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은 군네라 띤끄또리아_Gunnera tinctoria
어느 날 잊고 살던 어여쁜 자아가 면경처럼 또렸이 드러났다면..?
희한한 일이었다. 그날 아침 우리는 칠레의 로스 라고스 주에 위치한 오르노삐렌의 리오 네그로 강을 거닐고 있었다. 아침이슬이 촉촉이 내려앉은 강가의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걷노라면 마치 꿈속 같은 느낌이 드는 곳. 이 같은 풍경을 연출한 건 짙은 안개 때문이었다. 세상은 뽀얀 안갯속에서 깨어날 줄 몰랐다. 가끔씩 이름 모를 새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곳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식물이 널따란 잎과 길쭉한 꽃술을 내놓고 있었다. 또 샛노란 꽃잎을 내놓은 작은 꽃잎 위 또는 강가의 풀잎 위에는 수정같이 맑은 이슬이 맺혀있었다. 이 같은 장면은 어디서 많이 본듯하기도 했고 전혀 못 본 외계의 풍경 같기도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곳에 이름도 희한한 군네라 띤끄또리아(Gunnera tinctoria)란 식물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 식물 조차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우리를 보고 나처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생김새를 보니 이곳에 살던 원주민들의 모습을 쏙 빼닮아 오래전부터 같이 살아왔던 것 같은 착각이 든 것이랄까. 티 없이 맑은 자연 속에서 그들과 함께 어우러지며 마냥 행복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남들이 하지 못한 일 등 뭔가 성취했을 때 혹은 더 잘나 보였을 때 행복감이 충만할 텐데, 까지껏 청정지역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행복해한다면 그게 정상일까. 비현실적일까.
다른 이들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내 기억 저편에는 여태껏 잊히지 않는 기억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기억들은 바쁘게 살아가는 동안 꼭꼭 숨어 지내다가 몸과 마음이 잠시 평온을 얻으면 어느 날 불쑥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오래전 유년기의 기억들이 주로 그랬으며 그 속에서 나(我)는 귀엽기 짝이 없는 한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통통한 고사리 손을 한 녀석은 엄마의 품에 안겨 씻김을 당하고 있는 것. 조금 전까지 세수를 하라고 내놓은 세수대 옆에서 얼굴에 물을 찍어 바르고 있었다. 세수하는 방법도 잘 모르거니와 고사리 손에 몇 방울이나 담길까. 세수 흉내를 냈지만 물장난만 깨작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일게 아닌가.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녀석은 엄마 품에 안겨 씻김을 당하는 게 너무도 싫었다. 싫어했다. 목수건을 두른 다음 거의 세숫대에 처박다시피 행해지는 세수는 엄마의 큼지막한 손아귀에서 세탁기 돌아가듯 재빨리 행해지곤 했다. 문제는 얼굴에 비누칠을 한 직후에 나타났다. 엄마의 재빠른 손놀림에도 불구하고 녀석의 두 눈으로 비눗물이 조금 스며든 것.
"앗 따거.. 엄마 앙앙앙앙.."
"그러길래 엄마가 뭐랬어. 눈 꼭 감으라고 했잖아.. 이눔아!!"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전 네댓 살이나 됐나 싶은 시절의 생각이 불현듯 떠오른 건 순전히 리오 네그로 강가의 풍경이 자아낸 것. 세상살이에 찌들면 자아는 누더기를 걸친 듯 퇴색되지만 그로부터 얼마간 멀어지거나 벗어나면 나의 고운 모습이 면경 보듯 되살아나는 것. 이 같은 경험은 파타고니아 투어가 끝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그 장면들은 어릴 적 엄마 품에 안겨 씻김을 당하던 그때처럼 무시로 나를 자극하며 추억하게 만드는 것. 그 가운데 공룡이나 먹었을 법한 식물 군네라 띤끄또리아는 유년기 가까운 산골짜기에서 만났던 물이끼들 보다 더 신선한 모습으로 내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다른 세상에 비친 오래전 나의 모습처럼..!
Rio Negro_Hornopirén ruta CH-7
Los Lagos Patagonia CILE
Foto di yookeun Chang_Geograf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