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필 때마다, 나는 눈이 먼저 아프다.
아니, 아픈 것은 눈이 아니라 보는 방식이다.
사람들은 벚꽃을 본다고 말하지만,
나는 언제부터인가
벚꽃이 나를 본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꽃잎 하나하나가 시선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그 시선이 정렬되고 흩어진다.
그 순간, 나의 눈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다.
- 귀안(鬼眼)이 열린다.
귀안은 특별한 능력이 아니다.
그건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끝내 보게 되는 눈이다.
처음 귀안을 자각한 날은 평범했다.
회사 앞 가로수에 벚꽃이 만개했고,
점심시간의 사람들은 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꽃잎이 떨어지는 궤적 속에서,
무언가가 눈을 깜빡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꽃술이 아니라, 눈꺼풀처럼 접혔다 펴지는 무엇.
그 안쪽에는 반짝임이 아니라 기억이 있었다.
나는 그 기억을 알아보았다.
내가 잊었다고 믿었던 얼굴들—
말하지 못한 사과들—
돌아보지 않았던 순간들이,
꽃잎의 무늬처럼 겹겹이 붙어 있었다.
벚꽃은 과거를 장식하지 않는다.
벚꽃은 과거를 전시한다.
사람들은 왜 벚꽃 아래에서 웃을까.
아마도 그들은 아직 귀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안으로 본 벚꽃은 언제나 밤이다.
햇빛 아래에서도 어둡다.
빛은 사라지지 않지만, 의미가 사라진다.
대신 남는 것은 감정의 잔여물—
부끄러움, 후회, 질투,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죄책감.
꽃잎이 흩날릴수록,
그것들은 공기 중에 부유해 내 눈으로 들어온다.
눈을 감아도 소용없다.
귀안은 눈꺼풀 뒤에 있다.
벚꽃이 지는 날, 사람들은 “아쉽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안도한다.
지면서야 비로소, 그 눈들이 감기기 때문이다.
꽃잎이 떨어지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휴식이다.
보는 자와 보이는 자의 계약이 끝나는 순간,
그제야 내 시선은 다시 내 것이 된다.
하지만 해마다 봄은 다시 온다.
그리고 귀안은 기억한다.
나는 이제 벚꽃을 피해 다닌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피할수록 더 선명해진다.
창문에 비친 잔상, 사진 속 흐릿한 분홍,
심지어 흰 종이에 떨어진 먼지까지도 꽃잎처럼 보인다.
귀안은 벚꽃을 매개로 열리지만,
벚꽃만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결국 깨닫는다.
귀안의 벚꽃은 외부에 피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개화한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묻지 않는다.
왜 벚꽃이 나를 보는지.
대신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아직도 보지 않으려 하는가.
그 질문에 답하지 않는 한,
다음 봄—어느 순간—
귀안은 다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