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보면 아프다
-여성 지식인과 업(業) - 다섯번째 이야기
나태주 시인은 <풀꽃>이라는 시를 통해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라는 표현을 했다. 하지만 인간관계에서 보면 인간은 풀꽃이 아니라 선인장 같아서 너무 가까이 가게 되면 아프게 된다. 건강하지 못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너무 가까이 가게 되면 집착하게 되고, 애증이 생긴다. 인간관계를 맺을 때 타인의 눈빛이나 태도를 민감하게 포착하는 사람들이 타인에게 잘 맞추게 되고, 타인중심적으로 살아가게 되어 '이 사람이 날 싫어하나' 혹은 '이 사람이 날 좋아하나' 하는 수만가지 생각을 하게 되고 결국 잘 다듬어지지 않는 감정 상태로 상대에게 집착하게 된다. 집착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거리를 가깝게 하고 싶은 욕구가 큰 것이다. 인간관계에 대한 욕구가 큰 사람일수록 특정 인물과 거리가 가까워지고 싶기 때문에 그 사람 생각밖에 안날 수 있다. 이런 경우 자신의 관계욕구를 돌아봄으로써 특정 사람에 올인하지 말고, 다양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줄 필요가 있다.
사실 관계적 욕구는 사람마다 서로 천지차이다. 일례로 나는 관계 욕구가 거의 없다. 나는 친구나 연인에 대한 관심이 없는 편이다. 그런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것보다 내가 해야 할 일, 추구할 목표가 훨씬 더 중요하다. 내가 결혼을 안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나는 자유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끊임없이 배우자와 관계를 유지해나갈 자신이 없었다. 젊었을 때는 나 역시 좋아하는 사람을 쟁취하기 위해 관심을 끌고, 애정을 표현하는 열정적인 연애를 하곤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상대가 너무 가깝게 다가오면, 귀찮고 피곤해져서 결별을 통보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 나는 관계욕구가 아주 적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친구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적절한 '심리적 거리'가 건강하게 유지되는 관계를 원했다. 친구라면 가끔 연락을 주고 받다가 오랫만에 한번 만나 맛있게 식사하는 사이, 연인이라면 가끔 통화하다가 주말에 한번 만나 즐겁게 노는 사이 그 정도가 가장 이상적이라 여겼다.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오로지 관계에만 쏟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관계에 대한 욕구가 천지차이라는 것만 안다면, 인간관계는 어렵지 않다. 나는 친구가 거의 없는 편인데, 나이 불문하고 가끔 전화오는 인연은 여럿 있다. 대체로 신상문제와 관련된 상담 전화가 많은데, 한동안 연락 안하다가 불현듯 내가 생각나서 전화를 한다는 식이다. 몇 달에 한 번, 일년에 한 두번씩 연락하는 사람들이 나는 오히려 반갑다. 나는 그들과 심리적 거리를 잘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오랜만에 대화를 나누어도 스스럼없고, 그들의 고민 상담을 더 따뜻하게 해줄 수 있다. 한 번은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은 후배가 오랜만에 연락이 와서 부부만의 내밀한 고민을 털어놓은 적 있는데, 나는 적잖게 당황했었다.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충족받지 못한 애정을 다른 남성을 통해 받고자 하는 욕구가 컸는데, 당시 내가 그녀의 욕구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상담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관계 욕구가 강한 사람일수록 사랑받고 싶어하는 욕구,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강하기 때문에 상대에게 집착하게 된다. 그런데 집착을 많이 하게 되면 상대가 도망가게 된다. 최근 나는 20년 넘게 알고 지낸 선배에게 결별을 고했는데, 내가 도망친 것과 다름없다. 코로나 시기 그녀는 건강악화로 사회활동을 접었는데, 나에게 연락이 와서 만난 적이 있다. 나는 그녀를 차에 태우고 바람도 쐴겸 서울 근교를 드라이브하며 식사도 하고 고민도 들어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녀도 훨씬 자유로워진 모습이었다. 그리고 가볍게 헤어졌는데, 이후 자주 연락을 해왔고 나는 성의껏 답장을 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로부터 자기 친구의 신상문제를 상담해 줄 수 있냐는 연락이 왔다.
사실 나는 타로카드를 조금 해석할 줄 알았는데, 가끔 그녀를 상담해 줄 때 이런 지식을 이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불쾌감이 강하게 올라왔다. 사실 그런류의 상담은 정신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것이라 아무에게나 해주지 않는다. 실제로 타로상담은 돈을 받고 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정신노동에 대한 정당한 댓가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멘탈이 약하고 걱정이 많은 성격이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특별히 신경을 쓴 방법이었는데, 이제 친구 고민까지 상담해달라고 요청을 해 온 것이다. 나는 그녀가 우리 관계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심리적으로 나는 전혀 그녀를 가깝게 여기지 않은데 그녀는 이미 가까워졌다고 여긴 것이다. 나는 따끔하게 몇 마디 했고, 그녀는 깜짝 놀라며 사과했다.
그 이후로도 그녀는 가끔 카톡, 문자, 전화를 해왔다. 그녀는 나를 다시 만나고 싶어했다. 그러나 나는 일체 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귀찮고 피곤해졌기 때문이다. 이 정도로 관계가 멀어지면 관계 정리의 시그널이라 볼 수 있다. 최근 다시 전화가 왔고, 나를 걱정하는 투의 문자까지 와 있었다. 나는 때가 되었다고 보고, 최대한 예의바르고 정중하게 그동안의 고마움을 표했다. 그리고 결별을 고했다. 아마 그녀는 매우 아팠을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나와 같은 인연을 통해 인간이 풀꽃이 아닌 선인장임을 알게 되었을 테니까. 자세히 보면 아프다. 특히 나처럼 가까워지는 것을 회피하는 인간에게는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