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어딘가 숨어있는 비밀스러운 공간에는 자그마한 서점이 있다. 살다 보면 그곳이 내가 찾던 곳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 사람이 내가 찾던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다 와서도 발걸음을 돌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내가 찾던 어마어마한 가치들은 사실상 보물처럼 사랑 안에 숨어있곤 했었으니까.
그런 사랑의 좌충우돌을 밝히며 계단을 하나둘 오르는 거다. 멀리서 표지가 보였고 나는 문을 벌컥 열었다. 조금은 위험한 냉기가 땀으로 젖은 나의 땀구멍을 건들었는지. 나도 모르게 스산한 바람이 고마워 입꼬리가 올라갔다. 시원한 얼음 컵 권유로 내 기분은 최고치가 돼버린 거다. 누구를 만나도 반갑게 인사하고 싶을 정도의 격한 환호에 충동이 내 안 깊숙이 끓어올랐다. 사장님의 서점 이용 설명을 들으며 안쪽 두꺼운 나무 책상에 앉았다. 그 자지 말고 저 자리로 부탁합니다. 그리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고 그리고는 가져온 책을 꺼내 든다.
‘당신을 그리고 당신을 씁니다.’ 오늘 아침에 택배로 받은 따끈한 책이었다. 나는 그 책의 표지를 훑으며 지금 이곳에 오고 있는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글을 통해 만났고, (어떻게 보면 대화를 통해 만났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녀의 글을 읽으면서 사랑이 읽혔고. 그림을 보면서 표정이 궁금해졌고, 사진을 보면서 삶이 보였다. 꼭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녀의 글은 늘 사랑을 과거에만 두지 않는 힘이 있었고, 간혹, 마음을 언저리를 울리기도 하고 세차게 두드리다가 기울어진 마음을 내 쪽에서 그녀 쪽으로 옮기는 듯한 기분을 족족 받게 했다. 그녀를 만나면, 꼭 그녀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줘야 다짐한다. 관련된 것이 꼭 글만이 아니더라도 나는, 책임감을 느끼고 이 관계를 이끌어가기 위한 관심사. 즉 치밀한 작전이 필요했던 거다. 나를 도울 것들을 찾기 위해 부단히 그래서 자꾸 주위를 둘러본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온통 그녀로 집중된 상태에서 책은 눈에 들어오진 않았고 글만 읽히는 순서였다. 그때 어떤 여자가 크게 인사하며 들어왔다. 그녀였다. 느낌만으로 그녀일 거라는 확신이 그녀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앞섰다. 아차. 이곳은 소곤소곤 짧게 대화해야 하는 곳임을. 아직 알려주지 못했는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마치 나만의 공간인 것처럼 그녀의 말이 내게만 들렸으면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아직 이 공간에 대해, 나의 공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해맑은 얼굴과 표정은 점점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녀가 왔다는 사실과 시선을 이미 의식하였지만, 귀만 팔랑 거친 채 책만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느새 그녀가 가까이 왔다. 고운 인사였지만 밝은 미소로 인해 나는 압도당했고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나는 손을 뻗어 의자를 가리켰다. 그녀는 늦어서 죄송하다는 사과를 덧붙이고 나서 자리에 앉아 주었다. 그리고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나는 낯을 가리고 어색한 나머지 어떤 이야기라도 꺼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는 사람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면 항상 이런 식이었다. 어깨는 경직되어 있고, 입술은 계속해서 마르겠으니. 제대로 눈을 보지 못하고 시선은 뺨과 귀, 턱 등 눈 주위만 맴돌 뿐이었다.
그러한 내가 딱 한 번.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 눈을 쳐다봤다.
그렇게 상처받았음에도, 상처를 후벼팠음에도 다시. 다시
나는 믿는다. 세상에는 사랑이 이끄는 어떤 만남이 있다는 것을.
그때는 왜인지 나에 관한 이야기를 한껏 꺼내놨었다. 아니, 나에 대한 그 기준이라는 게 나에게 있는 것이라고 해도 될까.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살아왔던 이야기를 얼마큼 깊게 늘어놓을 수 있는지. 그 정도가 매우 달랐다. 아예 아무 얘기도 하고 싶지 않은 경우도 다반사였고, 이야기가 중간중간 뚝뚝 끊길 때는 남의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처럼 떠벌리는 경우도 빈번하게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분명 타인으로부터 느껴진다. 그럴 때는 이야기가 듣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건지 그 사람 자체가 싫은 건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내가 또 남의 이야기를 떠벌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좋게 말해서 이야기꾼이지. 위선자나 다름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내가 과거의 이야기를 이어서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전적으로 상대에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예를 들어 듣고 있는 태도라던지 반응이 좋아서 서로에게 좋은 대화로 남겨지는 경우도 분명 무시할 수 없겠다.
나는 분위기에 의해 좌우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소위 분위기에 취한다는 말, 분위기가 중요하다는 말, 분위기가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매혹적인 힘을 간과할 수 없던 것이다.
눈동자를 돌리며 내가 이런 나만의 대화를 하는 동안 그녀가 나를 시기하듯 쳐다보았다. 분위기는 노래를 넘나들고 눈동자를 타고 지나가는데 거기에 끌리는 순간, 이야기 소재는 무의미해진다. 또 분위기는 정적과 침묵에 있다. 서로가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 치자. 그 사이 공백이 있는 동안 어색함이 없다면 이미 분위기가 우리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거다. 하고자 하는 언행 사이사이에 당신이 묻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멈출 수 없는 상태. 나는 그러한 분위기를 사랑할지도 어쩌면 사랑 너머의 영원한 순간에 휩싸였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분위기는 조명 속에 산다. 얼굴빛을 가려 부끄러움과 고백의 현장으로 숨 쉬는 이만큼의 신비로움도 없이 분위기는 떨림을 만든다. 그녀가 고개를 상하로 흔드는 그것 말고도 흘러나오는 간주에 맞춰 몸을 좌우로 흔드는 모습이 마음을 순식간에 커지게 한다.
어느새 그녀는 나의 말에 어느 정도는 동조한 건지 턱을 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나는 그녀와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을 몰래 했다. 다짜고짜 첫 만남부터 나의 마음을 통째로 드러낼 수는 없을뿐더러 지나간 사랑에 아픔 덕인지 자꾸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용기 없는 내가 떠올라 견딜 수 없었다. 모순적이게도 이 순간이 사랑의 돌파구는 내가 믿는 분위기가 아닌 현재에 있음을 마음이 내게 대신 알려주는 것 같았다.
그녀가 일어났다. 그녀가 이곳을 둘러보았는지. 이 공간이 참 예쁘지는 않은지 물었고, 나는 둘러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래야만 했다. 그렇지만 공간이 예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곳은 조명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노란빛의 조명으로 뒤덮인 작은 책상 등이 자기 자리 한 자리씩을 차지했고, 더 어두워지는 시간이면 개인 등이 조명 구석구석을 메꾸어 주었다. 마치 인간처럼 서로서로 약점을 보완하는 격이었다. 살과 살이 맞닿은 곳에서 조명은 세밀하게 스며들어 파고들 수 없는 서로의 어두운 면모를 자연스레 꺼내게 하는 장치가 아니던가.
그 사람은 파랑 조명 같았다.
괜찮아요?
내가 또 망상에 젖어있자 그녀는 내가 중얼거리는 말을 언제 들었는지 물었다.
나는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며 내가 괜찮은지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은요.
나는 입술을 뗐다.
그녀가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만들어진 따뜻한 공기 위해 올라타는 사람이 있지만, 되려 그런 흐름을 만드는 사람이 있다. 없던 분위기도 가져오는 그녀는 그런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우리는 대화했고
우리는 계속해서 대화했다.
시간이 흐르니 공간은 어두워졌고 하늘색으로 보이던 하늘이 태양 하나 없는 색으로 변해있는 듯했다. 대화가 깊어지니 내 안에 조명도 같이 바뀌었다. 조명을 따라서 나의 눈도. 나의 눈에서 그녀의 시선으로 찬찬히. 노랑과 파랑이 겹쳐지니 하나의 초록빛이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