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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그곳 May 27. 2019

르네상스를 일군 진정한 영웅들

-메디치 가문에서 예술가를 후원한 진짜 이유

요즘은 상상 조차 할 수 없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르네상스에 가려져있었다니..!


#피렌체의 일상


피렌체의 요즘 날씨는 종잡을 수가 없다. 쨍하고 볕이 나는 듯 다시금 찌뿌듯한 하늘은 여우비를 쏟곤 하는 것이다. 브런치에 글을 끼적거리고 있는 오늘(일요일)도 별로 다르지 않다. 가끔씩 누구를 위해 울리는지 성당의 종소리는 댕댕 거리며 우중충한 날씨를 가로질러 창 너머 지붕 저 멀리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이런 날씨면 사람들이 외출을 자제할 것 같지만 피렌체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들을 불러낸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 누가 꼬드긴 것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언제부터인가 이런 일이 일상이 된 곳이다. 피렌체를 찾은 이방인들이 즐겨 찾는 곳은 몇 군데로 압축된다. 르네상스가 남긴 유산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면 사람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어딘지 쉽게 분간되는 것. 피렌체에 둥지를 튼 후부터 싸돌아 다니며 확인된 명소를 잠시 엿볼까.



♤ 위 자료 사진은 르네상스 예술가들을 후원한 메디치가의 예배당(Cappelle Medicee) 곁에 핀 앙증맞은 꽃들로 지난 5월 25일 한밤중에 촬영된 것들이다. 인적이 거의 끊긴 이날 밤 달콤한 향기가 진동을 했는데, 나는 꽃의 요정들 곁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환상을 보고야 말았다.



르네상스를 일군 진정한 영웅들

-메디치 가문에서 르네상스 예술가들을 후원한 진짜 이유




#르네상스가 남긴 피렌체의 명소들


르네상스가 남긴 피렌체의 유산들은 까떼드랄레 디 산타 마리아 델 퓌오레(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를 필두로 빨라쪼 피티(Palazzo Pitti), 삐아짤레 델리 우피치(Piazzale degli Uffizi), 삐아짜 델라 시뇨리아(Piazza della Signoria), 일 뽄떼 베끼오(il Ponte vecchio), 삐아짤레 미켈란젤로(Piazzale Michelangelo), 바실리카 디 산타 크로체 디 피렌체(Basilica di Santa Croce di Firenze), 삐아짜 델라 레푸브리카(Piazza della Repubblica), 바실리카 디 산타 마리아 노벨라(Basilica di Santa Maria Novella), 갤러리아 델라 아카데미아 디 피렌체(Galleria dell'Accademia di Firenze) 그리고 까뻴레 메디체(Cappelle Medicee)와 집합을 이루고 있는 바실리카 디 산 로렌쪼(Basilica di San Lorenzo) 등일 것이다. 


인구 40만 명이 채 안 되는 작은 도시 피렌체를 이루고 있는 건 이 같은 르네상스 시대의 유산들이 대부분으로, 198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patrimonio dell'umanità)으로 등재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중 수많은 이야기를 양산해 낸 배후에 위치한 메디치 가문의 행적을 눈여겨보면 르네상스의 본질을 알 수 있을 거 같아 공을 들이고 있는 것. 르네상스를 이야기할 때 쏙 빼놓으면 서운할 것 같고 그렇다고 어물쩡 끼워 넣자니 너무 불편한 한 가문의 이야기. 피렌체를 호령하고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후원자가 된 메디치가의 무덤(Cappelle Medicee_메디치가의 예배당 혹은 무덤)을 찾아 나선 건 지난해 11월이었다.




#아는 듯 잘 모르는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후원자 메디치 가문의 비밀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후원자 메디치 가문은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피렌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 가문이었다. 역사에 만약이란 가정은 없지만 굳이 만약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면, 메디치 가문이 없었더라면 피렌체는 물론 르네상스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피렌체가 역사상 주역이 된 시기는 대략 1400년 경부터 1600년 경까지 200년 가까이 된다. 또 이 시기는 메디치 가문이 영광을 누리던 때였다. 


과련 자료 등에 따르면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15세기 초로, 은행업을 했던 가문이 교황청의 재정후원을 담당하게 되면서 일약 유럽의 갑부로 도약하게 됐다는 것. 이른바 메디치 은행은 이탈리아 주요 도시는 물론 네덜란드까지 지점을 두었다고 하므로 요즘 재벌들도 이를 본받지 않았을까. 메디치 가문은 당시 최고 권력이었던 교황청과 가까웠던 사이로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용어의 원조격으로 다가왔다. 피렌체에 둥지를 튼 후 자료들을 보고 또 찾아봐도 쉽게 정리되지 않던 메디치가의 비밀이 메디치 예배당을 방문하면서부터 쉽게 풀리기 시작한 것. 메디치가의 상술이 발가벗은 채 드러나고 있었다. 


메디치가는 당신들의 부와 명예와 권력을 축적하고 행사하는 방법으로 몇 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이들이 맨 먼저 사용한 방법은 교황청과 유대감을 형성하며 권력을 나누는 작업에 들어간 것이랄까. 참 교묘하고 치밀한 수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교황청이 주야장천 신본주의를 외치자 상술에 뛰어난 메디치가는 돈놀이(은행업)를 위해 신본주의를 보다 더 크게 외치게 된다. 


당시 사회적 분위를 참조할 때 신본주의를 거부하면 죽음이나 다름없는 형벌이 뒤따를 터. 신 보다 돈을 더 사랑한 사람들일지라도 이 같은 분위기를 모를 리 없다. 따라서 메디치가는 예술가들을 총동원하여 교황청에 아부하는 한편 경제 상인협회를 통해 자기들만의 권력을 쌓아가며 지켜나가는 것. 근. 현대 한국사회 혹은 독재국가 등지에서 흔히 써먹던 정경유착(政經癒着)의 오래된 한 모습이 르네상스로부터 발현되고, 재벌의 속성이 그대로 드러난 게 당시의 모습이었다면 손사래를 칠까. 


♤ 위 자료 사진은 메디치 예배당 쿠폴라(La cupola di Brunelleschi_신의 집)에 그려진 천정화로 바이블의 신약과 구약의 이야기가 여덟편으로 요약되어 나뉘어 있다. 천정 바로 아래서 올려다 본 모습.(촬영: 지난해 11월)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은 예술가들이 남긴 작품들


피렌체에 둥지를 튼 후 눈여겨본 것들은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르네상스의 위대한 예술가들이 작품을 찾아 발품을 파는 것. 이런 일들은 거의 매일 일과처럼 진행됐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는 르네상스의 환상이 한풀 꺾이게 된 것을 발견하게 됐다. 그리고 시내로 나갈 때면 관광객의 인파를 피해 저만치 돌아다닌 것. 르네상스가 남긴 유산보다 르네상스의 고도를 휘감고 도는 아르노강이 훨씬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른바 르네상스 시대에 남긴 위대한 예술가들의 미술품 조각 건축물 등 실로 놀랄만한 작품들의 모티브는 바이블(Bibia)이 주된 재료였다. 어떤 사람들은 작품들 속에 나타난 몇 가지 주제를 들어 르네상스가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나아가는 발판을 구축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내 생각에는 얼토당토않았다. 




우피치 미술관 혹은 빨라쪼 피티 박물관 가득 전시된 당시의 작품들은 여전히 교황청 혹은 바이블을 칭송하거나 예찬하는 작품들이거나 모티브가 되었던 것들.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은 위대한 예술가들이 남긴 작품들로부터 느낀 솔직한 감정은 여전히 신본주의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사정이 이러함으로 피렌체는 마치 거대한 종교 박물관 혹은 학습장으로 보이게 되는 건 비단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을까. 


요즘은 상상 조차 할 수 없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르네상스에 가려져있었다. 한 가문의 돈놀이를 통한 부와 권력의 축적 등으로 총동원된 예술가들의 작품이 이름하여 문예부흥(文藝復興, Rinascimento_Renaissance)을 낳았다는 것. 우리가 말하는 문예혁신은 이렇게 탄생되어 어느 날 내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메디치 가문이 전혀 의도하지 않은 사건이 인류문화사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타났다 사라진 것이다.



#한밤중에 돌아본 메디치 가문의 예배당


참 이상한 일이었다. 지난 25일 한밤중 일이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위치한 메디치 가문의 예배당 앞을 지나는데 한 카페 앞에 무수한 꽃을 내놓고 달콤한 향기를 풍기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한밤중이라 인적이 거의 끊긴 그곳에서 뷰파인더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꽃의 요정들 곁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며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달콤한 향기를 품어대는 요정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메디치 예배당 곁에서 환상이 어른거렸다. 


그들은 노동자들이었다. 남루한 차림의 이들은 손수레에 커다란 돌덩어리를 싣고 나르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그 돌들을 다듬고 있었다. 돌들의 색깔은 서로 달랐다. 누르스름한 돌과 하얀빛이 도는 돌들이 뒤섞인 채 커다란 건물을 만들어 나가는 것. 가끔씩 공사 현장에는 필립뽀 부르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가 번갈아가며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지난해 11월, 우리 내외가 메디치 예배당을 관람하면서 다른 데서 느끼지 못했던 감동을 이곳에서 느꼈다. 피렌체의 여타 박물관과 달리 메디치 예배당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르네상스 당시 재벌의 무덤과 예배당이 한데 어우러진 곳. 그곳에서 두 거장의 작품을 만난 것은 물론 이들 작품을 통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이 건축에 참여했을까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현대에 다시 똑같이 만들 수 없을 것 같은 작품에 놀랐고, 이를 건축한 사람들의 수고에 놀란 것이다. 좀 더 과장해서 표현하면 거장들은 수많은 노고를 끼친 사람들의 테이블 위에 숟가락만 걸쳐놓았다고나 할까. 

사람들로부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는 르네상스 유산들의 배경에는 이름은 물론 성도 모르고 얼굴 조차 기억되지 않은 채 사라져 간 피렌체 공화국의 시민들이 있었던 것. 그들은 모두 다 어디로 사라졌다는 말인가. 그때, 내 곁에는 이름 모를 새들의 노랫소리와 함께 달콤한 향기를 휘날리며 작은 요정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다시 환상을 들려주는 것. 르네상스를 일군 진정한 영웅들이 내게 말을 거는 것이다.


"어디로 사라지긴요. 우리의 혼들이 오늘 밤 당신과 함께 하고 있는 걸요..""





CAPPELLE MEDICEE
Situato in una parte della Basilica di San Lorenzo, un tempo parrocchia dei Medici e luogo di sepoltura dei membri della famiglia a partire dal Quattrocento, il museo è famoso soprattutto grazie alla presenza delle tombe di Giuliano e Lorenzo de’ Medici, realizzate da Michelangelo nella cosiddetta “Sagrestia Nuova” e capolavoro di architettura e scultura rinascimentale.
Da questo sito CHE NON E' IL SITO UFFICIALE, è possibile però acquistare i biglietti per visitare Cappelle Medicee, senza fare la coda e scoprire i nostri straordinari tour!


La Notte_Cappelle Medicee FIRENZE
25 Maggio 2019 Via del canto dei Nelli
Foto di yookeun Chang_Geograf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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