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는 언제나 상처의 근처에서 태어난다.
고치라는 이름의 밀실은
사실 보호가 아니라 인내의 흔적에 가깝다.
스스로를 묶고, 기다리고, 견뎌야만 열리는 문.
날개는 처음부터 가벼운 것이 아니라,
무거운 시간을 통과한 뒤에야 얻는 얇은 면허증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상처를 숨기지 않는다.
살 위에 남은 흉터뿐 아니라,
말하지 못한 문장들, 끝내 사과하지 못한 밤들,
괜찮은 척 삼켜버린 감정들까지도
모두 상처라고 부른다.
흉터는 아물었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기억의 표면으로 굳어질 뿐이다.
손으로 만지면 울퉁불퉁하고,
마음으로 만지면 여전히 아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은 아픈 곳에 설탕을 바른다.
쓴 기억 위에 달콤한 말을 덧대고,
무너진 날의 사진에는 필터를 씌운다.
“그래도 좋았잖아.”
설탕은 상처를 낫게 하지는 못하지만,
잠시 혀를 속이는 데에는 능숙하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단맛에 기대어 버틴다.
진실을 삼키기 위해서,
혹은 진실을 너무 날것으로 느끼지 않기 위해서.
나비는 설탕을 좋아한다.
꽃의 당분에 이끌려 날아가지만,
그 날갯짓은 결코 가볍지 않다.
바람은 늘 변덕스럽고, 날개는 쉽게 찢어진다.
그럼에도 나비는 날아간다.
상처가 있어서가 아니라, 상처를 통과했기 때문에.
나는 가끔 생각한다.
상처는 우리를 망가뜨리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형태를 바꾸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닐까.
나비가 되기 전의 시간을 부정할 수 없듯,
흉터 없는 성장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설탕처럼 달콤한 기억만으로는
날개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조심스럽게 상처를 바라본다.
너무 달게 덮지도 않고,
너무 잔인하게 후벼 파지도 않으면서.
언젠가 이 흉터들이
나를 조금 다른 방향으로 날게 할 거라는
희망을 남긴 채.
나비는 결국 날아간다.
상처를 품은 채로, 설탕의 유혹을 지나쳐,
자신의 무게만큼의 하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