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나비 12화>>

12화. 나의 서은

by 윤지안


《잿빛 나비》
12화. 나의 서은

은서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서은의 편지는 베개 곁에 놓여 있었고,
그녀는 문장을 되뇌듯, 속으로 계속 읽고 또 읽었다.

눈을 감아도 글씨가 보였다.
글씨 너머에 있는 목소리.
그 목소리는 바람처럼 다정했고,
어디서나 들리는 듯하면서도 어디에도 없었다.

**

새벽녘,
은서는 조용히 창문을 열었다.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그 안에 깃든 무엇인가가 따뜻했다.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은 보이지 않았고, 어둠은 여전히 깊었지만,
그 어둠이 이제는 덜 무서웠다.

**

다음 날 아침,
은서는 서은의 사진이 있는 벽 쪽을 바라보았다.

“나, 미안해. 정말 많이.”
그 말은 오래 머금었던 울음을 풀어내듯,
입술에서 떨리며 흘러나왔다.

“근데 이제, 서은아.
너를 계속 울리는 기억으로만 남기고 싶지 않아.”

**

서랍을 열고,
어릴 적 둘이 함께 찍은 사진을 꺼냈다.
놀이터에서, 기찻길 옆에서, 언덕 위에서.
그 속의 서은은 늘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은서는 그 사진들을 조심스럽게 정리해
작은 노트에 붙이기 시작했다.

페이지마다 짧은 문장을 적었다.

> ‘이날 너는 유독 웃었지.’
‘이건 우리가 같이 뛰어내려가다 넘어졌던 날.’
‘그날의 바람, 기억나?’
‘나는 너를, 잊지 않을게.’



**

그건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은서에게는
서은을 눈물 없이 떠올리기 위한 연습이었다.

이제 서은은
사라진 존재가 아니라, 살아 있던 시간이었다.
무너짐이 아니라, 남아 있는 빛이었다.

**

노트의 마지막 장에는 이렇게 적었다.

> ― 너는 나의 봄이었어.
그리고 지금도, 나의 서은이야.



**

그날 오후, 은서는 언덕에 다시 올랐다.
며칠 전 보았던 작은 봉오리는
이제 조금 더 자라, 꽃잎을 피우고 있었다.

그녀는 그 꽃 앞에 조용히 앉았다.
그리고 속으로 말했다.

“보고 싶어, 서은아.
그 말은 아마… 내가 평생 계속할 말일 거야.”

하지만 그 말 뒤에는
이제 더 이상 울지 않는 마음이 있었다.

**

햇살이 언덕을 감쌌다.
은서는 눈을 감았다.

바람은 조용히 스쳤고,
그 바람은 무언가를 데려온 듯,
아무것도 없던 하늘 아래
서은의 웃음이 잠시 머무는 듯했다.

작가의 이전글<<잿빛 나비 1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