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파민의 노예
또 그러고 있다.
엄지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인다. 위로, 아래로, 위로, 아래로.
인스타그램 → 유튜브 → 넷플릭스 → 다시 인스타그램.
무한 루프.
'5분만 보고 자야지' 했는데 벌써 2시간째다.
눈은 따갑고, 목은 아프고, 내일 출근해야 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아니, 멈추고 싶지 않다.
왜일까?
동영상 하나가 끝나면 다음 영상이 자동재생된다. 피드를 다 봤다 싶으면 새로운 게시물이 올라온다. 끝이 없다.
그리고 그게 좋다. 끝이 없으니까 멈출 이유도 없으니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
"절제는 중용의 덕목이다."
알고 있다. 하지만 손가락은 이미 다음 영상을 클릭하고 있다.
"띵-"
카톡 알림음. 조건반사처럼 핸드폰을 든다.
광고 메시지다.
실망스럽다. 아니, 실망스럽다는 게 이상하다. 왜 기대했을까?
하루에 받는 알림:
카톡: 127개
인스타: 43개
이메일: 67개
쇼핑앱: 29개
뉴스: 51개
총 317개.
깨어있는 시간을 16시간으로 계산하면 3분에 한 번.
파블로프의 개가 떠올랐다. 종소리에 침 흘리는.
나는 알림음에 반응하는 디지털 파블로프의 개다.
"한 판만 더."
새벽 1시에 시작한 게임. 벌써 4시다.
회사에서는 평사원이지만, 게임 속에서는 다이아몬드 랭크다. 현실에서는 월세방이지만, 게임 속에서는 성을 가졌다. 일상에서는 무시당하지만, 게임 속에서는 존경받는다.
어느 쪽이 진짜 나일까?
승리하면 도파민이 솟구친다. 패배하면 분노가 치민다. 그리고 다시 시작한다. 복수를 위해, 혹은 연승을 위해.
"님 왜 안 자요?"
팀원이 채팅으로 묻는다.
"님도요 ㅋㅋ"
우리는 서로 웃는다. 하지만 씁쓸하다.
플라톤의 동굴 우화가 생각났다.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를 실재라고 믿는 죄수들. 우리도 화면에 비친 픽셀을 실재라고 믿는 건 아닐까?
화장실 갈 때도 핸드폰. 엘리베이터 10초도 핸드폰. 신호등 대기도 핸드폰.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어제 실험해봤다. 하루 동안 핸드폰 확인 횟수 세기.
결과: 243회.
1시간에 15번. 4분에 한 번.
무엇을 확인하는 걸까? 놓친 게 있을까 봐? 중요한 연락이 왔을까 봐?
아니다. 그냥... 불안해서다.
핸드폰이 없으면 뭔가 놓치는 것 같고, 손에 없으면 허전하고, 진동이 없으면 외로워진다.
FOMO(Fear of Missing Out). 놓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
하지만 정작 놓치고 있는 건 지금 이 순간이다.
"일주일만 SNS 끊어보기!"
월요일에 결심했다. 앱도 지웠다.
화요일: 웹으로 접속해서 확인. 수요일: "잠깐만 볼게" 하고 앱 재설치. 목요일: "이미 실패했으니까..." 하고 포기.
왜 이렇게 어려울까?
니코틴 중독자가 담배를 끊듯이, 알코올 중독자가 술을 끊듯이, 나는 디지털을 끊지 못한다.
중독의 정의: 해롭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상태.
정확히 나다.
스피노자는 말했다.
"인간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욕망의 노예다."
내 욕망의 주인은 알고리즘이다.
친구 1,847명. (페이스북) 팔로워 923명. (인스타그램) 구독자 445명. (유튜브)
그런데 왜 외로울까?
생일날 축하 메시지 182개를 받았다. 하지만 직접 만나 축하해준 사람은 2명.
좋아요는 많이 받지만, 진짜 대화는 하지 않는다.
스토리는 매일 올리지만, 진짜 이야기는 나누지 않는다.
연결되어 있다는 착각. 소통하고 있다는 환상.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가 떠올랐다.
우리는 세계 안에 있지만, 정작 세계와 단절되어 있다. 모두와 연결되어 있지만, 정작 혼자다.
오늘도 새벽까지 핸드폰을 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가 보고 있는 건 화면이 아니라 도피처다.
현실이 힘드니까 가상으로 도망친다. 관계가 어려우니까 온라인으로 숨는다. 나 자신이 싫으니까 다른 사람들의 삶을 엿본다.
중독은 증상이지 원인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채우지 못한 공허함. 마주하기 싫은 현실. 해결하지 못한 외로움.
파스칼이 말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방 안에 조용히 앉아 있지 못하는 데서 온다."
맞다. 나는 조용히 앉아 있지 못한다. 나와 함께 있는 게 불편하다.
내일부터 '디지털 일몰' 실험을 시작하기로 했다.
저녁 10시 이후 핸드폰 끄기.
완전한 단절은 아니다. 그저 밤에만이라도 자유로워지기.
처음엔 불안할 거다. 손이 허전할 거다. 뭔가 놓치는 것 같을 거다.
하지만 그 불안을 견뎌보려 한다.
그 빈 시간에 뭐가 들어올까?
책 읽기? 일기 쓰기? 그냥 멍때리기?
뭐든 좋다. 화면이 아닌 것이라면.
에픽쿠로스가 말했다.
"적은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가장 부유하다."
적은 자극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
도파민의 노예에서 삶의 주인으로.
한 걸음씩.
오늘 밤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