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사라진 자리에서, 거울은 남아

by 윤지안


거울 앞에 서면,
나는 늘 나보다 먼저 선 사람을 만난다.
그는 나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언제나 반 박자 늦거나 빠르다.
손을 들면 손을 들고,
눈을 깜빡이면 눈을 감지만,
그의 눈빛에는
내가 막 지나온 시간들이 얇은 안개처럼 남아 있다.

디멘시아는 기억을 앗아가는 병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기억을 지우기보다
기억의 순서를 흐트러뜨리는 일에 가깝다.

어제는 오늘로 섞이고,
오늘은 수십 년 전의 오후로 미끄러진다.
그래서 거울 속 얼굴은 점점 낯설어지고,
낯섦은 두려움보다 먼저 슬픔을 데려온다.

어느 날, 그는 거울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잊는다.
이름은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을 것 같지만,
실은 가장 먼저 도망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름을 잃은 얼굴은 설명을 잃은 풍경처럼
존재하지만, 누구의 것인지 말해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거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주름의 위치, 눈가의 흔들림,
어깨가 내려앉은 각도까지
모두 정직하게 비춘다.

문제는 거울이 아니라,
거울을 해석하던 기억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거울은 여전히 ‘지금’을 보여주지만,
‘지금’을 이해할 언어가 마음속에서 빠져나간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디멘시아란 기억의 죽음이 아니라,
기억을 바라보는 방식의 변화가 아닐까 하고.

과거를 붙잡지 못하는 대신,
현재가 유난히 크게, 또 선명하게 다가오는 상태.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거울 앞에서
처음 보는 얼굴처럼 오래 자신을 바라본다.
그 순간만큼은,
기억이 없어도 감정은 남아 있다.

거울 속 그는 오늘도 나를 본다.
누군지 몰라도, 어쩐지 믿고 싶은 얼굴.
이름을 잊어도, 사랑했던 감정은 희미하게 남아
눈동자 어딘가에서 미세하게 반짝인다.

디멘시아는 많은 것을 가져가지만,
완전히 가져가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다.

거울 앞에 선 자신을 향해
조금은 조심스럽게, 그래도 끝내 건네는
그 알 수 없는 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