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율디자인 May 20. 2020

그때 이 비즈니스를 안 해서 다행이야

그 시절 구상했던 구독 서비스 비즈니스를 되돌아보며

친구를 기다리는데 40분 정도 시간이 애매하게 남았다. 서점에 들어가 시간 때울 거리를 찾던 중 매대의 『구독 경제는 어떻게 비즈니스가 되는가』(한스미디어, 2020)라는 경영서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구독 경제가 흔해진 요즘. 문득 2012년도 말이었나, 2013년도 1월쯤 몸 담았던 창업동아리 활동이 생각났다.


ⓒ 한스미디어


그때 팀원들과 전국 단위의 창업대회를 겸하는 캠프에 참여했다. 그 창업캠프에서 우리가 준비해 온 아이템을 급하게 수정했었다. 비즈니스 기획 경험이 부족하기도 했고, 시간이 촉박해서 발표 PT를 충분히 다듬지 못해 아쉬웠던 것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2012년은 한국에서도 서브스크립션(구독) 서비스가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대표적인 사례는 화장품 구독 서비스 '미미박스'. 당시 미미박스는 일정 금액을 정기 지불하면, 매달 그 금액선의 화장품을 보내주는 구독 서비스를 제공했다. 색조나 기초라인 같은 제품 카테고리는 직접 설정할 수 있었고, 상품은 미미박스가 골라 보내주는 식이었다. 대부분의 제품들은 사용 후기가 좋은 로드샵 제품들이었다.


우리의 아이디어는 지역의 사회적 기업 제품 유통을 돕는 식품 구독 서비스였다. 모든 비즈니스가 그렇지만, 특히 대학생 창업동아리의 아이템은 당시 주요 이슈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기 마련이다. 이때는 웰빙, 착한 소비, 사회적 기업이 주요 키워드로 떠오르던 시기였다.


주요 아이템은 인근 지역의 자취생을 비롯한 1인 가구에 주 1회 든든한 한 끼를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식품 키트이다. 자취생 및 바쁜 직장인 1인 가구의 든든한 한 끼를 책임지는 밀 키트meal kit. 예를 들어, 된장찌개 키트에서는 한 냄비 분량의 된장, 파, 두부, 감자 등의 재료를 포장하여 보내주는 식이다. 말이 '한 끼'였지, 한번 요리해놓으면 두세 끼는 먹을 수 있는 분량이었다. 가격은 월 2만 원 선으로, 매주 1회 든든한 1~3끼 분량의 밀 키트를 제공 예정이었다.


국이나 찌개, 볶음요리 같은 집밥이 그리워도, 혼자 살다 보면 찌개 한번 끓이기 위해 무 한 덩이, 파 한 단, 양파 한 묶음을 사기 부담스럽지 않은가. 지금은 1-2인 가구를 위한 소분 재료, 밀 키트, 반조리 상품이 정말 많지만 2012년도는 지금보다 풍족하지 않았다. 더구나 소분한 재료는 양에 비해 비싸 왠지 구매자가 손해 보는 느낌을 주었다.


자연스레 1인 가구의 냉장고는 계란과 냉동만두, 오래된 자투리 재료로 채워지는데 그 재료마저 쓰려다 보니 시간이나 다른 재료가 부족해 먹어치우기 힘들어지곤 했다. 비슷한 서비스로는 대학가에 아침 배달 서비스가 유행이었는데, 주로 과일, 샐러드, 주먹밥의 간편 도시락이었다.


ⓒ 테이스트샵


비즈니스를 실현시키기 위해 고려할 사항은 많았지만 크게 세 가지가 관건이었다.   

1. 물류창고와 배송 서비스

2. 다양한 착한 기업과의 파트너십

3. 식품 유통 관련 인증


식품인 만큼 제품의 신선도를 유지, 관리할 수 있는 물류창고와 유통 서비스가 필요했다. 다양한 식품을 제때 들여오고, 관리하고, 배송하는 일련의 과정을 어떻게 설계할 지 고민되었다. 위생과 신선도를 유지하는 제품 포장 역시 중요했다.


게다가 지역 착한 기업을 돕기 위한 구조의 비즈니스였으므로, 소비자가 만족할 만한 제품을 생산하는 착한 기업과 파트너십을 맺어야 했다. 한식(집밥) 밀 키트 특성상 여러 가지 재료가 들어간다. 두부나 햄 같은 가공식품은 물론 야채와 양념, 고기까지 모든 제품군을 제공하려면 농장과 공장 등을 물색해야 했다. 여러 업체와 계약해야 했고, 여러 거래처의 식품들을 관리해야 하는 업무는 어찌 보면 수익 면에서 비효율적일 수도 있었다. 착한 기업 인증을 받은 기업 제품을 유통함으로써 고객들은 착한 소비를 실천하게 되는 구조를 꾀했는데, 단가 책정부터 실패하면 비즈니스가 아니라 봉사활동이 되어버릴 수도 있었다.


또한, 식품 유통 사업이라 시설을 비롯한 여러 관련 인증을 거쳐야 했다. 주기적인 관리와 혹시 모를 사고에 대한 대비책도 필요했다. 그밖에도 서비스 유지 비용이 부과되는 부분은 여러 가지였다.


당시 캠프에서는 발표하지 않았지만, 이 비즈니스가 실패할 이유에 대해 팀원들과 많은 얘기를 나눴다. 이건 망한 비즈니스라며 엎어버리고 싶었다. 그때 발견했던 가장 큰 문제는 타깃 설정이었다. 처음 타깃은 범위를 좁혀 '대학가의 대학생 자취생'으로 잡았다. 배송의 효율성과 서비스 홍보를 위해, 처음에는 배송 기사를 해당 대학교 학생들을 아르바이트생으로 고용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 게티이미지뱅크

그러나 소비자 입장에서 이 비즈니스의 걸림돌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1. 자취생은 생각보다 집에서 밥을 해 먹지 않았다.


막상 자취생의 의견을 들어보니, 자취방에서 요리를 잘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초반 한 달은 자취의 환상에 부풀어 여러 요리를 시도하지만, 중간고사가 다가올 때쯤이면 모든 게 귀찮아진다고 한다. 특히 나 혼자 먹자고 국을 끓이고 반찬을 만드는 게. 생각보다 맛있지도 않을뿐더러 친구들과 수업을 듣다 보면 점심과 저녁을 사 먹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부모님께서 반찬을 택배로 보내주시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았다. 자취생들은 받은 반찬을 매번 먹다 보니 질려서, 혹은 혼자 먹기에는 너무 많은 양을 보내주셔서, 집에서 밥을 먹는 경우가 잘 없어서 등의 이유로 남은 반찬을 냉장고에 쌓아두게 된다고 했다. 20대 초반은 30대에 비교적 한식에 대한 선호도가  낮았으며, 대학가에서는 학교 앞 식당이나 학생식당에서 4000원에 든든한 정식 한 끼를 먹을 수 있었다. (2013년도 비수도권 캠퍼스 기준)   


2. 자취생은 생각보다 가난하다.


용돈이나 아르바이트비로 생활비를 부담하는 대학생 입장에서는 꼭 지출되어야 하는 식비도 부담스러워질 때가 있다. 매달 만 원 이상 지출되는 구독 서비스는 특히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었다. 우리 서비스는 월 1만 5000원에서 2만 원 정도를 예상했는데, 총 4번의 키트를 제공받고, 8끼 이상을 해결할 수 있다 해도 막상 결제일이 되면 돈이 아까운 마음이 들 수 있었다. 더구나 당시 최저 시급은 4500원 정도였다.

본래 인간은 모든 소비를 합리적으로 하지 않는다. 수업을 마치고 4000원짜리 커피를 마시고, 피시방과 당구장에서 5000원을 소비한다 해도, 매달 결제되는 월 2만 원의 4끼 이상의 밀 키트는 비싸다고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소비와 생활 패턴은 언제나 바뀔 수 있기 마련이다. 이번 달에는 돈을 아껴주었던 서비스가 다음 달에는 오히려 낭비로 느껴질 수도 있었다.   


3. 식품은 특히 믿을 수 있는 제품을 선호한다.


착한 기업, 사회적 기업 인증을 받은 기업들은 대부분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 취약계층이 직원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회적 기업에서 생산한 두부'라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두부공장에서 장애인 노동자가 열심히 두부를 만드는 모습'을 떠올렸다. 사실 이런 이미지를 통해 나름 감성 마케팅을 펼쳐보려 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오히려 식품 분야인 만큼, 대기업의 가공식품을 선호한다는 의견이 제법 있었다. 채소 역시 유기농을 바라지는 않지만, 작은 농장일수록 농약을 더 많이 쳤을 거라는 인식이 있었다. 가공육 또한 마찬가지였다. 식품이니 더 조심스럽게 접근하고자 했던 부분이었는데, 아무래도 소비자의 인식을 바꾸기는 어려웠다.

조금 결이 다르지만, 대기업보다 문구점의 불량식품 생산공장이 더 위생적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불량식품의 주 고객이 초등학생인데다 '불량'이라는 수식어 탓에 공정마저 불결할 거라는 인식이 강해, 학부모들의 요청으로 감사를 더 많이 진행한다는 내용이었다. 식품 공장이라 원래 시설 위생에 신경을 쓰기도 하고, 감사도 잦아 더욱 청결한 공정을 유지한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식품 분야의 중소기업에 대한 인식은 여전한 것 같다.


4. 생각보다 경제적이지 않다.


포장과 유통의 효율성을 고려해 우리(판매자)가 선정한 메뉴로 매주 밀 키트를 구성하여 배송할 예정이었다. 주로 찌개, 국과 같은 다양한 양념과 재료가 필요한 대용량 반찬이었다. 매주 다양한 메뉴를 구성해보려 했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원하는 제품 구성이 아닐 수 있다. 햄 같은 가공육을 안 먹거나, 보내준 고추장과 김치가 입맛에 맞지 않을 우려도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식자재는 주변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데, 가격도 비싸지 않다. 남은 재료 처리와 재료 다듬는 수고가 드는 점을 고려한다 해도, 우리의 밀 키트를 구독하는 게 비효율적일 수 있었다.

판매자 입장에서도 재료를 소분하고, 다듬고, 포장하는 공정을 거쳐야 했는데 이걸 업체에 위탁한다면 또 다른 비용이 발생했다. 직접 작업하는 건 유통 상품이라 위생기준에 적합하지 않았다. 따라서 메뉴로 따지면 경제적일 수 있지만, 그 맛과 재료로 보면 그다지 경제적이지 않을 우려가 있었다.


ⓒ 마켓컬리

지금은 간식, 꽃, 가방, 심지어 주거 서비스까지 의식주 이상의 분야에서 다양한 구독 서비스가 마련되어 있지만, 이 비즈니스를 구상하던 2012년 말에는 그렇지 않았다. 현재는 반조리 식품, 소분 재료, 다양한 밀 키트 등 식품 업계에서 1코노미가 확산되었다. 그 밖에도 쿠팡의 효율적인 물류/배송 시스템, 이마트 쓱 배송, 마켓컬리 등 1인 가구가 간편하게 맛있는 음식과 식재료를 구입할 수 있는 경로는 다양해졌다.


2013년 당시에도 비즈니스를 실현하기에는 비효율적이라 판단했지만, 그때 이 비즈니스를 그대로 실현했다면 지금쯤 망했을 것이다.


ⓒ suitsbox

『구독 경제는 어떻게 비즈니스가 되는가』는 양복 정기구독 'suitsbox'가 서비스를 종료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혔다. suitsbox는 양복 제작업체 아오키 홀딩스가 2030 직장인 남성을 타깃으로 야심 차게 출시한 양복 대여 구독 서비스였다.   


1. 빗나간 타깃 설정


아오키 홀딩스는 '양복을 매일 입어야 하지만, 여러 벌 구매하기는 부담스러운' 20~30대 직장인 남성을 타깃으로 했다. 그러나 실제 사용자는 40대 남성이었다. 가벼운 옷차림을 선호하는 사무실이 늘어나는 추세여서 정작 20~30대 남성은 양복을 매일 입지 않았다. 반면, 40대 남성은 양복을 구매하던 아오키 홀딩스의 기존 고객이었는데, suitsbox 서비스의 주 고객이 되면서 기존 사업에 타격을 받게 되었다.   


2. 상품 구성의 어려움


아오키 홀딩스의 일부 제품군을 suitsbox 서비스에서 제공했는데, 문제는 구독 서비스인 만큼 다양한 양복을 입고 싶어하는 소비자의 수요를 충족하기 어려웠다. 기업이 예정했던 제품군보다 더 다양한 디자인의 제품을 suitsbox로 제공해야 했고, 이는 suitsbox 및 기존 서비스를 유지하는 데에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고 한다.   


3. 운용 비용이 생각보다 많이 듦


suitsbox를 위한 물류창고는 대여 서비스를 통해 해결했는데, 문제는 예상 금액 내에서 서비스를 운용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보관과 대여, 관리에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들었다고 한다.   


4. 이용 지속률 예측 어려움


운용 비용 관리가 어려운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이용 지속률 예측이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번 달의 고객이 다음 달에도 서비스를 이용할지, 3개월 후에도 여전히 고객으로 남아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특히 다양한 제품을 구독 서비스로 제공하기에는 여러 모순이 있었던 터라 아오키 홀딩스는 고민에 빠졌고, 결국 suitsbox 서비스를 종료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라쿠사스 테크놀로지의 고다마 쇼지 사장은 "비싼 물건은 싸게, 복잡한 것은 간단하게, 시간은 짧게" 세 가지 중 하나라도 만족시키는 서비스라면 수익사업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이야기했다.


우리가 구상했던 비즈니스는 "싼 물건을 비싸게, 간단한 것을 복잡하게, 시간은 길게" 만들었다.

작가의 이전글 초심자에게 추천하는 마크다운 에디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