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쓰는 에세이
창밖은 푸른 새벽이었다.
아침 신문을 보기 위해 현관문을 열었다. 조간신문과 아내가 주문한 신선 식품 사이에서 예기치 않은 봉투 하나 발견했다. 온라인 서점에서 보내온 택배였다.
“이게 벌써 왔다고?”
낮에 산다는 걸 잊고 있다가, 어젯밤 늦게 소설책 하나를 주문했다. 몇 달 전 이사한 뒤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작품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이사를 앞두고 헌책을 제법 버렸는데, 그때 딸려 나간 모양이었다.
“이렇게 일찍 오면 어떡해?”
책을 들고 들어오면서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빨라야 오늘 저녁이나 내일쯤 받아볼 거라고 예상했는데, 너무 일찍 도착했다. 뜻밖의 배송 속도에 잠시 당황했다.
청춘 시절, 마르케스는 내 문장의 첫 번째 스승이었다. 마르케스, 로맹 가리, 패트릭 모디아노, 미셸 투르니에, 그리고 마루야마 겐지. 나는 이들의 작품을 읽으며 문장을 배웠다. 마르케스에게는 신화적 상상력을, 로맹 가리와 모디아노에게는 허무와 멜랑콜리, 투르니에에게는 지성과 사유를, 마루야마 겐지에게는 고독을 배웠다.
책이 조금 천천히 오길 바랐다. 그사이 기다림의 즐거움을 소소하게 느끼고 싶었다. 기다림이 단순한 ‘지연’을 뜻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기다리면서 자라는 감정들, 이를테면 설렘, 기대감, 작은 흥분을 가만가만 음미하고 싶었다. 그리움에 조용히 잠기고도 싶었다. 과거로 돌아가, 내 스승들의 작품을 하나하나 떠올리고, 젊은 시절의 나도 다시 만나고 싶었다.
“서점까지 새벽 배송에 뛰어들었네,”
택배 봉투를 책상 위에 놓으며 혼자 말했다. 속도 경쟁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책까지 효율과 생산성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걸 보니 생각이 많아졌다. 속도는 이제 이윤 경쟁을 넘어, 우리가 섬기는 신의 자리에 오른 듯하다. 봄은 아무리 재촉해도 때가 되어야 오는데, 소설책은 천천히 오라고 해도 새벽에 도착한다. 속도 중독은 행운일까, 아니면 삶의 늪일까. 장자는 이미 2,500년 전에 쓸모없음의 쓸모(無用之用, 무용지용)를 가르쳐주었는데, 속도와 효율 경쟁 앞에서 무용의 가치는 이미 설 자리가 잃은 것일까. 문득 <미스터 션사인>의 나약한 지식인 김희성의 대사가 떠오른다. 곧 바람결에 흩어질 듯 헛헛하게 들리던 그의 대사가 오늘따라 유난히 절실하게 다가온다.
“난 원체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바람, 웃음, 농담, 그런 것들…….”
독백 같은 그의 대사에 응답하듯, 나도 연극배우처럼 혼자 중얼거린다.
“나도 원체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설렘, 여운, 그리움, 기다림, 뭐 이런 것들…….”
우리는 기다림을 잃어버렸다. 기다리면서 경험하는 섬세한 즐거움을 잃어버렸다. 이를테면 설렘과 기대감이 일으키는 영혼의 떨림, 그리고 그 떨림이 선물하는 감정의 운율을 감각할 권리를 우리는 택배와 문자 메시지에 빼앗겼다.
나는 창가로 다가온 새벽하늘을 보며 무용한 것들을 마저 세어 보았다. 느림, 서점 산책, 응달에 핀 민들레, 비스듬히 비치는 햇빛, 문득 올려다본 하늘, LP 음반의 미세한 잡음, 마지막 남은 커피 한 모금의 미지근한 온도, 뭐 이런 것들…….”
*비하인드 스토리 behind story
속도보다 방향이라고 했다. 이제는 조금 느리게, 조금 천천히 더 즐기고, 더 감각하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