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유리는 잠들지 못했다.
권도현이라는 이름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또 다른 유리’의 메모.
나는 너야. 그리고 나는 죽었다.
누군가의 장난일까?
과거의 정신질환 증상이 다시 시작된 걸까?
아무리 자신을 타이르고 진정시켜도,
불안은 가라앉지 않았다.
새벽 두 시.
그녀는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몸을 담갔다.
오래된 재즈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눈을 감자, 검은 수면 아래서 무언가가 떠올랐다.
하얀 연구실.
은색 탁자.
그리고 그 맞은편에 앉은 남자—권도현.
『이 실험은 안전하지 않아.
우리 셋 중 하나는 돌아오지 못할 거야.』
『알아. 하지만 난 선택했어. 어떤 결과가 오든…
기억은 남아. 그러니까, 도현아—』
유리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물이 튀었고, 숨이 가빠졌다.
“그게… 뭐지?”
꿈이었다. 아니, 기억이었다. 너무 생생하고 논리적이었다. 낯설지 않았다.
그것은 과거의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 겪은 진짜 사건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거울을 바라봤다.
그리고, 거울 속에서—
자신이 웃고 있었다.
아니, 거울 너머의 유리가 웃고 있었다.
**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거울 너머의 유리는 똑같은 얼굴이었지만,
눈빛이 달랐다.
빛이 없었다.
그리고 입꼬리는, 기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래서, 결국 기억났구나.”
목소리는 귓속에서 울렸다.
어쩌면 실제로 들린 게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유리는 느낄 수 있었다.
저건 자신이다.
“너… 누구야.”
거울 속 유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말없이, 손을 들어 거울의 안쪽을 두드렸다.
톡. 톡.
마치 나비의 날갯짓처럼 가볍고,
하지만 너무도 정확한 신호.
“나는 네가 선택하지 않았던 그 모든 ‘너’의 집합이야.
그리고 곧, 이 세계는 열릴 거야.”
유리는 뒤로 비틀거리며 물에서 나왔다.
욕실 불이 꺼졌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낯익은 목소리.
자신의 것이지만,
분명히 자신이 아닌 어떤 것의 목소리.
“유리야, 기억해.
너는 ‘중심’이야.
너만이 이 우주들을 닫을 수 있어.
하지만… 네가 선택한 그 ‘포트의 손’이,
모든 문을 열었어.”
**
그날 이후,
유리는 ‘자신과 같은 얼굴의 사람들’을
몇 번이나 마주쳤다.
지하철 유리창, 백화점의 시범 화면,
사무실 복도 저편—
모두, 잠깐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들은 그녀를 바라봤고, 웃었으며, 경고했다.
“곧, 우리는 만난다.”
그리고 그 중 하나는 속삭였다.
“너는 나고, 나는 너야. 그런데 누가 살아야 하지?”