶은 그림자가 있는 것처럼  존경하는 스승의 그림자처럼 밟아서는 안 되는 그림자도 있다. 동자교(童子敎)에 따르면 제자거칠척사영불가답(弟子去七尺師影不可踏).. 즉 칠 척 떨어져서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스승을 부모보다 더 공경하고 위로 안 존경심 때문에 예우하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당신이 우울하거나 걱정. 근심거리가 많을 때 생기는 당신 안의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 그 그림자는 얼굴에 드리워져 상대가 단박에 알아차리게 된다. 그 반면에 얼굴에 나타나는 그림자가 밝은 게 있다. 기분이 좋을 때 나타나는 그림자의 또 다른 현상이다. 또 있다. 음흉한 흉게를 꾸미고 있는 사람들의 사악한 그림자가 있다. 그런가 하면 어릴 적 다락방에서 환등기를 켜 놓고 동무들과 그림자놀이에 열중하던 그림자가 있는가 하면 인간의 운명을 기록한 역사의 그림자도 존재하는 것이다.





7개월 동안 원치 않는 별거를 한 아내가 이탈리아로 돌아온 직후 내 앞에는 두 개의 그림자가 공존하게 됐다. 두 개의 그림자.. 하나의 그림자가 등장하기 전까지 내 기록 속에 등장한 나의 그림자는 외롭고 고독했다. 잠시면 지나칠 것 같은 지독한 그림자들이 나의 발목을 붙들고 놔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 아드리아해가 저만치 보이는 언덕 위에 섰을 때 내 앞의 그림자는 많이도 달라져있었다. 어둠침침한 그림자가 밝고 환하게 내 앞에 다가온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 앞에 또 다른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져있었다. 그의 정체는 지구별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드는 우울한 그림자였다. 이 또한 곧 사라지겠지..!



LUCE E DUE OMBRE DI FRONTE A NOI
il 11 Marzo 2020, Citta' di Barletta
Foto di yookeun Chang_Geograf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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