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함으로 보존된, 날아가지 못한 기억들>
기억은 언제나 완성된 형태로 남아 있지 않다.
그것은 설탕처럼 쉽게 부서지고,
나비처럼 예기치 않게 날아간다.
나는 종종 혀끝에서 시작되는 기억을 믿는다.
단맛이 먼저 오고,
그다음에야 장면이 따라온다.
어릴 적 부엌의 오후,
햇빛 속에 떠 있던 설탕 입자들,
그리고—어째서인지—나비.
나비는 그날에도 있었다.
하얀 설탕 그릇 위에 내려앉은 적이 있었는지,
아니면 그저 내가 그렇게 기억하기로 결정했는지
알 수 없다.
기억은 사실보다 의지가 강하다.
원하면 만들어지고, 원하지 않으면 썩는다.
설탕은 보존의 상징이라고 배웠다.
과일을 졸이고, 시간을 붙들어두는 물질.
하지만 내 기억 속 설탕은 언제나 녹아 있었다.
손바닥에 올려두면 끈적하게 흘러내렸고,
그 위를 나비가 지나갈 때마다
날개에는 미세한 결정이 묻어났다.
그 결정들은 빛났다.
너무 반짝여서,
그 안에 무엇이 비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나는 나비의 날개를 만지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그러나 동시에 만졌다고도 기억한다.
손끝에 닿았던 가루의 감촉,
설탕인지 비늘인지 구분할 수 없던 순간.
그날 이후로 나는 경계를 잃었다.
살과 단맛,
기억과 환각 사이의 얇은 막이 찢어졌다.
나비는 짧은 생을 산다.
그 사실이 나를 안심시켰다.
곧 사라질 것들은 책임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억 속 나비는 죽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증식했다.
부엌의 벽지, 혀의 주름, 잠들기 직전의 어둠 속에서
설탕을 먹고 자랐다.
설탕은 달콤함의 약속이다.
고통을 가릴 수 있다는 믿음.
그래서 우리는 기억에 설탕을 뿌린다.
날카로운 모서리를 둥글게 만들고,
피 냄새를 캐러멜 향으로 덮는다.
그러나 너무 많은 설탕은
썩지 못하게 만든다.
부패하지 못한 기억은 살아 있는 척하며
계속해서 우리를 갉아먹는다.
어느 날, 나는 깨달았다.
나비가 기억의 형태라는 것을.
붙잡으려 하면 가루가 되고,
외면하면 어깨에 내려앉는다.
그 날개는 아름답지만,
확대해 보면 설탕 결정처럼
날카로운 모서리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기억은 항상 상처를 남긴다.
달콤한 이유로.
지금도 나는 가끔 설탕을 입에 넣는다.
그 순간, 혀 위에서 작은 날갯짓이 느껴진다.
보이지 않는 나비들이
내 기억의 파편을 핥아먹고 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흰 가루만 남는다.
나는 그것을 잊음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러나 사실은,
아직도 무언가가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형태를 바꿀 뿐.
설탕처럼,
나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