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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運)과 직업

여성 지식인과 업(業) - 세 번째 이야기

by 유랑인

원래 '여성 지식인과 업(業)'이라는 주제의 글쓰기는 한 두편으로 끝낼 작정이었고, 시리즈로 써내려 갈 계획이 없었다. 앞서 두 편의 글은 내가 겪은 여성 지식인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서술한 것인데, 쓰고 보니 에세이인지, 논설인지 규정하기 어려운 글이 되었다. 원래는 여성 지식인을 둘러싼 직업적 애환(哀患)을 글로 표현하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최근 겪은 경험 때문에 내면에서 묵혀둔 생각들이 갑작스레 떠올라 글쓰기가 이루어진 것이다. 나는 여성 지식인의 삶에 드리운 정신적, 물질적 고뇌를 곱씹어 보게 되었고, 그동안 무신경하게 생각했던 문제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나는 이들에 비해 사회적 지위나 소득이 높지 않았다. 물론 한 때 정부산하 연구기관의 전임연구원으로서 채용되어 높은 연봉과 지위를 누린 적도 있다. 하지만 계약직을 두 번 연장한 후에는 다시 불안정한 현실로 복귀하였다. 비록 계약직이 몇 년 사이 짧게 끝났지만, 나는 상사복(福)이 있었다. 나의 사수였던 책임연구원은 나와 같은 대학원 출신이었는데, 다른 학과에서 공부한 분이었다. 그런데 운좋게도 그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어쨋든 그는 나의 일머리를 신임했고, 실무적인 모든 일을 내게 일임했다. 나는 사수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각종 문화포럼과 행사들을 기획하고 집행했다.


문제는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여성공무원들과의 마찰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예산을 편성해서 우리 기관에 집행하도록 넘겨주는 '갑'의 입장이었고, 우리는 예산에 맞게 새로운 기획을 해야 하는 '을'의 입장이었다. 40대 이후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에게 조직의 계급구조(hierchy)가 무엇인지 알길 없었다. 게다가 나는 무소불위의 자신감 하나로 살아온 처지였기에 언제나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하지만 운명은 나를 내버려두지 않고, 노회한 여성서기관과의 인연을 통해 태도를 수정하도록 요구했다. 일단 그녀는 내게 말투부터 공손히할 것을 부탁했다. 나의 기세를 꺾으려는 것이 뻔히 보였다. 나는 중간의 낀 사수를 생각해서라도 고분해지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결심했고, 이후로 수용적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문화포럼 기획안에 있어서만큼은 그들에게 양보할 수 없었다. 나는 예술성과 전문성을 갖춘 포럼을 기획하였는데, 서기관과 주무관은 대중성 있는 포럼을 가장 높은 가치로 여겼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연예인이나 유명인사를 중심으로 문화포럼을 기획하기를 바랬다. 그렇지만 나와 내 사수는 유명인사보다 잘 알려지지 않았어도 양질의, 수준높은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는 내공있는 인물들로 구성된 포럼을 기획하고자 했다. 이 점에서 우리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우리가 '갑'이 아닌 '을'의 조직에 속했어도 우리는 국민 세금으로 집행되는 예산이 헛되이 사라지길 원치 않았다. 그것은 학자적 양심의 최후 보루였다. 나의 최초 기획안은 문체부 주무관, 서기관, 과장, 국장급까지 올라가면서 수없이 수정되었다. 공무원 집단은 일종의 대중성과 언론의 코스프레를 먹고 사는 집단 같았다. 집행 사업이 언론에 보도가 되었는가, 얼마나 많은 횟수로 보도되었는가 하는 점이 가장 중요했다. 하지만 우리는 끝까지 원칙을 양보하지 않았고 결국 그들과 타협점을 찾는데 성공했다. 그것은 유명인사를 한 두명 넣는 것으로 양보하면서, 대신 다양한 문화산업 현장에서 근무하는 청년들을 섭외하여 해당 전문가와 한팀을 이루는 형식으로 해당 포럼 기획을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그 때 나는 처음으로 직업의 보람을 느꼈다.


하지만 전임연구원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박근혜 정부에서 집행된 문체부 예산이 최순실 사태와 교묘하게 연결되면서 내가 맡은 다음해 문화프로젝트가 예산을 배정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 이후에도 해당기관에서 나를 여러번 채용하긴 했으나 정규직은 아니었다. 나의 직업은 늘 불안정했다. 서울로 돌아와 맡게 된 강사생활 역시 안정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와 가르치고 연구를 할 수있는 자리가 주어진 것으로 만족했다.


나는 학회일을 도맡아 열심히 일했다. 모 학술대회를 혼자 다 준비했다. 100명 이상 교수ㆍ강사ㆍ석박사가 참여하는 대규모 대회였다. 도와줄 학생들도 없었다.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으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 학회의 회장이 소송에 걸림으로써 그의 손발이 되어줄 학생들이 모두 나가리가 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학술행사는 잘 마무리되었고, 그해 학술지도 문제없이 간행되었다. 나는 큰 보람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신(新)강사법이 마련되더니, 강사들 가운데 삼분의 일이 재계약이 되지 않았다. 내게 강의를 주던 학과는 내가 졸업한 곳이 아니었기에 나는 직격탄을 맞았다. 해당학과 교수가 '어쩔수없다'라고 문자를 보내왔다. 2019년 가을에 벌어진 일이다. 그 이후로 나는 여러 번의 일자리 관련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개인연구소를 창업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이것을 운(運)이라 부른다.


나의 일자리 변동에는 항상 '국가'가 개입되어 있었다. 정치적 소요 사태나 새로운 법안이 나의 직장에 직격탄을 날리곤 했다. 내가 조직에 머물러 보람을 얻고자 할 때마다, 조직은 나를 밀어내었다. 기이하리만큼 나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나는 이것을 운(運)이라 부른다. 국가의 운(運)이 나의 개인적 운(運)에 강하게 영향을 미친다는것이 내가 새롭게 깨달은 사실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국운(國運)의 흐름을 타는 것은 아니다. 개인별로 정도의 차이는 있다고 본다. 다만 우리 개인의 운명이 정치와 법(法)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알고는 있어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치열하게 노력해도 국가의 운이 강하게 작용할 때는 어쩔 수 없다. 이 때는 '운이 주는 시그널'을 인지해야 한다. 그것이 아닌 다른 길을 암시하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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