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미로 - 과거와 화해하기

3년 전 그 날의 메시지

by 윤숨

8장. 시간의 미로 - 과거와 화해하기

3년 전 그 날의 메시지

새벽 2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오래된 카톡 대화를 발견했다.

"우리 이제 그만하자."

3년 전 내가 보낸 메시지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왜 하필 지금, 이 새벽에 이걸 보게 된 걸까.

스크롤을 올려본다. 행복했던 대화들. 사랑한다는 말들. 계획했던 미래들.

'그때 다르게 했다면...'

또 시작이다. 가정법 과거의 늪.

만약 그날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만약 조금 더 참았다면. 만약 다시 연락했다면.

니체가 말했다.

"가장 무거운 짐은 '만약'이라는 두 글자다."

맞다. 나는 3년째 이 두 글자를 짊어지고 산다.

첫 직장 퇴사의 후회

"너 진짜 그만둘 거야?"

5년 전, 첫 직장 동료가 물었다.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응. 더 좋은 곳으로 갈 거야."

지금?

이직한 회사는 1년 만에 그만뒀고, 그 후로 전전했다. 첫 직장 동료들은 이제 대리, 과장이 됐다.

페이스북에서 그들의 소식을 본다. 승진 축하 파티, 해외 연수, 성과급 자랑.

'그냥 있을 걸...'

후회가 밀려온다. 그때는 왜 그렇게 자신만만했을까. 왜 더 신중하지 못했을까.

하지만 정말 그럴까?

사르트르는 말했다.

"인간은 자신의 선택의 총합이다."

그때의 나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정보로 과거를 판단하는 건 불공평하다.

대학 시절 고백하지 못한 사랑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그녀.

매일 같은 자리, 같은 시간. 나도 그 시간에 맞춰 도서관에 갔다. 말 한 번 못 걸었다.

졸업식 날, 그녀가 다가왔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무슨 말인지 몰라 멍하니 있었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매일 도서관에서 봤잖아요. 덕분에 공부 열심히 했어요."

그녀도 알고 있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그때 용기를 냈다면?

프루스트가 떠올랐다.

"진정한 발견의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어쩌면 후회하는 게 아니라, 그 시절을 아름답게 기억하는 것일지도.

부모님께 하지 못한 말들

"아버지, 사랑해요."

단 한 번도 하지 못한 말.

작년에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다행히 회복하셨지만, 병원에서도 끝내 그 말을 못 했다.

왜일까?

한국 남자라서? 쑥스러워서? 아니면 아직 시간이 많다고 생각해서?

어머니께도 마찬가지다.

"고마워요." "죄송해요." "사랑해요."

마음속에만 있는 말들.

전화할 때마다 하려고 하는데, 결국은 "밥 먹었어요?"로 끝난다.

키르케고르가 말했다.

"인생은 뒤돌아보면 이해되지만, 앞을 향해 살아야 한다."

이해는 됐다. 이제 앞을 향해 말해야 할 때다.

새벽의 타임머신

불면증이 심한 날은 과거 여행을 한다.

2015년: 대학 졸업식

2017년: 첫 월급날

2019년: 이별의 순간

2021년: 이직 면접

2023년: 혼자 보낸 생일


각 순간마다 다른 선택지가 보인다. 평행우주처럼 갈라지는 수많은 가능성들.

하지만 이상한 건, 모든 선택이 결국 지금의 나로 이어진다는 것.

베르그송의 지속(durée) 개념이 떠올랐다.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현재 속에 녹아 있다. 우리는 과거의 총합이자 현재의 선택이다.

일기장의 예언

중학교 때 쓴 일기장을 찾았다.

"30살이 되면 멋진 어른이 되어 있겠지?"

웃음이 나왔다. 멋진 어른이라...

그때 생각한 30살은:

결혼해서 아이도 있고

좋은 직장에 다니고

집도 있고

해외여행도 자주 가고


현실의 35살은:

미혼

중소기업 직원

월세

제주도도 못 가본 지 2년


실패한 인생일까?

아니다. 그냥 다른 인생일 뿐.

15살의 내가 모르던 것들:

새벽의 고요함이 주는 위로

혼자만의 시간의 소중함

작은 일상의 기쁨

실패해도 계속 살아간다는 것


화해의 의식

오늘 새벽, 결심했다.

과거와 화해하기로.

촛불을 켰다. 그리고 종이에 적었다.

"후회하는 일들:

첫사랑에게 고백하지 못한 것

첫 직장을 성급하게 그만둔 것

부모님께 사랑한다 말하지 못한 것

친구와의 오해를 풀지 못한 것

나 자신을 너무 몰아붙인 것"


다 적고 나서 종이를 접었다. 그리고 창밖을 봤다.

과거는 바꿀 수 없다. 하지만 과거를 보는 시선은 바꿀 수 있다.

스피노자가 말했다.

"후회는 무기력의 정서다."

맞다. 후회하는 동안 현재가 과거가 되어버린다.

종이를 찢었다. 작은 조각들이 날린다.

오늘이라는 선물

헤르만 헤세의 시가 떠올랐다.

"모든 시작은 그 안에 마법을 품고 있다."

오늘도 시작이다.

어제의 후회를 안고 있지만, 오늘은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다.

전화기를 들었다.

"엄마? 나야.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갑자기 무슨 일이야?"

"사랑해요, 엄마."

침묵. 그리고 엄마의 웃음소리.

"나도 사랑해."

3초의 대화. 하지만 10년의 후회가 녹았다.

과거는 감옥이 아니다. 교과서다. 실패했던 기억들, 놓쳤던 기회들, 하지 못한 말들. 모두가 오늘의 나를 만든 재료들이다.

프로이트는 말했다.

"억압된 것은 반드시 회귀한다."

그렇다면 억압하지 말고 마주하자. 후회하지 말고 배우자. 과거에 갇히지 말고 과거와 춤추자.

새벽은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시간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대화하는 시간.

그리고 내일의 나를 준비하는 시간.

과거여, 고맙다. 덕분에 내가 여기 있다.

내일을 위한 편지

내일의 나에게 편지를 쓴다.

"35살의 나에게.

오늘 새벽, 과거와 화해했어. 이제 너의 차례야. 현재를 살아. 충실하게, 정직하게.

훗날 돌아봤을 때 후회하지 않도록.

P.S. 엄마한테 자주 전화해."

타임머신은 없다. 하지만 우리에겐 현재가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월요일, '분노의 온도'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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