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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그곳 May 25. 2019

피렌체의 일몰 명소와 미켈란젤로

나의 유년시절과 미켈란젤로의 유년시절을 비교하고 보니

르네상스를 일군 천재 예술가들의 영감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


#유년시절 나를 사로잡았던 미술


나는 가끔씩 유년시절을 떠올리곤 한다. 지나온 삶을 반추하면서 "그때 나의 결정이 이랬더라면 인생은 달라졌을까" 싶은 생각들 때문이었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보면 유년기의 나는 호기심이 꽤 많았던 것 같다.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전부터 입학 후까지 뒷마당으로 이어지는 장독대 근처를 자주 얼씬거렸다. 장독대로 향하는 엄마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 엄마는 가끔은 귀찮아하셨지만, 내가 향하는 놀이터(?)가 가까이 있음을 눈치챈 후부터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으셨다. 


장독대 곁으로 쓰레트 지붕을 머리에 인 나지막한 집이 여러 채 있었는데 그곳에 공방이 있었다. 공방의 주인은 국내에서 유명한 H대학을 졸업한 큰누님 벌의 예술가로 그림을 그리거나 조소를 하고 있었다. 그는 허름한 창고 같은 집을 빌려 석고상을 만들거나 100호 이상의 큼직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또 공방의 한쪽 벽면에는 원색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비구상 작품이어서 작가가 무엇을 의도하는지 그땐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곳에서 아저씨 같은 형에게 달라붙거나 턱 밑에 쪼그리고 앉아 이것저것 캐 물으며 귀찮게 굴었다. 형의 작업이 너무 신기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그 형은 내가 알거나 말거나 차분히 일러주었다. 특히 조소 작업은 훗날 작품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유화를 그리고 있었는데 붓놀림을 보고 있자니 나도 당장 따라 해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따라서 그때부터 공부방 한쪽에 처박혀 있던 물감이며 크레온이 금방 바닥이 나는 한편, 잡기장 공책은 온통 그림으로 채워져 엄마로부터 꾸중을 독차지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밋거리도 변변찮았던 당시의 이 같은 노력(?)은 마침내 결실을 얻기에 이르렀다. 학교의 사생대회에 나가기만 하면 입상을 했고 내가 그린 그림은 늘 교실 뒤편 게시판에 1년 열두 달 붙여져 있었다. 특히 조소 작품(?)은 미술 선생님으로부터 큰 호평을 받는 한편 미술반에 들어올 것을 종용받기도 했다. 희한한 일이었다. 그때 왜 미술반에 들어가지 않았는지.. 


그러나 시간을 지내놓고 보니 미술반 아이들은 또래의 친구들과 매우 달랐다. 녀석들 중 남자아이들은 하얀 셔츠에 멜빵을 걸친 반바지와 상고머리를 하는 한편 스타킹까지 신은 녀석도 눈에 띄었다. 여자아이들도 마찬가지 공주처럼 꾸미고 다녔다. 거기에 비하면 나의 차림은 초라하다 못해 구정물이 흐르는 듯 꾀죄죄했다고나 할까. 



미술반의 면면을 살펴보면 부유한 아이들이 어른들 계모임 하듯 옹기종기 모여있었던 것. 어린 내가 우리네 가정형편을 몰랐을 리 없다. 기가 한풀 꺾인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나의 습관은 오랫동안 이어지며 미술 혹은 예술에 대한 미련이 남곤 했다. 대략 이게 전부였다.





#르네상스를 일군 천재 미켈란젤로


관광객들이 잘 찾지 않는 나만(?)의 피렌체의 일몰 명소에 서면 르네상스를 일군 천재 예술가들이 오버랩되곤 했다. 그중 미켈란젤로는 어느 순간부터 내 가슴속에 자리 잡은 지 오래됐다. 시뇨리아 광장 한쪽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발가벗은 채 관광객들에게 포즈를 취해주고 있는 다비드상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탈리아에 첫발을 디딘 후로부터 그 감흥은 전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 작품을 바라보는 순간 남자인 내가 섹시함을 느꼈을 정도였다. 남자의 몸이 저토록 아름다울 수 있구나 싶은 생각은 물론 돌(대리석)을 석고보다 더 잘 다룬 솜씨 때문에 속으로 감탄을 자아낸 것. 


그러나 그건 복제품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갤러리아 델라 아카데미아(Galleria dell'Accademia di Firenze)에 소장된 진품 다비드 상을 보면서 다시 한번 더 놀라게 됐다. 


이탈리아의 예술가들이 정교하게 복제해낸 작품 때문에 한  번 놀랐다면, 진품을 눈 앞에서 만나 보니 마치 살아있는 남자 모델이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다시 한번 더 즈윽이 놀라게 된 것. 그래서 그럴까. 


사람들은 다비드상 앞에서 너도 나도 뒤질세라 카메라 셔터를 눌러댓다. 어떤 사람들은 다비드가 뭐라 할까 봐 조용히 사람들의 뒤에 서서 휴대폰을 만지작이고 있었다. 사정이 이러함으로 갤러리아 아카데미아 앞에만 가면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개관 시간보다 훨씬 더 빨리 찾아와 길게 줄을 서 있는 것. 


그들 혹은 피렌체를 찾는 사람들은 미켈란젤로 신드롬에 빠진 것과 별로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시쳇말로 미켈란젤로에 미쳤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미켈란젤로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그의 생애 중에서 글쓴이 또래의 유년기로부터 청년기의 미켈란젤로를 잠시 엿본다.



#천재 미켈란젤로의 유년기와 청년기


서양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미술가로 손꼽히는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의 어린 시절은 매우 불행했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미켈란젤로의 아버지는 공직자로 피렌체에서 40여 마일 동남쪽에 위치한 끼우시(Chiusi)와 카프레세(caprese) 지방의 행정관으로 나가 있는 동안에 미켈란젤로가 태어났다. 


1475년 3월 6일 카프레세에서 출생한 미켈란젤로는 어머니가 병약하여 유모에게 맡겨졌으며, 그의 아버지가 지방 근무를 마치고 피렌체로 돌아간 후에도 여전히 시골의 유모 밑에서 자랐다. 고아나 다름없는.. 그런데 그곳은 건축이나 조각에 쓸모 있는 바위가 많은 곳이어서, 이곳 사람들의 주요 직업은 돌을 자르는 일이었다. 따라서 가족들과 떨어져서 돌을 자르는 직업을 가진 남편을 둔 유모 밑에서 자란 어린 미켈란젤로는 자연스럽게 돌을 가지고 놀면서 자랐다. 


그가 6살 때 따로 살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가 재혼하여 자리를 잡은 다음 미켈란젤로를 피렌체로 불러들인 것은 그가 10살 때였다고 한다. 그때까지 미켈란젤로는 쓰기와 읽기를 못하였지만 망치와 끌로 돌을 다루는 법을 이미 익혔다. 또 하나 그의 유년기 성장과정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부모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는 점. 후에 나타나는 그의 예술가로서의 반골적 기질이 이러한 환경의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그 때문이란다.




#유년기에 바라보았던 일몰과 르네상스 시대의 일몰


르네상스를 일군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로와 나의 유년 시절을 뒤돌아 보고 있자니 묘한 감정이 뒤섞인다. 어릴 적 우리 집의 구조는 서남향이었다. 그래서 뒷마당으로 이어지는 툇마루에 앉으면 해질 녘 풍경이 매일같이 현관문에 비치는 것. 어떤 때는 일몰의 붉은빛이 방안 깊숙한 데까지 비치곤 했다. 흐린 날씨가 아니면 거의 매일 일몰은 내 곁에 혹은 우리 뒷마당과 가족을 발그래 비추다 앞동산 너머로 슬며시 사라지는 것. 일몰은 하루가 끝나는 것을 알리는 신호이자 새로운 하루를 잉태하는 수줍음이었다. 이때부터 어린 녀석들의 숨바꼭질 놀이가 시작되는 것. 

앞서 언급한바 미켈란젤로가 피렌체의 아버지 곁으로 돌아올 때 나이는 10살이었고, 그때까지 읽기와 쓰기 조차 못했다고 한다. 그 대신 그는 망치와 끌로 돌을 다루는 법을 이미 익혔다는 것. 그의 성장기를 통해 그의 운명은 일찌감치 정해졌다고나 할까. 


피렌체의 아버지 곁으로 돌아오면서 정규 교육을 받고 라틴어와 희랍어까지 배웠지만 미켈란젤로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예술에 대한 관심이었으며 그의 꿈은 예술가였다. 그런 그가 아버지의 권유(공직자의 길)를 뿌리치자, 마침내 그의 아버지는 결심을 굳히게 된다. 


미켈란젤로의 손을 들어준 것. 미켈란젤로가 13살 되던 1488년, 그라나치(Granacci) 가문에 들어가 그곳에서 3년 동안 숙식을 하면서 예술가로서의 수련을 쌓을 수 있도록 계약을 맺어 준 것이다. 


1488년 4월, 13세의 나이에 미켈란젤로가 발을 들여놓은 피렌체의 길란다이오 미술학원(Ghirlandaio Studio)은 그의 사상과, 창의성과 재능을 개발하고 발휘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특별한 곳이었다. 13살 어린 나이의 미켈란젤로..





#기록에 잘 드러나지 않는 미켈란젤로의 망중한


잠시 엿본 미켈란젤로의 단편을 통해 드러난 그는 돌을 다듬는 특별한 재주를 타고난 천재였던 것 같다. 돌을 다듬는 동안 그의 곁에 없던 엄마도 아버지도 잠시 잊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 돌을 다듬는 동안 서서히 형체를 드러내는 작품을 보면서 행복해하는 표정이 갤러리아 델라 아카데미아에 전시되고 있었다. 13살 어린이가 조각 삼매경에 빠져있는 매우 진지한 모습. 그렇다면 미켈란젤로는 쉬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고 돌만 다듬었을까..

 

그럴 리가 없다. 아무런 할 일도 없을 것 같은 어린 녀석들에게도 일과가 있는 법. 해가 저물면 그에 어울리는 행동이 따르기 마련이다. 손발 닦고 저녁 먹고 숙제하고 자던지 아니면 친구들과 다시 만나 숨바꼭질이라도 하던지 등등.. 


따라서 피렌체에 둥지를 튼 후 자주 들르게 된 아르노강에서 가끔씩 어린 미켈란젤로 혹은 위대한 예술가의 쉼의 흔적을 찾는 것이다.  어느 날 유화용 잉크를 흩뿌린 듯 화려하기 그지없는 원색의 일몰 앞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내는 것.


황홀하다 못해 자지러질 듯한 일몰의 광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묵은 때를 지우고 새로운 영감을 얻기에 충분한 에너지를 제공하는 것 같았다. 


별로 크지도 넓지도 않은 피렌체 공화국을 휘감고 도는 아르노 강은 옹벽으로 가두어 놓은 지금의 모습과 사뭇 달랐을 텐데, 하루 일과를 끝낸 미켈란젤로가 강가에 발을 담그고 일몰을 바라봤다면, 그곳에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이 그토록 원했던 천상의 나라가 환상으로 또렷하게 그려졌을 법했다. 물론 르네상스를 일군 피렌체의 또 다른 위대한 예술가들도 아르노 강가에서 하루의 고단함을 내려놓고 쉼을 얻지 않았을까..   


영상과 사진은 서로 다른 날 촬영된 아르노 강의 일몰 풍경이다. 피렌체의 숨겨진 일몰 명소는 피렌체의 상징인 일 뽄떼 베끼오(il Ponte Vecchio)로부터 서쪽으로 세 번째 위치한 일 뽄떼 알라 까라이아(il Ponte Alla Carraia)에서 끼에사 디 산 프레디아노 인 체스뗄로(Chiesa di San Frediano in Cestello) 쪽으로 바라보이는 곳. 구름이 없는 맑은 날씨보다 구름 낀 날씨가 보다 더 스펙터클 하다는 거..


그런데 웬걸.. 나의 유년기와 13살 때 모습을 어린 미켈란젤로와 비교해 보니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과 너무 딱 맞아떨어지는 거 있지..ㅜ 아무튼 당신의 위대함 때문에 피렌체는 사시사철 주야장천 인산인해를 이루며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만약 당신이 피렌체를 방문하면 해질녘 아르노 강의 황홀한 일몰에 몸을 맡겨보시길 바란다. 미켈란젤로는 물론 르네상스를 이룬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기 때문이다. 


Michelangelo Buonarroti (Caprese, 6 marzo 1475 – Roma, 18 febbraio 1564)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의 비밀 


il tramonto del Fiume Arno FIRENZE
Chiesa di San Frediano in Cestello
Foto di yookeun Chang_Geograf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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