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온도

by 윤지안


아침은 늘 미지근하다.
완전히 밝지도, 완전히 어둡지도 않은 채로
창가에 걸터앉아 있다.
나는 그 틈에 손을 넣어 본다.
밤의 잔열과 낮의 예감이 섞인 공기는 물처럼 투명해서,
손등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아주 얇은 떨림을 남긴다.

부엌에서 끓는 물소리가 난다.
작은 기포들이 바닥에서부터 올라와
수면을 흔드는 소리.
나는 그 소리를 좋아한다.
세상이 깨어나는 방식이
어쩐지 그와 닮았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컵에 물을 붓는다.
하얀 김이 위로 피어오르며 공기 중에 녹는다.
그 사이로 햇빛이 스며들어 작은 무지개를 만든다.
나는 그 찰나를 붙잡고 싶어 잠시 숨을 멈춘다.
숨을 멈추면 시간도 멈출 것 같아서.
그러나 김은 곧 사라지고,
빛은 제자리로 돌아간다.
남는 건 따뜻해진 손바닥뿐이다.

나는 늘 이런 식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사라질 것들을 바라보며,
사라지기 직전의 아름다움을 기억하려 애쓴다.

어제는 오래된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누렇게 바랜 편지들과
잊고 있던 향기가 들어 있었다.
종이를 만지자 손끝에 부드러운 먼지가 묻어났다.
그 먼지는 마치
시간이 부서져 가루가 된 것처럼 가벼웠다.
나는 그 가벼움이 두려웠다.
우리가 붙잡고 있다고 믿는 것들이
사실은 이렇게 쉽게 흩어질 수 있다는 걸,
손끝이 먼저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상하게도,
나는 사라짐을 미워하지 못한다.
사라지기에 우리는 더 선명해진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도드라지듯,
잃어버림이 있어야 기억은 깊어진다.
잊힌 것들은
어딘가에서 다른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고,
우리는 그것을 우연이라 부른다.

청밖에는 바람이 분다.
나뭇잎이 서로 부딪히며 낮은음을 낸다.
그 소리는 마치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파도 같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는다.
눈을 감으면 세상은 더 가까워진다.
보이지 않기에,
오히려 더 또렷해진다.

오늘의 공기는 약간 차갑다.
차가운 공기가 폐 안으로 들어오면,
가슴속이 투명해지는 기분이 든다.
나는 그 투명함 속에 잠시 머문다.
아직 쓰이지 않은 하루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채로,
하얀 종이처럼.

나는 안다.
이 하루 역시 언젠가는
기억 속의 먼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물의 온도처럼 분명하다.
손끝에 닿는 따뜻함,
숨결에 스미는 차가움,
빛이 만들어내는 짧은 무지개.

그 모든 것이 나를 통과해 간다.
그리고 나는,
그 통과의 한가운데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